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그 오빠들을 조심해 4화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그때처럼 한 시간 반 동안 눈에 파묻혀 있으면 다시 20년 후의 나로 돌아가 있었을지도.
제길, 앞으로 한 시간만 더 버텼으면 되었는데.
내 불량한 태도에 유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누가 너 같은 걸 위해서 이따위 귀찮은 짓을 한 줄 알아? 에른스트에서 송장이 실려 나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을 뿐이야."
아이고, 물론 그러시겠죠. 예전부터 당신한테는 에른스트와 가족들이 전부였으니까.
나는 속으로 비꼬듯 그렇게 생각한 뒤 엉덩이를 끌고 벽난로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죽으려고 그 꼴로 밖에 나간 줄 알았더니, 아직 살고 싶긴 한가 봐?"
내가 불을 쬐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비꼬았다.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유진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생소하다.
나는 담요를 뒤집어쓴 채로 유진을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그가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와, 반응이 제법 신선하네. 지금처럼 이렇게 내게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유진의 모습을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긴. 유진이 재미없는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한 건 에른스트 부부가 죽은 직후부터이던가.
나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유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다음 차례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유진의 뒤쪽으로 놓인 전신 거울이었다. 나는 그 안에 비친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담요를 머리끝에서부터 뒤집어쓴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
붉은 담요 아래로 드러난 머리카락은 창백할 정도로 하얀 은발이었다.
에른스트 부부가 내게서 죽은 그들의 딸 아리나를 투영시킨 이유도 아마 이 은발 때문이었을 터였다.
에른스트 부인과 그녀를 닮은 에리히 역시도 나와 같은 머리 색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만 내 눈동자 색만큼은 그들과 같은 벽안이 아닌 진한 보라색이라는 것이 큰 차이점이었다.
내 얼굴이 아리나 에른스트와 그렇게 많이 닮았던 걸까? 사실 나는 그녀를 초상화 속에서밖에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 밝게 웃고 있던 천사 같은 여자아이와 피죽도 못 먹은 듯 볼품없이 말라빠진 내가 닮았다고는 빈말로도 말하기 어려웠다.
"배고파."
문득 내가 이곳에 온 후로 밥을 제대로 먹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에른스트 부부의 간곡한 부탁으로 겨우겨우 조금씩 식사를 하긴 했지만, 그들이 자리를 비운 오늘 아침부터는 그나마도 없어 완전히 굶고 있었다.
"나 밥 줘."
"하?"
내 당당한 요구에 유진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나한테 네가 먹을 밥을 가져오라고 시키는 거야? 돌았어?"
"콜록콜록! 아아, 아직 아픈 게 낫지도 않았는데 또 밖에 나가서 그런가. 눈앞이 막 핑글핑글거려······."
들으란 듯이 읊조린 내 혼잣말에 그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양심이 있다면 가책 좀 느껴 보라지. 솔직히 너희가 그동안 날 얼마나 괴롭혀 댔니? 이번에도 난 당신의 그 잘난 동생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고작 밥 한 번 챙겨 준다고 어디가 덧나?
"오빠."
나는 불쌍한 척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배고파."
유진은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보름 전 눈 속에서 그가 나를 발견했을 때 지었던 표정과 비슷했다.
"하,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결국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자신이 왜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눈빛이었다.
엇, 그래도 아직 어려서 그런가. 생각보다 진입 장벽이 낮은걸?
에리히의 잘못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기라도 한지, 유진은 잠시 후 쟁반 위에 따끈한 수프를 얹어서 나한테 들고 왔다.
"앗, 뜨거!"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 수프를 보고 반색하며 그것을 떠먹다가 혀를 델 뻔했다.
"물······."
"닥쳐."
에잇, 역시 두 번은 안 되나 보다. 치사한 놈. 한 번이나 두 번이나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수프를 후후 불어 먹었다. 내 앞에 있는 접시가 빈 접시가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배가 덜 차서 입맛을 다시고 있다가 슬쩍 유진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표정이 구린 걸 보니 역시 수프를 좀 더 가져다 달라고 말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저녁때쯤에는 에른스트 부부가 돌아올 테니 그때 저녁밥이나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접시를 밀치고 그대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타닥. 타닥.
벽난로 안에서 타들어 가는 불길이 눈앞에서 일렁일렁 춤을 추며 흔들렸다.
아, 배가 어느 정도 차서 그런지 그래도 마음에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꿈속에서도 때가 되면 잠이 오고 배가 고픈 건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나한테 뭐라고 한 소리 할 줄 알았던 유진도 어째서인지 조용해서 방 안에는 고요한 정적이 가득 들어차게 되었다.
타닥. 타닥.
"돌아가고 싶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만 것은 날아다니는 불티를 멍하니 바라보던 어느 순간이었다.
아아, 돌아가고 싶다! 자유를 코앞에 두고 있던 27살 때로! 내 결혼! 내 웨딩드레스! 어흐흑.
그렇게 내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한동안 조용하던 유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너······."
"야!"
벌컥!
누군가 정적을 깨고 방 안으로 들이닥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오, 또 너냐.
저 본데없는 호칭과 우렁찬 목소리를 들으니 보나 마나 둘째인 카벨이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냥 담요를 둘둘 만 채로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난 지금 자는 거다! 나는 지금 의식이 없다! 그런 고로 지금 저 둘째 놈이 날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은 거다!
"뭐야, 쟤 자?"
"카벨, 문을 열기 전에는 노크를 해."
"에이, 형.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는 개뿔! 여긴 내 방이라고! 허락을 받으려면 유진이 아니라 나한테 받아!
