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그 오빠들을 조심해 3화
"어머니!"
하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던 유진이 별안간 깜짝 놀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 세상에! 하리, 괜찮니?"
그런 그를 무시한 채로 누군가 애벌레가 되어 있는 내게 부리나케 달려왔다.
가장 처음 내 얼굴에 따뜻한 손길이 닿고, 그다음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눈물을 머금은 벽안. 우아하게 틀어 올린, 그러나 바삐 뛰어온 듯 약간 헝클어져 있는 은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그 다정한 표정과 손길까지.
"우리 아가, 엄마가 왔단다. 이제 괜찮아. 다 괜찮으니 아무것도 걱정 말렴."
아, 그녀였다.
단 일 년. 그 짧디짧은 시간 동안만 나의 어머니로 살다 간, 죽은 에른스트 공작 부인.
이것이 꿈인 걸 알면서도 나는 바보처럼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내 얼굴을 쉴 새 없이 어르듯 쓰다듬던 그녀가 잠시 후 고개를 돌리며 매섭게 소리쳤다.
"너희들! 우리가 없는 동안 도대체 뭘 한 거니!"
"부인! 의사가 윈스턴 다리를 지나는 참이라 하오!"
"아직도요? 세라! 마리! 아니, 이 아이들은 왜 이렇게 느린 거야. 제가 가 봐야지, 안 되겠어요. 하리를 침대로 옮겨 주세요."
에른스트 부인은 그렇게 말한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그다음 내게 다가온 것은 마찬가지로 단 일 년 동안만 내 아버지였던 에른스트 공작이었다.
"얘야, 괜찮니? 금방 침대로 옮겨 주마."
갈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도 그렇지만 이렇게 보니 이목구비 자체가 첫째인 유진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다만 그의 사후 공작의 자리를 이어받아 장성한 유진은 제 아버지보다 훨씬 냉혹한 분위기를 흩뿌리고 있던 것만이 달랐다.
곧 그가 내 몸을 돌돌 말고 있는 카펫째로 나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나는 좀 더 가까이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유진, 카벨과 에리히는?"
"집사와 하녀에게 가 보라고 시켰는데······."
"오늘 있던 일은 차차 물으마. 거짓을 답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아, 그래. 이런 엄격한 얼굴을 하니 유진과 똑 닮았어.
"예, 아버지. 죄송합니다."
에른스트 공작에게 안긴 상태여서 그런지 앞에 있는 유진의 얼굴이 훤히 보였다.
그는 아버지의 말에 침중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짧게 대답했다.
"하리, 불편해도 조금만 참으렴. 방에도 벽난로를 때 놨으니 딱딱한 바닥보다는 침대가 나을 거란다."
에른스트 공작이 방금 전 아들을 대하던 것과 사뭇 다른 자상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가 이따금 저택 벽에 걸린 초상화로만 보아 왔던 사람이 지금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저씨."
"그래, 하리야."
에른스트 공작은 뭐든 다 말해보라는 듯이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무척이나 다정하고 따스했다.
"아저씨는······."
그래서 나는 장장 20년 동안이나 가슴에 품어 두고 있던 말을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일 수 있었다.
"나한테 똥을 줬어."
그것도 저 세 진상이라는 아주아주 빅 똥을!
"하, 하리······ 하리야?"
당연한 소리지만 내 말을 미처 예상치 못한 아저씨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아무래도 우리 딸이 많이 아픈 모양······."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아련히 미소 지었다.
훗······. 20년간 묵혀 뒀던 말을 드디어 했으니 더 이상 후회는 없다!
털썩!
"하리야!"
내 목이 힘없이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에른스트 공작이 내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처절하게 소리 질렀다.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끝으로 서서히 의식을 놓아버렸다.
······그런데 이 꿈은 도대체 언제 끝난답니까?
