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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5화 (5/138)

# 5

그 오빠들을 조심해 5화

"싫은 게 당연하지."

그리고 이런 꿈속에서나마 어린 유진에게 질문하고 만 것은 내가 바보이기 때문이었다.

"네가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가 널 좋아하게 될 일은 결코 없어. 넌 아리나가 아니니까."

예상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았다. 게다가 20년 후의 그들도 아니고 어린 삼 형제라면 더군다나 나올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나도 말했다.

"나도 너희가 싫어."

"너······."

"정말 싫어."

유진이 나를 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싫어."

나는 다 귀찮아져서 그를 등지며 몸을 옆으로 돌렸다. 투욱. 이불 위로 내 이마에 얹어져 있던 물수건이 떨어져 내렸다.

이게 꿈인 걸 알면서도 나는 왜인지 조금 분해졌다.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면, 너희 같은 거 두 번 다시는 쳐다도 안 볼 거야.

애초에 너희들이랑 만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처음부터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것처럼. 그렇게 다 잊고 살 거야.

"이제 다 싫어."

"······."

"돌아가고 싶어······."

몸이 아파서인지 별것 아닌 사소한 일 하나에도 서럽고 억울했다. 나는 속으로 나쁜 놈들, 못된 놈들 등등을 중얼거리며 이불 속으로 얼굴까지 푹 파묻었다.

유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런 내 뒤에서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

"오셨어요, 아버지. 어머니."

"하리는?"

에른스트 부부가 돌아온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들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나를 찾았다.

그것이 퍽 못마땅한지 에른스트의 부부와 함께 내 방으로 들어선 세 형제는 저마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리야. 오, 또 열이 올랐다고?"

"주방장에게 네가 좋아하는 감자 수프를 만들어 두라고 했단다. 입맛이 없어도 조금만 먹자. 응?"

나는 침대맡에 다가와 걱정 어린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막 돌아온 탓인지 내 얼굴에 닿는 손은 차가웠다. 하지만 내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따뜻한 손이었다.

"어때? 먹을 만하니?"

나는 푹신한 베개에 기대앉은 채 침대 위에서 그들이 가져다준 수프를 먹었다.

나를 간호하다가 얼마 전 덩달아 쓰러졌던 에른스트 부인의 얼굴은 나 못지않게 파리했다.

나는 아기가 아닌데도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직접 내게 수프를 떠먹여 주고 있었다. 스푼을 든 가느다란 손목을 보다가 나는 말했다.

"맛있어요, 엄마."

투둑!

에른스트 부인의 손에서 은식기가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방금 전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시······. 다시 한번만 말해주겠니?"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요청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엄마."

연약하게 흔들리던 벽안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시선을 움직여보니 에른스트 공작 역시 감동한 눈빛으로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세 형제만이 저 멀리서 저들끼리 노닥거리다 말고 충격을 받은 얼굴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번에는 에른스트 공작을 향해 말했다.

"아빠, 저 물 마시고 싶어요."

"그래, 우리 하리 물이 마시고 싶······."

쨍그랑!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남몰래 눈물을 찍으며 내게 물을 따라 주다가 퍼뜩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내린 컵이 우렁차게 깨지는 소리를 냈다.

"아, 아빠라고?"

그들은 내가 자신들에게 마침내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에 감동받은 것 같았다.

실제로 이전의 나는 그들이 죽는 순간까지 두 사람을 엄마, 아빠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 나는 마치 다른 세상의 것 같은 이 커다란 집과 이 집의 사람들에게 다소 주눅이 들어 있었다.

또한 내 주제를 잊고 눈치 없이 굴 수 있을 만큼 나를 향한 삼 형제의 압박이 허술하지도 않았다.

"세상에, 하리야!"

나는 에른스트 부부의 품에 안긴 채 그들의 뒤로 보이는 세 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경악에 젖어 있는 얼굴들이 꽤 봐줄 만했다.

흥. 나는 남몰래 썩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깰 꿈이 아니라면 이제는 남 눈치 안 보고 나도 내 마음대로 살 거야!

그렇게 나는 삐뚤어지기로 결심했다.

4. 이제부터 전쟁이야!

"어머, 하리야! 정말 예쁘다!"

에른스트 부인은 거울 앞에 선 나를 보며 소녀처럼 좋아했다.

나는 열렬한 환호에 대한 보답으로 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아 보이기까지 했다.

"어쩜! 우리 딸은 뭘 입어도 전부 다 예쁘고 사랑스럽기도 하지!"

에헷, 제가 좀······ 이 아니라. 크흑. 어릴 때의 나는 내가 봐도 또래에 비해 키도 작고 너무 말라서 볼품없는데 이런 칭찬이라니.

저 못된 삼 형제의 엄마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천사 같으십니다!

"난 전부 마음에 드는데 넌 어떠니, 하리야?"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마치 공주님의 드레스 같았다. 프릴이 잔뜩 달린 하얀 원피스에, 등 뒤로 묶인 노란 리본이 한껏 부풀려져 깜찍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음. 옷이 날개라더니, 이렇게 입으니 확실히 내가 조금 더 귀여워 보이는 것 같기는 하다.

지금은 이렇게 발육이 좋지 않아 없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지만 나도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미인 소리를 제법 듣곤 했었다.

윽. 갑자기 또 좀 아쉬워진다. 내가 몸매 관리, 외모 관리를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었는데!

그런데 이런 가진 것 없는 조그만 어린애로 다시 돌아와 있다니! 으아앙, 나 돌아갈래!

"응? 혹시 마음에 안 드니?"

앗. 그게 아니라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했더니.

"아니요. 저도 좋아요."

