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그 오빠들을 조심해 2화
지금의 유진은 마치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같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 보여도 유진은 유진인지 눈을 털어 내는 손길이 제법 맏이다웠다.
그것은 유진이 어린 동생들을 보살핀 경력이 많았기 때문으로, 물론 그의 다정한 손길이 먼저 나에게 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리에 앉은 눈을 털다가 우연히 뺨을 스친 그의 손은 따뜻했다.
나는 그 온기를 쫓아서 나도 모르게 첫째의 손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그러자 그가 손을 내 뺨에 댄 채로 돌처럼 굳어져 버리는가 싶었다.
20년간의 노력 끝에 유진이 내가 잡은 손을 먼저 매몰차게 뿌리치지 않을 정도로까지 길들였던 보람이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린다거나 하는 간 큰 짓을 저지른 적은 없었지만. 하지만 뭐 어때. 어차피 이건 꿈이고, 난 지금 엄청나게 추운걸.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유진은 분명 10대 초반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왜 그의 손이 내 얼굴의 반은 가릴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느껴지는 거지?
그냥 기분 탓인가?
하지만 그런 의문은 곧 온몸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에 떠밀려 날아가 버렸다.
"오빠, 나 추워."
작게 달싹인 내 입술에서 야트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쩐지 머리가 몽롱했다. 꿈치고는 참으로 지독한 꿈이었다.
"하리!"
나는 급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첫째를 뒤로한 채로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런데 뺨 좀 살살 쳐라. 아프다, 이놈아······.
***
내가 에른스트의 세 악마를 처음 만난 것은 엄마가 죽은 다음 해의 늦봄이었다.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니?"
거리에서 만난 부유해 보이는 부부는 그들에게 내민 꽃 대신 뼈가 앙상한 내 손을 붙잡고 그렇게 물었다.
그 무렵 나는 유일한 보호자이던 엄마를 폐렴으로 잃고 거리에서 꽃을 팔아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부부는 며칠 전 우연히 거리를 지나다가 나를 발견한 직후 몇 번이나 더 이곳을 찾아왔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자신들의 죽은 딸과 닮아 도저히 이대로 두고 갈 수는 없을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이 바로 아를란타에서 황실의 검으로 위세 높던 에른스트 가문의 공작 부부였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손을 붙잡고 멜팅턴의 거리를 떠났다.
마차를 타고 사흘을 달려 드디어 도착한 곳은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거대하고 예쁜 집이었다.
공주님이 사는 궁궐이 이럴까 생각하며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두 사람을 따라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이 즐비한 복도를 걸었다.
복도의 끝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문 안에 숨어 있던 것은 에른스트의 천사들이었다.
아니.
'천사들이었다'고 그 당시의 순진하고 바보 같던 나는 생각했다.
"다녀왔다, 얘들아."
"엄마!"
세 명의 남자아이 중 비교적 어린 축에 속하는 두 아이가 함께 놀고 있던 금색 털의 강아지를 뒤로한 채 달려왔다.
그들은 에른스트의 귀부인에게 매달려 한껏 어리광을 피웠다.
그중 한 명은 갈색 머리카락에 벽안을 지닌 장난기 많아 보이는 남자애였고, 좀 더 어려 보이는 아이는 은발과 벽안을 지닌, 에른스트의 귀부인과 똑 닮은 가녀린 외모를 한 예쁘장한 남자애였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아이는 에른스트 공작의 것을 그대로 빼 박은 갈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카펫 위에서 허물없이 뒹굴던 동생들과 달리 소파에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당시의 나보다 나이가 많긴 했지만,
그래도 10대 초반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가 시종일관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리 기별해 주셨으면 저희가 내려갔을 텐데요."
"후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조용히 들어왔지."
그들의 모습은 어디로 보아도 단란한 가족의 것이라 나는 약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곧 나를 향하는 에른스트 부인의 웃는 얼굴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불안과 약간의 기대가 뒤섞인 감정이었다.