3. 아무래도 현실 부정기를 겪고 있는 모양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나는 회한에 젖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리야, 이것 좀 먹어 보렴. 응?"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왜 아직도 내가 꿈속에 있는 거지?
내가 에리히의 심술에 놀아나 죽을 뻔했던 날로부터 어느덧 보름 정도가 지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이 꿈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도대체 왜?
"안 먹을래요."
"그러면 안 돼. 아플수록 더 잘 챙겨 먹어야지."
결국 셋째의 만행은 고의가 아닌 실수였던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집사를 방에 가둔 뒤 내게 장난을 칠 생각이기는 했으나 그것을 먼저 알아챈 내가 에리히를 피해 밖으로 도망갔다가 그만 미끄러져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 대략적인 각본의 내용이었다.
나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이미 예전에 한 번 겪어 본 적이 있던 일이라 그런지 그렇게까지 분하고 억울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유진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겠지. 철없는 어린 동생이 저지른 실수이니 그의 입장에서는 감싸주고 싶기도 했을 거다.
"자, 한 입만 더 먹자."
며칠 내내 내 간호를 하느라 진이 빠진 에른스트 공작 부인까지 결국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기 때문에 오늘은 에른스트 공작이 나를 보살피고 있었다.
물론 하녀를 시키면 될 일이나 그는 직접 내게 죽을 떠먹이는 번거로운 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세 아들을 훈육할 때 빼고는 참으로 가정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나는 영혼 없는 눈빛으로 그가 내민 은수저를 슥 쳐다보았다.
"원래 결혼식 전날에는 굶는 거랬어요. 드레스가 안 맞으면 어떡해."
"우리 하리, 결혼식 놀이가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마침 신랑 역을 할 남자애만 이 집에 셋이니 아무나 네가 골라 보렴."
그게 아니야!
나는 나도 모르게 식판을 들어 엎을 뻔했다.
그게 아니라 나는 정말 새신부가 될 예정이었단 말이야! 바로 내일이면 드디어 이 빌어먹을 집구석에서 해방될 수 있었는데!
저 망할 놈들도 두 번 다시는 안 봐도 되고!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런 성스러운 날에 이따위 꿈이나 또 꾸고 있어야 하냐고요! 으어어엉!
"으흑. 아저씨, 미워어어어."
"하, 하리야?"
아저씨는 나한테 똥을 줬어! 왜 저런 똥 덩어리들을 셋이나 낳아서는, 날 이렇게 괴롭게 해요? 으아앙!
"그, 그래. 많이 피곤한가 보구나. 그만 쉬거라."
영문도 모른 채 내게 미움받게 된 아저씨는 핼쑥해진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나는 처음 이 집에 오고 나서부터 그들에게 줄곧 얌전하고 착한 아이였으니까.
심지어 이번 사건 때도 세 형제의 거짓말에 결국은 같이 동조해 주고 말았을 정도로 바보 같은 아이였지.
하기야, 바보 같기는 그 전부터도 그랬다. 집도 주고 밥도 준다는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가서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집에 기어들어 왔으니.
나는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또다시 넋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휘이잉.
보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저 눈보라 속에 있었단 말이지. 이건 분명 꿈일 텐데 왜 이렇게 모든 게 생생하지? 내 결혼식은? 내 자유는?
"에잇!"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손을 들어 내 얼굴을 찰싹찰싹 내려쳤다.
"아파."
하지만 뺨만 아플 뿐 잠에서 깨어날 낌새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 손.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방금 전 얼굴을 때렸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아. 작다고!
27살인 내 손은 이렇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손이 작아진 거야! 손만 그런 게 아니야! 손도 발도 키도 죄다 작게 줄어들었어!
아무래도 내 몸은 셋째의 장난질에 죽을 뻔했던 7살 때로 돌아간 듯싶었다. 하긴. 이건 꿈이니까 그럴 수도 있긴 하지.
"왜 말 안 했어?"
