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그 오빠들을 조심해 11화
과연 내 예상대로 에리히는 대번에 양의 탈을 벗어 던지고 내게 소리 질렀다.
"싫어! 엄마 옆에는 내가 앉을 거야! 너 저리 가!"
"에리히!"
나는 에른스트 부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겁먹은 시늉을 했다. 에리히를 좀 더 약 올려 줄 생각이었다.
"그러면 못써."
"싫어, 나도 엄마 옆에 앉고 싶단 말이······."
"우리 에리히는 동생에게 양보할 줄 아는 착한 아이잖니. 응? 그렇지?"
하지만 뜻밖에도 악을 쓰며 떼를 쓸 것이라 예상했던 에리히는 그러지 않았다.
에른스트 부인이 그를 야단쳤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에리히와 시선을 맞추고 조근조근하게 속삭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셋째가 한순간 크게 흠칫하더니 이윽고 뻐끔뻐끔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쟤는 내 동생 아니······."
"에리히. 우리 아가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잖아."
에른스트 부인을 똑 닮은 맑은 벽안에 점차 얕은 물살이 일기 시작했다. 에리히는 수차례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듯 입술을 벌렸으나 결국은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제 어머니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자, 에리히는 엄마 앞에 앉자."
"으응······."
마침내 에리히가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마차에 오르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게 다시 시비를 거는 일도 없이, 또 어린아이답게 신이 나서 재잘거리는 일도 없이 그저 얌전히 자리에 앉아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나도 아무 말 없이 에리히의 동그란 머리통을 쳐다보았다.
"하리야, 이렇게 다 같이 외출하는 건 처음이지?"
나는 에른스트 부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응. 에리히랑 오빠들이랑 다 같이 가서 더 좋아요!"
"목적지에 도착하면 더 즐거울 거란다."
나는 에른스트 부인의 밝은 웃음소리에 서서히 속이 씁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 전부터 내가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지금 막 깨달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짧지 않으니 에리히처럼 편하게 앉아 있으렴."
나는 에른스트 부인의 말을 듣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이 나뭇가지에 앉은 눈의 빛깔로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나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
"우와아! 사람들 진짜 많아!"
사람들이 북적이는 도시에 발을 들이자마자 시가지 특유의 소란스러운 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카벨은 벌써부터 신이 나서 눈 만난 강아지처럼 자꾸만 어디론가 뛰쳐나가려 발을 움찔움찔거렸다.
아마 에른스트 공작이 진작부터 둘째의 팔을 붙들고 있지 않았다면 족히 열 번은 미아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오늘은 약재상만 들르면 되고 또 날씨도 포근하니 좀 돌아다녀 볼까?"
"그럼 어차피 시간이 걸리니 먼저 약을 주문하고 오는 게 좋겠어요."
에른스트 부부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다 같이 약재상에 들렀다. 목적은 겨우내 몸이 허약해진 에른스트 부인과 내 보약을 짓는 것이었다.
약초를 조합해서 약을 짓고 난 후에는 집에서 달여 먹으면 되기 때문에 외출을 끝낼 때쯤 맞춰 놓은 약을 다시 찾아가기로 했다.
"모처럼 다 같이 나왔으니 어디 가게에라도 들어갈까."
"하리는 어때? 먹고 싶은 거라든가 갖고 싶은 거 없니?"
나는 습관처럼 평소대로 거절하려고 입을 열려 했다.
'어린아이는 할 수 있는 한 오래 어린아이로 남아 있는 편이 좋은 법이지요.'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집사 휴버트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는 동안 바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강력히 주장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어린 시절에조차 이게 갖고 싶다든지, 이걸 사 달라든지 하며 떼를 써 본 기억도 없었다.
정말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나는 에른스트 부부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만약 이게 언젠가 깨게 될 꿈이라면 나는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을 다 해봐도 되는 게 아닐까? 비록 그게 너무나 사소해서 한편으로는 하찮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솜사탕 사세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솜사탕!"
