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그 오빠들을 조심해 6화
나는 잠깐 그가 내민 손을 노려보다가 이내 서서히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사르르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고마워, 오빠."
연기는 너만 할 수 있는 줄 아니? 사이좋은 척, 착한 동생인 척은 나도 할 수 있거든!
나는 눈꼬리를 접으며 아마도 7살의 하리로서는 처음으로 그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바로 그 순간 유진이 자리에 돌처럼 굳어져 버렸다.
응? 이 반응은 또 뭐지?
나는 의아했지만 어쨌든 유진의 뒤에 있는 에른스트 부인을 의식해서 웃는 얼굴 그대로 그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내가 힘주어 잡은 유진의 손이 크게 움찔거리더니, 곧이어 내 손을 타악 뿌리치는 것이 아닌가?
"으앗!"
아니, 이게 뭐야! 이건 또 무슨 신종 괴롭히기죠? 당신 지금 일부러 그랬지? 나 넘어지라고 고의로 손 놓은 거지? 근데 너 이렇게 유치한 애였냐!
"어머, 하리야!"
내가 뒤로 벌러덩 넘어진 것을 본 에른스트 부인이 나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앞에 있는 사람을 한 차례 흘겨보았다.
희한하게도 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이 한순간 나를 보고 흠칫하다가,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뒤이어 그가 내뱉은 말은 나로서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손을 잘 잡았어야지. 어머니, 식사 때 하리에게 밥을 더 많이 먹여야겠어요. 이제 보니 힘이 너무 약하네요."
당연히 나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유진은 내가 무어라 다른 말을 하기도 전에 내 팔을 붙잡고 나를 단번에 일으켜 세워버렸다.
"맞아. 하리가 너무 연약해서 걱정이긴 하지. 겨울이기도 하고, 약이라도 지어 먹이는 게 좋을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유진이 나를 위해서 순순히 보약을 지어 먹이라고 하는 건 당연히 아닐 거고.
보통 이 나이 정도 되는 어린애들은 약 먹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니 날 질색하게 만들 속셈으로 저러는 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나와 동갑인 에리히도 어젯밤 감기약을 피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으니까.
하지만 난 진짜 7살 어린애가 아니었다.
크읍. 에른스트에서 지어 먹는 보약을 대충 만들 리는 없으니 이참에 나도 몸보신이나 할까나.
그렇잖아도 지금 이 몸은 너무 부실해서 팔다리가 무슨 나뭇가지 같은걸.
그래, 보약 한 첩 지어 먹으면 내 상태도 지금보다는 좀 나아지겠지. 그럼 저 못된 놈들도 좀 더 효율적으로 물 먹일 수 있고······.
어흑.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 진짜 좀 늙은 것 같다.
그렇게 내 나름대로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그럼 겸사겸사 날이 좀 따뜻하게 풀리면 외출하자. 오랜만에 온 가족이 다 같이!"
오소소.
어디선가 밀려온 찬 기운이 스멀스멀 뒷덜미를 시리게 만들었다.
에른스트 부인은 봄볕 같은 환한 미소를 흩뿌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뒤에 선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저, 저기. 그 말은 좀 지뢰였던 것 같아요. 지금 유진이랑 에리히가 또 저를 무섭게 쳐다보고 있는데요?
"정말 즐거운 시간이 될 거야."
에른스트 부인은 정말 그렇게 철석같이 믿는 듯,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웃으며 옷감을 마저 고르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이제 보니 너한테도 재주가 하나쯤은 있었구나."
그 직후 섬뜩한 음성이 고막을 찔러 들어왔다.
"네가 무슨 수로 어머니와 아버지를 홀린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한테는 안 통해."
다음 순간 내가 마주한 것은 싸늘히 벼려진 분노로 물든 검은 눈동자였다.
원래부터도 유진은 12살 어린아이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러웠지만,
지금은 그 나이에 결코 보이기 쉽지 않은 농도 짙은 증오심을 내게 표출하고 있었다.
"'가족'이라고?"
날카로운 냉소가 허공을 갈랐다.
"인정 못 해. 절대로."
유진은 그렇게 뇌까린 뒤, 그대로 나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갔다.