오늘은 에른스트 부인이 내게 새 옷을 사 주겠다며 의상실의 사람을 저택 안으로 부른 참이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옷들을 보면 유명 의상실의 아동복이란 아동복은 전부 다 쓸어온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오늘 점심 식사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십 벌의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며 인형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럼 전부 사자!"

에른스트 부인이 손뼉을 짝 치며 활짝 웃었다.

그렇게 많은 옷은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녀의 밝은 얼굴을 보며 그냥 덩달아 웃어버렸다.

"멜리사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건 오랜만에 보는구나."

에른스트 부인은 내 옷을 다 고른 뒤 의상실에서 나온 사람과 함께 옆에 있는 방으로 장소를 옮겨 갔다.

이번에는 겨울 코트의 안감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덧 내 옆에 다가온 에른스트 공작이 막 방을 빠져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다. 네 덕분이야."

확실히 에른스트 부인의 낯빛이 환해진 것은 내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른 후부터였다.

나는 약간 머쓱했지만 그런 마음을 숨기고 에른스트 공작에게 말했다.

"엄마가 웃으면 나도 기쁜걸요."

"하리야."

내 말에 에른스트 공작의 눈망울이 금세 울먹울먹해졌다.

아, 이 아저씨. 내가 어릴 때에는 미처 몰랐는데 그는 무척이나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고작 이런 일로 눈물을 다 글썽이고 말이지.

게다가 지금 아저씨 나이가 20년 후의 유진의 나이와 비슷해서 그런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유진과 똑같이 닮은 얼굴로 이렇게 울먹이는 걸 보려니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말하렴. 아빠가 전부 다 사 주마."

거기다 팔불출이기까지!

아저씨. 고마운 말씀이긴 한데 애 교육상 안 좋다구요, 그거?

"하나도 안 예뻐!"

바로 그때, 문가에서 우렁찬 외침이 고막을 찔러왔다.

드디어 왔구먼.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예뻐, 안 예뻐! 하나도! 안 예뻐!"

열린 문 앞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은 채 소리치고 있는 것은 둘째 카벨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걸 입는다고 네가 아리나가 될 수 있을 줄 알아? 웃기지 마!"

"카벨!"

내 옆에 있던 에른스트 공작이 둘째를 향해 외쳤다. 그에 카벨은 잠깐 주춤했으나 곧 그의 옆에 서 있는 나를 향해 다시금 눈을 부라리기 시작했다.

에른스트 공작이 있는 앞에서 굳이 나를 찾아와 행패를 부릴 줄은 몰랐으나 사실 카벨의 이런 행동은 내 예측 범위 내에 있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세 형제의 앞에서 에른스트 부부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그들을 자극해 버렸으니까.

에른스트 공작은 카벨의 행태가 용납이 안 되는 듯 얼굴을 굳힌 채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행동하는 것이 좀 더 빨랐다.

"아빠."

나는 에른스트 공작의 소맷자락을 손으로 살짝 잡아당기며 작게 속삭였다.

"저 괜찮아요."

그를 향해 아련하게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빠가 한 말이 다 사실인걸."

이럴 때는 이 불쌍해 보이는 외모도 도움이 되었다. 약간만 풀이 죽은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나는 더없이 처량해 보였으니까.

"하리야! 그게 무슨 소리니, 전혀 그렇지 않단다!"

예상대로 에른스트 공작은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내가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보여 양심이 찔리긴 했으나, 얼마 전 나는 삐뚤어지기로 결심한 바 있지 않던가?

"카벨! 이리 와라. 아무래도 혼이 나야겠구나."

그러니 이 꿈속에서나마 저 화상들을 물 먹일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족했다.

"이잇! 우리 아빠야! 네 마음대로 아빠라고 부르지 마!"

아이고, 유치해라. 뭐, 저 나잇대 애들 마음이 아예 짐작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동안 나도 너한테 당한 게 있어서 그런지 별로 불쌍하진 않은걸.

결국 난동을 부리던 둘째는 에른스트 공작에게 덥석 들려서 둘만의 깊은 대화를 나누러 사라졌다.

그 후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방을 나섰다.

탁! 쿠당탕!

그런데 복도로 나서자마자 누군가 내게 발을 걸었다. 나는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한 채 바닥에 철퍼덕 엎어져 버렸다.

"너 진짜 짜증 나."

이번에는 셋째였다. 에리히는 둘째인 카벨과 달리 속에 맺힌 분노를 조용히 표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푸른 눈동자에 어린 감정은 카벨의 것보다 좀 더 날카로웠다.

"우리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어디론가 가버려!"

쓰읍. 나는 바닥에 찧은 무릎이 아파서 잠깐 얼굴을 찡그리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굳이 찾아와서 이런 유치한 짓만 안 해도 지금의 반의반은 서로 덜 보고 살 수 있거든."

파지직!

허공에서 마주친 셋째 놈과 내 눈동자 사이에 불길이 번쩍거렸다.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난 이제 예전의 내가 아니야! 더 이상은 바보같이 당하고만 살지 않을 거라고!

"못생긴 게."

"무식한 게."

다시 한번 에리히와 나 사이에 불길이 일었다.

"무슨 일이니?"

바로 그때 옆방에 있던 에른스트 부인이 문틈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순간 에리히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어렸다. 딱히 고자질할 생각은 없지만 뭔가 괘씸하니 겁이나 줘 볼까?

"엄······."

"하리가 발을 접질려서 넘어졌어요."

하지만 어느새인가 나타난 유진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조심해야지. 자, 내 손 잡고 일어나."

나는 내 앞에 내민 손을 보며 잠깐 침묵했다.

에른스트 부인이 보고 있어서 그런지 그는 또다시 착한 오빠를 연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에른스트 부인을 등진 유진의 얼굴은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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