그런데 바로 그때 문가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엄마 아빠한테 사실대로 말 안 했어?"
나를 죽일 뻔한 장본인인 에리히였다.
그는 내가 왜 자신들의 진술이 거짓말이라고 에른스트 부부에게 밝히지 않았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창문에서 시선을 돌려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7살의 어린 소년은 문고리를 잡고 선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형에게 두려움을 호소했던 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정 없는 얼굴이었다.
글쎄. 예전에는 왜 사실을 밝히지 않았는지 몰라도 이번에는.
"기억이 안 나서 모른다고 말했을 뿐이야."
눈을 뜨자마자 눈보라 속이었는데 그전에 네가 날 쫓아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니?
아무리 이게 내 기억 속의 일을 다시 꿈으로 꾸는 거라고 해도, 워낙 어릴 때 일이라 그런지 그때의 상황이 자세히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냥 이번 일의 범인이 셋째란 것만 명확할 뿐.
하지만 모처럼 에리히가 가엾게 덜덜 떠는 목소리도 들은 데다 또 어차피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하니 다 귀찮아져서 그냥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런데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에리히가 입술을 깨물며 나를 노려보았다.
"이걸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이기긴 뭘 이겨.
"난 너한테 내가 한 짓을 숨겨 달라고 부탁한 적 없으니까!"
아, 지금 나한테 빚진 기분이어서 이러는 건가?
어린 에리히는 유리처럼 그대로 속이 다 비쳐 보여서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아니면 내가 27살의 눈으로 어린 셋째 녀석을 봐서 그런가?
"더 할 말 없으면 나가 줘."
아무튼. 귀찮다, 너.
나는 에리히를 향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한 뒤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자 에리히는 약간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하긴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내 눈빛을 보았다면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난 지금 무기력증에 빠져 있어서 그를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내 웨딩드레스 엄청 예뻤는데······."
내가 음산히 중얼거리는 말에 문가에서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 바 아니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퀸 아라벨라 의상실에서 진짜 어렵게 맞춘 드레스였는데······."
하. 눈을 감아도 진상, 눈을 떠도 진상이라니.
혹시 모르니까 다시 한번 때려볼까.
찰싹찰싹!
나는 다시 손을 들어 내 뺨을 찰싹찰싹 내려쳤다.
에이, 소용없네. 퉤퉤.
"아, 아빠아!"
쾅!
다음 순간 어째서인지 에리히가 에른스트 공작을 부르며 방을 뛰쳐나갔다.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이불을 몸에 돌돌 휘감은 뒤 다시금 잠을 청했다.
이번에야말로 내 결혼식 당일 눈을 뜨기를 바라면서.
***
"너 진짜 미쳤어?"
하지만 헛된 기대였다. 나는 여전히 7살이었고, 지금은 첫째 까칠이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게. 난 미친 걸까?"
나는 에른스트 부부가 잠시 저택을 비운 틈을 타 다시 눈이 쏟아지는 밖으로 나왔다가 유진에게 걸려 다시 실내로 끌려 들어온 참이었다.
이를 딱딱 부딪치며 벽난로 앞에 담요를 두르고 있으려니 유진이 그런 나를 돌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기야 그로서는 내 기행이 이해되지 않을 만도 했다. 얼어 죽을 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그때처럼 얇은 실내복 차림으로 문을 나섰으니.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는걸! 난 그냥 처음 눈을 떴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면 이 꿈에서 깰 수 있을까 싶었을 뿐이야!
"네가 미쳤든 안 미쳤든 상관없으니까 성가시게 굴지 마. 네가 그런다고 누가 관심이나 가져줄 줄 알아?"
유진은 내가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지 까칠하게도 말했다.
"그럼 그냥 내버려 두면 되지, 왜 쓸데없이 날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는데?"
"쓸데없······."
오는 말이 곱지 않은데 가는 말이 고울 리 없었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한 유진에게 약간 짜증이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