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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12화 (1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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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 12화

유진과 단둘이 걷는 거리는 당연하게도 너무너무 어색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길을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슬쩍 고개를 들어 유진을 쳐다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정면을 응시한 채 걷고 있었다.

그때의 사탕 사건 이후로 나는 유진과 따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럴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해야 할지.

유진은 그날 이후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방에만 틀어박혀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듣기로는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던데.

사실 유진은 11살 때부터 17살 때까지 아를란타의 가장 큰 학술원에서 공부를 했었다. 지금은 학기 중이 아니라 집에 있는 것뿐이니, 아마도 봄이 오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지.

그러니 방에서 공부한다는 말이 완전히 핑계라고는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싶어?"

으엉? 그런데 방금 너 뭐라고 했니? 어쩐지 지금 막 유진이 나한테 무슨 말을 한 것 같았는데.

나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가 의문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유진이 나를 내려다보지도 않은 채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지금도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의아해졌다.

뜬금없이 이런 걸 왜 묻는 걸까?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여기서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했었던가.

"응. 돌아가고 싶어."

물론 유진은 내가 말하는 장소를 어릴 때 살던 멜팅턴의 거리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하지만 딱히 정정해 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저 그렇게만 대답해 버렸다.

그 후 유진은 말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내게 있어 유진은 언제나 어려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라고 해서 내가 그 속을 파헤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웅성웅성.

유진과 나는 썰물과 밀물처럼 양쪽으로 밀려들어 왔다 밀려 나가는 사람들 틈을 말없이 걸었다. 흰 벙어리장갑을 끼고 있는 나와 달리 유진은 맨손이었다.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이 조금 빨갛게 얼어붙어 있는 것에 잠시 눈길이 머물렀다.

내 손을 감싸 쥐고 있던 힘이 느슨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서서히 약해지는 손길에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르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 그의 이름이 흘러나오기 전에 먼저 그의 손이 내게서 뚝 떨어져 나갔다.

온기가 사라진 손에 찬 공기가 밀어닥쳤다.

"유······."

나는 앞에 있는 뒷모습을 따라 한두 걸음 더 앞으로 내딛다가 곧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한 목소리가 하얀 숨결이 되어 겨울 공기를 수놓았다.

'사람이 많아서 길을 잃기 쉬우니 손을 꼭 붙잡고 가렴.'

나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는 유진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을 부르지도, 그의 뒤를 쫓지도 않은 채.

웅성웅성.

낯익은 갈색 머리카락이 곧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이 내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정말 7살이었다면 몰랐을까?

하지만 나는 어린애가 아니었고, 그래서 깨달아버렸다.

유진이 지금 이곳에 나를 버리고 갔다는 사실을.

***

시가지라 그런지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참 많기도 했다.

나는 일단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인파를 피해 거리의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그리고 채소 가게 앞에 널린 빈 상자들 위에 적당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와, 이렇게 떨어져서 보니 사람들이 생각보다 더 많은 것 같네. 여기서 애라도 잃어버리면 찾기 어렵겠는걸.

"······."

나는 상자 위에 오도카니 앉아 방금 전까지 유진과 잡고 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내 손은 텅 비어 있었고, 그 안에 머물고 있던 온기는 이미 겨울바람에게 빼앗겨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내가 어려서 기억하지 못했던 것뿐일까? 아니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기 때문에 무언가가 변한 걸까? 하지만 의문을 품어도 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진과 함께 걷는 동안 다른 생각에 잠겨 미처 몰랐는데, 이제 보니 이 길은 약재상에 가기 위해 아까 에른스트의 가족들과 지나갔던 길이 아니었다.

눈앞을 지나다니는 낯선 사람들. 처음 와 보는 낯선 거리.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낯선 20년 전의 지금 이 시간.

그 속에서 나는 홀로 미아가 되어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유진이 한 일이 무엇인지 알았는데도 미움도, 원망도 들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아직까지 이 현실을 반쯤은 꿈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지금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것이 지독히도 현실적인 동시에 몹시도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12살의 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며 나를 이곳에 두고 갔을지 그것만 아주 조금 궁금했다.

"아가, 엄마 기다리니? 추운데 안에 들어와 있으렴."

내가 너무 초연히 앉아 있던 탓일까. 채소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를 미아가 아닌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로 생각하고 친절히 권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눈앞을 오가는 사람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짤막하게 대답했다.

"난 아무도 안 기다려요."

채소 가게 아주머니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거리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앉아 있으려니 문득 어린 시절의 일이 생각났다.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판잣집에서 엄마의 병간호를 하던 일. 먹을 걸 구걸하러 골목의 집들을 전전하며 돌아다니던 일. 바구니의 꽃을 다 팔지 못해 옆집의 사라 아주머니에게 혼났던 일.

그리고 내가 건넨, 다 시들어 빠진 하얀 꽃을 들고도 눈물 어린 얼굴로 웃어주던 에른스트의 부부.

지금 눈앞에 있는 저 사람들 틈에 섞여 몸을 맡기면, 나는 이대로 아무 곳으로든 갈 수 있는 건가? 그건 어떤 의미로 내가 바라던 자유와도 닮아 있는 결과인 걸까?