나는 내 생각을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자, 어차피 나는 지금 7살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창피함도 부끄러움도 잊고 얼굴에 철판을 깔아 보도록 하자.
"솜사탕! 솜사탕 먹고 싶어요!"
나는 근처에 있던 노점상을 손가락으로 척 가리키며 당당히 외쳤다.
"엄마, 난 저거! 도마뱀 구이! 먹어 보고 싶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솜사탕을 얻는 데 아주 쉽게 성공했다. 다만 카벨은 질색하는 에른스트 부인 때문에 시무룩하게 도마뱀 구이를 포기해야만 했다.
"카벨. 대신 이거라도 먹어."
하지만 카벨은 유진이 권한 꼬치를 들고 금세 다시 회생했다. 나는 에른스트 공작과 함께 나란히 손을 붙잡고 솜사탕 노점상 앞에 섰다.
"아저씨, 분홍색 솜사탕 하나 주세요."
"네, 귀여운 아가씨! 오벨리아 직수입 솜사탕이라 아주 달고 맛있답니다!"
오. 이게 오벨리아에서 수입된 거였구나. 20년 후에는 아를란타 내에 있는 거리마다 흔하게 볼 수 있어서 미처 몰랐는데. 물론 그때는 '이 나이 먹고 뭐 하는 건가' 싶어서 한 번도 이걸 사 먹어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아련한 눈빛으로 노점상 아저씨가 열심히 솜사탕을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벨리아는 내가 살고 있는 아를란타와 친선 관계에 있는 나라로, 강력한 마법사 황제가 다스리는 강대국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20년 후에 그 나라 공주가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서 아를란타까지 덩달아 떠들썩했던 기억이 났다. 오벨리아의 금지옥엽인 공주라고 했던가.
그 공주 나이가 아마 나보다 한 살이 어렸던 것 같은데, 26살에 결혼이라니 일국의 공주치고는 참으로 늦은 혼사이기도 했다.
크흑. 생각하니까 또 조금 서러워지는구나. 듣자 하니 그 공주는 아버지인 황제에게 엄청난 총애를 받아 그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결혼을 허락받았다고 하던데.
아끼는 딸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옆에 끼고 있으려는 황제의 바람이었다고 들었다. 27살이 되도록 혼처를 못 구해서 노처녀로 있었던 나랑은 너무 다르잖아! 으엉.
더군다나 오벨리아 황실에서 공주를 다른 곳에 시집보내는 것도 아니라 부마를 궁에 들여 황가의 일원으로 함께 살기로 했다는데 왜 그렇게 결혼을 못 하게 막았는지 도통 모를 노릇이었다.
음. 아마도 그 황제는 심각한 팔불출이 아닐까.
나중에 그 공주가 황위를 직접 물려받을지, 아니면 보편적인 경우처럼 부마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될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이 떠들던데.
하지만 마법사는 원래도 수명이 길다고 하니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 봐도 될 문제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결론 내리곤 했다.
뭐, 어차피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후에 일어날 일이긴 하지.
그럼 지금쯤 그 공주는 얼마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을까.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으니 나처럼 구박받고 남의 눈치 보는 일도 없이 실컷 사랑받으면서 잘 살고 있겠지.
으흑. 부럽다······. 다음 생에는 나도 그런 공주로 태어나고 싶다. 으엉! 나는 도대체 전생에 무슨 업보를 지어서 세 똥 덩어리들하고 두 번씩이나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자, 하트 모양 솜사탕입니다!"
"와아!"
앗, 생각하고 있는 사이 솜사탕이 나왔다! 나는 노점상 아저씨가 솜씨 좋게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준 분홍색 솜사탕을 들고 셋째 녀석이 있는 곳으로 도도도 뛰어갔다.
"에리히!"
에리히는 마차에서의 일이 있고 난 후부터 한껏 풀이 죽어 내내 조용한 참이었다. 나는 토끼털 망토를 휘날리며 그에게 달려가 대뜸 말했다.
"'아' 해!"
"뭐?"
"아!"
"아? 읍."
얍! 이거나 먹어라!
