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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8화 (8/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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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 8화

나는 혹여나 말이 씨가 될까 싶어 내 안에서 계속 맴도는 재수 없는 생각을 애써 떨쳐 내 버렸다.

"열이 쉽게 가라앉지를 않네."

에른스트 부부는 내가 퍽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렇게 연달아 아픈 것은 처음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새로운 수건을 물에 적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또 밤새 내 병간호를 할 작정인 것 같아서 나는 말했다.

"저 하나도 안 아파요. 가서 주무세요."

"아가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으면 안 될까? 방에 혼자 두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

에른스트 부인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들을 아직 불편해하는 게 티가 난 모양이다.

그녀의 부탁은 간절하기까지 해서 결국 나는 거부의 말을 더 내뱉지 못하고 말았다.

할 수 없지. 빨리 자는 척을 하자.

"푹 쉬렴, 하리야."

에른스트 공작은 부인의 어깨를 한번 감싸 안은 뒤 먼저 방을 나섰다.

"아빠, 쟤 많이 아파?"

"그래. 하리는 쉬어야 하니 조용히 나가자."

문가에서 잠시 형제들의 목소리가 들리다가 곧 사라졌다.

"몸이 춥거나 또 속이 안 좋지는 않니?"

"아니요. 괜찮아요."

조용해진 방 안에서 그녀가 물었을 때,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에른스트 부인이 잠시 동안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내게 손을 뻗었다.

"하리야. 아플 때는 좀 더 어리광부려도 된단다."

머리 위로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손길이 쓸고 지나갔다.

"나는 네 엄마잖니. 그이는 네 아빠고."

"······."

"그러니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도 괜찮아."

두 귀에 흘러드는 목소리는 그 손길만큼이나 부드럽고 다정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너는 우리 딸이고 우리는 언제나 하리의 편이란다."

조금씩 기분이 이상해졌다. 속이 조금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딘가가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한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마주한 에른스트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이를 어르듯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방 안 가득한 정적이 문득 평화롭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보호받는 기분이 드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무 걱정 말고 푹 자렴.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정말 그럴 리가 없었는데도, 기이하게도 그녀의 속삭임을 듣고 있는 동안은 그 말처럼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이마를 간질이는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하리야, 많이 먹으렴."

"아저씨도 이거 드세요."

"아빠라고 불러 주면 먹으마."

오싹!

"아, 아빠······."

나는 아직 완전히 입에 붙지 않은 소리를 웅얼거리며 내 앞에 있는 토마토 샐러드를 퍼먹었다.

에른스트 공작은 그것만으로도 좋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가 권한 브로콜리를 먹기 시작했다.

훗. 바보 같은 아저씨. 내가 브로콜리라면 질색을 해서 대신 먹어줄 사람으로 아저씨를 고른 건지도 모르고.

하지만 어쨌거나 이 초록 똥을 대신 해치워 준 건 고마웠기 때문에 나는 에른스트 공작을 올려다보며 헤에 웃어주었다.

"하리야, 골고루 먹어야지."

그런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포크가 다가오더니 방금 전 내가 아저씨의 뱃속으로 치워 버렸던 초록색 똥이 접시 위로 내려앉았다.

"아버지도요. 음식을 가려 먹이면 하리 몸에 좋지 않아요. 가뜩이나 병치레도 잦은데 영양을 생각해서 골고루 먹게 해야죠."

"그래. 그건 그렇구나. 자, 하리야. '아' 하렴."

나는 내 앞에 들이밀어진 포크를 보며 표정을 썩히고 말았다.

유진, 너! 내가 브로콜리 싫어하는 거 알고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옳지. 우리 하리 잘 먹는다."

나는 유진을 째려보며 초록색 똥 덩어리를 씹어 먹었다. 나, 나는 이까짓 걸로 지지 않아!

"나도, 나도 잘 먹어!"

"그래, 카벨도 착하다."

나는 이제부터 끼니때마다 나를 대신해 브로콜리를 먹어줄 대상으로 카벨을 점찍기로 하고 남몰래 눈을 번뜩였다.

***

"아에이오우. 으브부부베!"

식사 시간이 끝나고 방에 혼자 있게 되었을 때, 나는 혼자서 열심히 입을 풀기 시작했다.

이 나이 때는 원래 다 이런 건가? 안 그러고 싶어도 종종 혀 짧은 소리가 난단 말이야? 으으. 그래서 나도 모르게 가끔씩 흠칫흠칫 놀라고.

똑똑.

"하리야. 약 먹어야지."

헉. 나는 에른스트 부인이 손수 들고 온 약을 사약 보듯이 내려다보았다.

돌팔이 의사가 지어주고 간 이 약은 어마어마하게 써서 며칠 내내 나는 완전히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나는 빨리 이 약해 빠진 몸을 수리해야 했기에 약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마셨다.

"하리는 약도 잘 먹고. 참을성이 많구나."

그런데 어째서인지 에른스트 부인은 그런 나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윽고 설핏 웃으며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아까 외출했을 때 사 온 거야. 약 먹을 때마다 하나씩 줄 테니 먹으렴."

손을 펼쳐 보자 반투명한 얇은 종이에 싸인 노란 사탕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칵.

앗. 고맙다는 말도 아직 못했는데 벌써 나갔네.

나는 사탕을 먹는 대신 손에 들고 만지작거렸다.

착각인지 손안에서 울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창문 밖에서 아우성치는 바람 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어째서일까. 지금 당장 이 사탕을 먹어 치우기에는 왜인지 좀 아까운데······.

똑똑.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에른스트 부인이 다시 돌아왔나?

"네."

나는 문밖의 사람에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이내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는 그 사실을 곧바로 후회해 버리고 말았다.