그래······.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는 왜 그 집을 나갈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마다의 삶을 짊어진 이들이 수십, 수백 명 내 앞을 지나쳐 가는 것이 지겹다는 생각마저 들 때까지.

저벅.

내 앞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그로부터 어느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나는 사람들을 보는 것에 질려 상자 위에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 시선 끝에 어디선가 본 듯한 남성용 겨울 구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래 먼지가 얕게 묻은 반질반질한 구두코를 내려다보다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어느 새인가 내 앞에 서 있는 유진이 시야에 비쳤다.

급히 뛰기라도 했는지 언제나 단정하던 갈색 머리카락이 약간 헝클어져 있었다. 그의 입술에 걸려 있던 밭은 숨이 뒤이어 내 이마를 간질였다.

그 상태로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보다가······.

"가자."

이윽고 짤막하게 그리 말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의 눈 안에 고여 있던 감정들이 나한테까지 흘러들어 왔다.

그 검은 눈동자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뿌리 깊은 죄책감, 연민, 그리고 자괴감.

"······다녀왔어?"

나는 지금 이 순간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모른 척하며 그냥 그렇게 말했다.

방금 전 그와 나 사이에 벌어졌던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자 유진은 잠시 동안 목이 막힌 표정을 짓다가.

"······다녀왔어."

그렇게 대답했다.

"돌아가자."

나는 상자 위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번에는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진은 그것을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내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은 나보다도 차가웠다. 장갑 너머로까지 느껴지는 냉기에 손이 시렸다.

"나 다리 아파."

나는 어린애다운 투정을 유진에게 부려 보기로 했다. 어찌 보면 지금의 유진이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심술을 부린 것이기도 했다.

"업혀."

역시 유진은 단답으로 대답한 뒤 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그의 등에 업혀 버렸다.

"바보."

나는 유진의 등 위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충동적으로 손을 들었다.

"윽."

얍!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한데 머리나 뽑혀라!

"뭐 하는 거야?"

나는 내 앙증맞은 손으로 눈앞에 있는 갈색 머리카락을 얍얍 쥐어뜯었다.

"헤헤. 먼지가 붙어서 떼어주려고."

물론 되지도 않는 핑계였다. 하지만 네가 뭘 어쩔 건데! 내가 먼지가 있다면 있는 거야!

게다가 그동안 내가 노리고 있던 예쁜 뒤통수가 바로 코앞에 있지 않은가.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나는 내친김에 고사리손을 들어 그동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유진의 정수리까지 빠샤 때려 주었다.

그럴 때마다 유진은 움찔거렸지만 그는 나를 말리는 대신 그저 묵묵히 걷기만 했다.

이제 해가 지려는지 땅 위에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두 명의 바보가 만드는 그림자도 바닥에 길게 몸을 늘였다.

"유진 오빠 등 불편해."

"시끄러워."

유진은 여전히 쌀쌀맞게 말했지만 그래도 나를 고쳐 드는 손길은 이대로 두 번 다시 풀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그것이 어떤 감정 때문이든, 일단 지금은 그것으로 되었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4.5 그 오빠, 유진

'유진. 너는 장남이니 동생들을 항상 잘 보살펴야 한다. 우리가 없을 때는 네가 그 아이들의 아버지나 마찬가지니까.'

에른스트의 후계자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몸가짐과 함께 유진이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유진에게 있어 에른스트는 그가 한평생 지켜 나가야 할 생의 모든 것이었고, 또한 그가 죽을 때까지 이뤄 나가야 할 과업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그 책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유진은 에른스트와 그의 가족들을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했기에 기꺼이 자신의 삶을 이 에른스트에 걸기로 마음먹었다.

***

"한심하기는."

유진은 서늘히 눈동자를 내리깔며 속삭였다.

열두 살 소년의 눈빛이라 하기에는 그 온도가 지극히도 낮았으나 그마저도 그의 검은 눈동자에 어린 경멸만큼 차갑지는 않았다.

"일어나. 나까지 창피하게 만들지 말고."

그의 앞에는 바닥에 넘어져 있는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하리. 두 달 전 그의 부모님이 데려와 양녀로 삼은 출신도 모를 여자아이.

점심나절부터 카벨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곤욕을 치른 탓인지 아이의 팔꿈치와 무릎은 까져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미안해."

그를 본 순간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라던 아이는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직후 바닥을 짚고 일어나던 아이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이 한 차례 비틀거렸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여 앞으로 손을 뻗을 뻔하다가, 이내 주먹을 꽉 쥐며 일부러 더 싸늘하게 말했다.

"아리나는 너처럼 멍청하지 않았어. 인형이면 인형답게 좀 더 제대로 흉내 내보지 그래?"

"미안해."

하리는 또다시 그에게 사과했다.

그와 눈조차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는 동안 유진의 눈동자도 얕게 미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먼저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인정할 수 없어."

유진은 어금니를 악물며 자꾸만 심장 어귀를 갉아먹는 약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저 아이를 절대 에른스트로 인정할 수 없어. 죽은 아리나를 위해서도 그럴 수는 없는 거야.

"그래. 인정할 수 없어."

아리나 에른스트야말로 유진이 죽는 날까지 지켜 줘야만 할 그의 여동생이었으니까.

그러니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리나의 자리를 탐내며 들어온 저런 볼품없는 여자애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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