"자, 인사하렴."
그녀가 나를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세 쌍의 눈동자도 나를 향했다. 그 눈빛에 내가 움츠러들자 옆에 있던 에른스트 공작이 내 등을 살짝 앞으로 밀었다.
"이 애는 누구죠?"
"맞아. 이 거지 같은 애는 누구야?"
"카벨!"
"아니, 삐쩍 말라서 밥도 못 먹은 애 같길래······."
아까부터 내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던 남자애가 에른스트 부인의 호통에 어물어물 변명했다.
나는 검은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내 어두운 미래를 그때부터 예측해야만 했다.
"쉬잇. 페니. 착하지. 저건 먹는 거 아니야. 지지야, 지지."
아니면 셋 중 막내로 보이는 은발의 남자애가 그 후 나를 보고 으르렁거리는 강아지에게 속삭인 말에서라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어야만 했다.
"이제부터 너희들의 동생이 될 거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티 한 점 없이 순수한 천사 같던 아이들에게 악마가 깃든 것은.
"첫째가 유진, 둘째가 카벨, 셋째가 에리히란다. 그리고 이 아이의 이름은 하리."
주위의 온도가 순식간에 급감하기라도 한 것처럼 공연히 어깨가 으슬으슬했다. 적개심 어린 세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쏘아보았다.
"자, 모두 사이좋게 지내렴. 오늘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댕댕.
머릿속에서 장엄한 종이 울렸다.
바야흐로 잔혹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
"허억! 형! 쓰레기 왜 그래?"
으악, 고막 나가겠다. 누가 귀에 대고 이렇게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는 거야?
"서, 설마 죽은 거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완전 눈사람 됐잖아! 정말 안 죽은 거 맞아? 숨 쉬어? 헉! 손도 엄청 차가워!"
어······. 그런데 이상하다. 이 시끄러운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깊은 의문을 품기도 전에 철썩철썩 또 누가 내 뺨을 때려댔다.
"야! 너 죽으면 안 돼! 빨리 눈 떠 봐!"
"카벨, 그만하고 집사한테 의사 좀 불러오라고 해. 가는 길에 하녀가 있으면 두꺼운 이불하고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고 하고."
"아, 알았어!"
"그리고 에리히는······ 에리히! 숨어 있지 말고 이리 와! 벽난로에 장작이나 더 넣어!"
동생들에게 무언가를 차례차례 지시하는 유진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방금 전 보았던 앳된 얼굴이 담겼다.
"정신이 들어?"
그럼 나는 아직도 꿈을 꾸는 중인가 보군. 그렇다면 깨어날 때까지 좀 더 눈을 감고 있는 걸로······.
"눈 떠! 의식을 잃으면 안 돼! 하리!"
야이, 내 얼굴 좀 그만 때려! 당신, 지금 나한테 악감정 있는 거지? 그렇지?
"아파."
나는 겨우 입술을 떼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목이 꽉 잠겨서 소리를 내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말하는 대신 방금 전까지 내 뺨을 사정없이 찰싹찰싹 내려쳤던 유진을 찌릿 노려보았다.
그러자 유진이 약간 안심한 표정을 짓는가 싶었다.
"금방 의사가 올 거야. 밖에 오래 있어서 동상에 걸렸을지도 몰라. 지금도 손발이 많이 차니까 일단 불 좀 쬐고 있어. 에리히!"
다다다 급하게 말한 유진이 셋째인 에리히를 불렀다. 방금 전 말했다시피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으라고 시킬 셈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나 지금 유진의 외투를 덮고 있잖아?
"추워."
그래도 온몸에 한기가 돌아서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그러자 나를 내려다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유진이 이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다시금 바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잠깐, 잠깐! 아무리 그래도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그래도 양털이라 따뜻할 거야."