"기껏 병문안 온 사람한테 표정이 그게 뭐지?"

내 얼굴이 어지간히 썩어 있었는지 유진이 나를 향해 눈매를 찡그려 보였다.

그럼 뭐, 내가 널 보고 반가운 기분이 들겠니? 게다가 병문안은 무슨 병문안. 방금 밥 먹을 때에도 얼굴 봤잖아!

"왜 왔어?"

"나라고 네 얼굴을 보고 싶어서 온 줄 알면 곤란해."

얼씨구. 그건 나도 안단다.

"딱 30분만 있다가 나갈 거야."

그렇게 말한 유진은 정말 내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갈 생각인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잠깐 동안 생각한 뒤 유진이 이러는 이유를 깨달았다.

"아주머니가 오빠한테 나랑 같이 있어주래?"

"영 바보는 아니군."

"그냥 지금 나가서 내가 잔다고 해."

"어머니가 방금 들어왔다 나가셨는데 그걸 믿으시겠어?"

그건 또 그랬다.

유진은 나와 말조차 섞기 싫은 듯 고개 한 번 내 쪽으로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그쪽이 편하니까 어차피 상관없었다.

헉. 그러고 보니까 저 사람 대단하다. 이 분홍 방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도 저렇게 눈 하나 깜짝 안 하다니!

과연 피도 눈물도 없는 유진이로군. 그래, 당신은 커서 그렇게 냉혈한이 될 자격이 아주 충분해.

유진이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내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침묵하자 방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그나마 내가 아파서 그런지 다른 두 놈도 시비를 걸지 않아 다행이었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뒤 아직 손안에 있는 것을 만지작거렸다.

바스락.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유진이 불에 덴 듯이 흠칫하더니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걸 왜······."

그의 눈동자가 내 손에 있는 사탕에 못 박힌 것과 그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어?"

얼씨구? 내 사탕에 네가 전세 내셨습니까?

나는 미간을 구기며 삐뚜름하게 대답했다.

"방금 전에 아주머니가 주셨으니까."

덜컹!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유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엥.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영문을 모른 채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유진의 말에는 그만 속에서부터 화악 열이 뻗치고 말았다.

"이리 내. 그건 아리나가 먹던 거야."

오호라. 그러니까 지금 이 사탕이 아리나가 생전에 좋아하던 거라서 내가 들고 있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 뭐, 이 말이야?

아리나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잔병치레를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들었다. 그녀가 어린 나이에 죽은 이유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지병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 아마도 이 사탕은 에른스트 부인이 약 시간마다 딸에게 주던 것인 모양이었다. 나는 방금 전 보았던 그녀의 슬픈 눈동자를 떠올렸다.

"나한테 줘."

"싫어. 이건 내 거야."

유진이 재차 내게 말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에른스트 부인이 방금 전 내게 주고 간 사탕인데 이걸 내가 왜 너한테 줘야 해? 더군다나 그 이유가 아리나 때문이라니.

나는 손에 있는 사탕을 더 세게 꽉 움켜쥐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한 번 더 귀청을 울렸다.

머릿속이 점차 뜨끈하게 달아올랐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유진의 얼굴에 이유 모를 초조한 빛이 드리워진 것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

"네가 먹어도 될 게 아니야. 당장 이리 달라니까."

"싫어, 내 거야."

"고집부리지 마!"

그는 답답하다는 듯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몇 번인가 달싹여지던 입술은 결국 아무 말도 토해 내지 못했다. 나는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유진이 입을 앙다무는 것을 보았다.

"뭐야, 왜 이래?"

계속 주먹을 꽉 쥐고 있던 내 손에 유진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민첩하게 그것을 피해 버렸다.

"진짜 이럴 거야? 네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라고."

"아주머니가 나한테 준 건데 왜?"

유진은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네가 생각해도 할 말이 없냐? 세상에. 자기 여동생이 좋아하던 사탕이라서 내가 먹으면 안 된다니. 이런 치사하고 유치한 생각이 또 어디에 있대? 어른스러운 척하더니 너 진짜 12살 맞구나!

"그거 이리 내놔!"

유진은 결국 안 되겠는지 내 손에서 강제로 사탕을 빼내 가려 했다. 하지만 나는 몸을 요리조리 움직여 그의 손을 재주 좋게 피해 버렸다.

흐헹.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인 줄 알아? 이래 봬도 내 별명이 멜팅턴의 날다람쥐였다고!

"유진 오빠, 이제 보니까 되게 둔하다. 이게 안 돼? 이게 안 돼? 응응? 응?"

"너 진짜!"

졸지에 몇 번이나 볼썽사납게 헛손질을 하게 된 유진의 이마에 마침내 빠직 핏대가 섰다. 내가 얄밉게 사탕 든 손을 흔들며 깐죽거리기까지 하자 유진은 제대로 약이 오른 듯했다.

곧 그가 이제까지의 체면치레도 모조리 던져 버리고 내 침대로 몸을 날렸다.

"으억!"

우리 둘 다 잊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나는 아직 병자였다. 유진을 피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 순간 강한 현기증이 나를 덮쳤다.

"뭐, 누가 둔하다고?"

결국 나는 유진에게 붙잡혀서 침대에 다시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곧 내 위로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이것 봐. 내가 이겼······."

유진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기세등등할 수 있었던 건 잠시뿐이었다.

허공에서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몇 번 깜빡이는 동안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바로 그 순간 우리 둘 다 쩡하고 얼어붙어버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따로 입을 열지 않아도 지금 유진이 나와 같은 마음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내가 이 나이 먹고 지금 얘랑 뭘 한 거지?

우리는 동공지진을 일으키며 서로의 눈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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