"너 같은 거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나를 노려보던 에리히도 그렇게 말한 뒤 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휴. 혼자 남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애들은 애들이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제 와서 고작 저런 어린애들 악담에 상처받기에 나는 너무 나이 들어 있었지만 말이다.
으, 으윽, 잠깐······. 오히려 내가 나이 들었단 사실 자체에 지금 더 상처받은 것 같아. 으흑.
아무튼, 저런 직접적인 비난을 너무 오랜만에 들어봐서 그런지 좀 새롭기는 하지만 그뿐이었다.
어차피 저건 다 내가 삼 형제와 사는 동안 거쳐 온 과거가 아닌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교묘해지던 괴롭힘에 비하면 이건 오히려 귀엽네, 귀여워. 응, 그래. 징그럽게 귀엽다. 에퉤퉤.
나는 아까 전 넘어질 때 바닥에 박았던 무릎을 쓸다가 조용히 내 방으로 향했다.
아, 이거 무릎에 멍들 것 같은데. 셋째 놈, 어린 게 앙칼지기는. 앞으로는 어디에서건 방심하면 안 되겠어.
달칵.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라 눈에 보이는 문고리를 돌리자 온통 현란한 분홍색으로 도배된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앙, 이런 유치한 분홍방 싫어!
나는 방 안 가득한 분홍분홍한 물건들에 치명타를 입고 휘청거렸다.
하지만 물론 방이 마음에 안 든다는 말 같은 걸 에른스트 부부에게 하지는 못 했다.
그들이 나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이 방을 꾸며 주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진짜 7살이었던 그 시절의 나는 이 방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생전 처음 가져 본 커다란 방이었던 데다가 가난했던 나로서는 욕심조차 내지 못했던 알록달록한 물건들로 가득했으니까.
다만 지금은······. 알다시피 내 나이가······. 어흑.
당연히 세 형제는 에른스트 부부가 내 방을 공들여 새로 꾸며준 일로 거의 한 달 내내 나를 괴롭혀댔다.
"으허."
나는 푹신한 침대 위로 그대로 몸을 날렸다.
아이, 좋구나. 20년 후 내 침대도 폭신폭신 말랑말랑 좋지만 이 침대도 그에 못지않게 훌륭해!
덜컹.
그때 들려온 소리에 힐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메마른 나뭇가지가 겨울바람에 앙상한 몸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죽 바람이 매서운지 단단히 잠긴 창문이 요란한 소리를 낼 정도였다.
''가족'이라고?'
문득 방금 전 유진이 읊조리고 간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인정 못 해, 절대로.'
그리고 그 순간 보았던 두 사람의 차가운 얼굴도.
이 집에 있던 20년 동안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아리나 에른스트. 비록 짧은 생이었지만, 사는 동안 너는 그들에게 정말 많이 사랑받았나 봐.
그래서 누군가는 네 빈자리를 견딜 수 없어 거기에 나를 대신 세워 놓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네 자리를 대신 차지한 나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해.
하지만 나는 그런 것도 그냥 다 괜찮았다고.
지금처럼 이 미친 짓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야! 어흐흑!
"으허으헝!"
다시금 눈물이 앞을 가려서 나는 침대 위에서 한참 동안 발버둥 쳤다.
꿈이면 빨리 깨라, 빨리 깨! 나 지금 눈 뜰 준비 다 끝났단 말이야! 잠에서 깨려면 지금이 제일 좋은 타이밍이라고!
그리고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새신부가 되는 거야! 자, 하나, 둘, 셋 하면 이제 나는 깨어난다!
덜컹덜컹! 휘오오오!
하지만 내 귀에 들리는 것은 여전히 시끄러운 바람 소리뿐이었다. 결국 나는 침대 위로 맥없이 팔다리를 떨구고 말았다. 나는 두 눈을 멍하게 뜬 채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는 꿈도 희망도 없어."
이러려고 내가 망할 놈들 틈에서 20년을 버텼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으흑.
휘오오.
내 시끄러운 마음을 아는지 겨울바람은 창밖에서 여전히 우렁차게도 울어 대고 있었다.
***
"페니. 쫓아내!"