유진이 내 체온을 유지시킬 도구로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카펫이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 바닥에 깔렸던 카펫이 내 몸에 돌돌 휘감기는 것을 맥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짧은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카펫 밖으로 머리만 삐죽 튀어나온 롤 식빵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카벨! 아직도 멀었어?"
그는 나를 애벌레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놓고 또 문 쪽을 향해 소리 질렀다.
유진이 이렇게 침착하지 못하게 행동하는 건 거의 십몇 년 만에 처음 본 일이라 나는 새삼 감회가 남달라졌다.
"형. 내가······."
바로 그때 저 옆에서 기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들었다.
"내가 잘못한 거야?"
"에리히."
그 목소리는 잔뜩 겁먹은 어린 새처럼 떨리고 있었다.
아, 그래. 이제야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다.
지금 내가 꾸고 있는 꿈은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 내가 처음 죽을 뻔했던 때의 일인 것이 분명했다.
때는 눈보라가 혹독하게 휘몰아치던 한겨울로, 내가 에른스트에 입양된 지 약 반년이 지난 시점의 일이었다.
눈부신 은발과 새벽의 여린 빛 같은 투명한 벽안을 지닌 에리히는 어릴 때 그야말로 천사 같은 외양을 지닌 소년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그의 사악한 본성을 쉬이 놓치곤 했으나, 사실 에리히는 천사가 아닌 소악마였던 것이다!
흠. 크흠. 물론 이건 내 주관적인 평가였다. 어쨌든 그놈은 내게 있어서만큼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 같은 놈이었으니까.
에리히는 에른스트의 죽은 막내딸인 아리나와 쌍둥이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녀의 자리에 대신 들어온 나를 유독 심하게 경멸하고 증오했다.
그런 이유로 에리히는 내게 고약한 장난질을 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눈이 쏟아지는 한겨울에 실내복 한 장만 걸친 채 저택 밖으로 쫓겨나는 일을 당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날은 에른스트 공작 부부가 어떤 일로 저택을 비웠을 때였으니, 에리히가 나를 괴롭히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저지른 일인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단순 무식한 둘째 카벨과 달리 에리히는 제법 영악해서, 공작 부부가 없는 이 집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나를 도와줄 만한 사람인 집사까지 방에 가둬 놓고 다른 하녀와 하인들에게는 단단히 엄포를 놓았다.
그래서 나는 장장 한 시간 반 동안이나 눈보라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어야만 했다.
여느 때처럼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받던 유진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눈 속에서 동사했을지도 몰랐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완전히 숨길 수 없는 일인 걸 알고 있지? 이번에는 네 장난이 너무 심했어."
"형······."
그런데 그때도 저 사악한 셋째가 저렇게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오들오들 떨었던가?
저 셋째 소악마가 무서워서 덜덜 떠는 장면이라니. 세상에, 나도 좀 구경해 보자.
"카벨이 안 오는 걸 보니 다른 데로 샌 모양인데······. 네가 가서 데려와. 집사와 하녀가 뭘 하고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에잇, 에잇!
하지만 양털 카펫에 돌돌 말려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장면을 볼 수는 없었다.
나는 애벌레처럼 두어 번 제자리에서 꿈틀거리다가 힘에 부쳐서 금세 포기해 버렸다.
타닥. 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래도 벽난로 덕분인지 방금 전보다는 한결 따뜻해져서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집사가 수상함을 눈치채고 갇혀 있던 방 안에서 에른스트 부부에게 몰래 통신석으로 연락을 넣지 않았던가?
마력을 담은 통신석은 무척이나 고가였기 때문에 단 2회만 사용할 수 있는 비상 연락망이었지만 집사는 망설이지 않고 이날 그것을 사용해 버렸다.
크으, 역시 노련한 집사. 실제로 나는 이날 죽을 뻔했으니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은 셈이었다.
그래서 만약 이 꿈이 내 기억 속의 것과 동일하다면······.
"하리!"
슬슬 에른스트 부부가 저택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