내 고사리손이 에리히의 입으로 돌진했다. 그는 나를 따라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놓고 곧 그 안으로 들어온 것에 놀라 소스라쳤다.
"맛있지?"
"지금 뭘."
"자, 더 먹어. 맛있는 거야."
"안 먹······."
"뭐? 너무 맛있다고? 더 먹고 싶다고? 아빠! 솜사탕 하나 더 사도 돼요?"
나는 에리히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다다다 외친 뒤 다시 솜사탕 노점상을 향해 뛰어갔다.
아까부터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들기나 하고 진짜 몹쓸 셋째 똥 덩어리였다.
"자, 새 것 줄게."
"안 먹는다니까!"
"나중에 울지 말고 먹어."
생각 같아서는 그냥 입에 막 우겨 넣고 싶었지만 에른스트 부부가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에리히를 향해 에헤헤 웃으며 사이좋은 척 솜사탕을 들려 주었다.
"안 먹어!"
하지만 이놈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었다. 셋째의 손에서 내던져진 솜사탕이 다음 순간 바닥을 뒹굴었다.
"에리히, 지금 뭐 하는 거니!"
당연하게도 에리히는 에른스트 부부에게 혼이 났다.
나는 에리히가 유진에게 매달려 얼굴을 푹 파묻는 것을 보고 끄응 신음했다.
저 자식, 솜사탕이 얼마나 맛있는 건데 솜느님의 고귀함도 모르고! ······가 아니라. 어유. 도대체 얘를 어쩐다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좀처럼 감을 못 잡겠네. 으윽. 역시 어린애는 너무 어렵구나.
모처럼의 나들이가 엉망이 되어버린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 후로 에른스트 부부는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그래도 나들이가 끝날 때쯤에는 에리히가 어느 정도 마음을 풀고 에른스트 부인에게 안겨 들어서 다행이었다. 물론 끝까지 입은 한 번도 열지 않았지만.
"이제 약을 찾아와야겠구나."
에른스트 부인이 에리히를 안은 채 걷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약은 에른스트 공작과 유진이 찾으러 가기로 했다.
"이런. 에른스트 공이 아니십니까."
하지만 시기 좋게 에른스트 공작을 아는 사람이 나타나 버렸다. 그냥 무시해도 될 만한 인사는 아닌지, 에른스트 공작은 자리에 서서 콧수염을 기른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른스트 부인도 그와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옆에 있던 유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유진. 아무래도 네가 다녀와야겠다."
"그럴게요."
이대로 에른스트 공작을 기다려도 되겠지만 약재상의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는 게 문제였다. 그럼 난 저쪽에 가만히 짜져 있을까나······.
"하리랑 같이 다녀오렴."
으억! 하지만 에른스트 부인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유진도 그 말에 눈매를 움찔거렸다.
"저 혼자 다녀올 수 있어요."
"혼자서 세 아이를 다 보고 있기가 힘들구나. 카벨은 눈을 돌리면 어디로 튈지 모르고, 에리히는······."
에른스트 부인은 자신에게 찰싹 안겨 있는 에리히를 슬쩍 내려다본 뒤 이내 유진과 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 많아서 길을 잃기 쉬우니 둘이 손을 꼭 붙잡고 가렴. 하리는 유진 오빠한테 잘 붙어 있어야 한다."
나는 표정을 썩히지 않도록 힘겹게 노력해야만 했다. 에른스트 부인의 생각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줌마, 지금 나랑 유진이랑 화해시키려고 그러는 거죠? 지난번 사탕 사건 이후로 유진과 내 사이가 서먹해 보이니까 일부러 우리 둘만 따로 보내는 거 맞죠? 그렇죠? 으앙!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잖아!
심지어 에른스트 부인은 유진과 내 손을 직접 겹쳐 주기까지 했다. 손이 닿는 순간 유진과 나 둘 모두가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조심해서 다녀오렴!"
결국 그녀의 환한 낯빛에 떠밀려 유진과 나는 어색하게 손을 붙잡은 채 길을 나서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