"그런데 얘 왜 이렇게 궁상맞게 자?"
둘째 놈은 별것 아닌 말로도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저게 딱히 악의가 있어서 내뱉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야야, 일어나!"
그만 흔들어대라, 이놈아!
나는 가까이 다가와서 내 몸을 사정없이 흔들어 대는 카벨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야, 빨리 일어나! 나랑 술래잡기하자!"
"카벨. 차라리 방에 가서 책을 읽어."
"하지만 책은 재미없는걸."
"그럼 에리히랑 놀아. 수준에 맞는 사람하고 어울려야지."
두 놈이 나를 놓고 자기들끼리 떠들어 대는 걸 들으니 서서히 부아가 치밀었다.
뭐, 같이 놀자고? 둘째 카벨은 어릴 때부터 검술의 신동으로 불리며 괴물 같은 체력을 자랑하는 놈이었다.
그래서 녀석과의 놀이는 언제나 내가 초주검이 되는 것으로 끝맺어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직 아픈 게 다 낫지도 않은 나를 끌고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게다가 유진도 유진이었다. 자기들하고 내가 격이 안 맞아서 같이 어울려 봤자 좋을 것도 없다는 소리를 저렇게 우아한 척하면서 말하다니.
크으. 오히려 지금 내 눈으로 봤을 때 나보다 수준 떨어지는 건 너희들이라고! 억울하다! 원통하다!
"에리히는 책보다 더 재미없어. 야! 일어나라니까!"
카벨은 또다시 나를 짤짤짤 흔들어 댔다.
내가 계속 자는 척을 하니 어째 강도가 점점 더 세지는 것 같다. 내가 진짜 잠든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는 유진이 뒤에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 그런데 잠깐만. 잠깐 그만 좀 흔들어 봐. 방금 전에 밥을 먹어서 그런지 네가 갑자기 막 흔들어대니까 속이······.
"일어나!"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담요를 뻥 걷어차며 일어났다.
"어, 일어났다!"
그래! 일어났다, 이놈아!
"지금부터 뭐 하고 놀······."
놀기는 뭘 놀아. 나는 눈을 뜬 나를 보며 반색하는 둘째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우웩!"
"으아악!"
"카벨!"
어흑. 그러게 이건 다 너희가 자초한 거라니까······.
***
"네. 네,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한바탕 속을 비워 낸 직후부터 다시 열이 올랐다.
카벨은 내 행태에 충격을 받은 듯이 멍하게 있다가 곧 하녀의 도움을 받아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으러 비척비척 방을 나섰다.
방을 치운 것은 다른 하녀였고, 그동안 유진은 잠깐 내 이마를 짚어 보더니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의사를 불렀다.
"아니요. 묽은 수프를 조금. 빈속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건 하리한테 무리일 것 같아서요."
아니, 꿈이면 꿈답게 좀 행복하고 기분 좋은 내용이면 안 되나? 왜 매일 아프기만 한 것 같지.
"그럼요. 잘 보살피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하리 옆에는 제가 있을게요."
슬쩍 고개를 돌려 보니 통신석을 통해 에른스트 부부와 연락 중인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오, 저거 비싼 건데. 물론 내가 최근에 본 것보다는 구식이지만.
아마도 지난번 사건 이후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연락하라는 의미에서 에른스트 부부가 유진에게 통신석을 주고 간 모양이다.
"하리는 지금 자고 있어요."
유진이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힐끔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괜찮아요, 어머니. 하리도 쉬어야죠. 아니, 그건 아니고요. 열은 이제 거의 내렸으니 푹 자면 금방 나을 거예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 제가 있잖아요."
너 방금 나랑 눈 마주쳤잖아! 안 자는 거 뻔히 알면서 거짓말은? 그렇게 네 엄마랑 내가 얘기하는 게 싫으니?
게다가 가증스럽게 내가 걱정되는 척, 착한 오빠인 척하는 것 좀 봐. 그러고 보니 어릴 때의 유진은 내숭과였지!
"부모님이 오시기 전까지 꼼짝 말고 누워 있어."
역시나 통신석의 사용을 종료하자마자 유진이 서늘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 부모님과 이야기하던 목소리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큰 냉정한 음성이었다.
"혀어엉."
바로 그때, 카벨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씻기까지 했는지 비누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리히랑 놀라고 했잖아."
카벨은 내 토사물을 뒤집어쓴 일에 어지간히 큰 충격을 받은 듯이 제 형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달라붙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둘째에게 심적 타격을 입혔다는 생각에 약간 속이 후련했다. 하지만 그런 만족감은 두 형제의 모습을 보는 동안 점차 싸늘히 식어갔다.
"곧 어머니, 아버지가 오실 거야. 그러니까 혼나지 않게 방에 가서 얌전히 있어."
"그럼 쟤랑 언제 놀 수 있는데?"
"다 나을 때까지 며칠만 참아."
유진이 부루퉁한 카벨을 달래며 말했다. 나는 그의 손이 카벨의 갈색 머리카락을 어르듯 쓰다듬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유진은 자신의 동생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자상한 형이었다. 방금 전 나를 상대할 때와 달리 카벨을 달래는 유진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타악.
카벨이 방을 나서고 난 뒤 유진은 문을 닫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 채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뭐, 너희들?"
전에 없던 내 호칭에 유진이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뒤돌아 나를 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어지는 내 물음에 곧 입을 다물었다.
"내가 그렇게 싫어?"
사실 내가 그런 걸 묻고 싶었던 건 나이가 든 그들이었다. 사는 동안 줄곧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으나 결국은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