"멍!"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그는 2층 복도에서 강아지와 놀다가 나를 발견한 직후 저따위 명령질을 내리고 있었다. 황금색 털을 가진 강아지는 에른스트의 애완견인 골든래트리버 암컷으로, 이름은 페니였다.
"왈왈!"
나는 이 강아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잊겠는가. 에리히의 명령이라면 죽는시늉도 하는 이 강아지 때문에 내가 무서워 덜덜 떨었던 세월이 몇 년인데.
솔직히 셋째만큼이나 이 강아지도 얄미워서 때려 주고 싶을 때가 왕왕 있었지만 사실 주인의 명령을 들을 뿐인 이 가엾은 동물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크르릉!"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다가오는 강아지의 뒤에서 에리히가 기세등등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흥. 하지만 네 뜻대로 될 줄 알고?
흐읍. 나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신 뒤 목청껏 외쳤다.
"페니, 뛰어!"
물론 미리 준비해 온 미끼를 강아지의 눈앞에 두고 흔들다가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얍! 이거나 받아라!
"컹!"
페니는 귀와 코를 쫑긋거리더니 이윽고 내가 던진 간식을 쫓아 복도 끝을 향해 달렸다.
"페, 페니! 어디 가!"
당연하게도 에리히는 페니의 배신을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듯 아연실색했다.
"이런 못된 짓이나 시키고. 페니가 가엾지도 않아?"
나는 팔짱을 끼고 에리히를 향해 이죽거렸다. 그러자 곧 그가 두 눈을 번뜩이며 이를 부득 가는가 싶었다.
"페니! 당장 이리 와!"
"멍!"
페니는 에리히의 부름을 받고도 내가 던진 간식에 코를 박고 있다가 그것을 다 먹어 치운 뒤에야 다시 뛰어오기 시작했다.
"페니! 너 말 안 들을래? 누가 그런 거 먹으랬어! 또 그러면 혼날 줄 알아!"
어이구. 상꼬맹이도 이런 상꼬맹이가 없었다. 애초에 페니가 뭘 잘못했다고?
"페니. 착하지? 이거 먹어."
"멍멍!"
"옳지. 예쁘다."
나는 남아 있던 애견용 간식을 페니에게 주며 노란 털을 쓰다듬었다.
에리히의 명령에 따라 내게 이를 드러냈던 방금 전의 모습과 달리, 지금의 페니는 나를 향해 꼬리를 마구 흔들며 내가 주는 간식을 온순히 받아먹고 있었다.
"이, 이게 지금."
에리히는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동공을 흔들었다.
"너 페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보면 몰라? 간식 줬잖아."
"네가 왜 페니한테 간식을 줘! 네가 뭔데!"
어유, 하여튼 어려 가지고.
나는 셋째 놈을 무시하고 페니가 가장 좋아하는 곳만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이 짓도 몇 번을 하다 보니 이제는 익숙했다.
"컹컹! 헥헥."
페니는 이제 배까지 뒤집으며 내게 우호적인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에리히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아이, 착하다. 우쭈쭈쭈."
흥. 이래 봬도 이 강아지가 좋아하는 것들은 훤히 꿰고 있다고!
"페니, 손!"
"컹!"
"페니, 앉아!"
"멍멍!"
"페니, 자는 척."
털썩!
주머니에서 간식을 하나 더 꺼내 눈앞에 두고 흔들자 페니가 내 말을 따라 자는 시늉까지 해냈다.
"마, 말도 안 돼."
아니, 말이 된단다.
올해로 페니가 에른스트의 애완견이 된 지 거의 2년째던가. 아리나가 죽은 직후부터 기르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었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 이 시점에서 에리히가 페니를 돌봐 온 시간보다 내가 페니를 관찰하며 지낸 시간이 더 길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지금의 페니에게 나는 반년 정도밖에 얼굴을 맞대지 않은 사람일 테지만 나는 페니가 좋아하는 간식이나 좋아하는 놀이,
또 어디를 만져 주면 기분 좋아하는지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런 걸 이렇게 잘 알게 된 이유는 틈만 나면 페니를 이용해 나를 위협했던 이 셋째 에리히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