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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22)화 (12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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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그 밤은 백성들에게서 ‘서북의 하얀 밤’이라 불렸다.

그 희고 기이한 밤 이후, 제국의 일 년은 더없이 소란했다.

참으로 기묘한 한 해였다.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에 민심이 요동쳤고, 그러다 터무니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용과 사람 사이의 터무니없는 혼사를 알리는 황제의 공표였다.

황제는 백룡을 두고 제국을 또 한 번 덮쳐 온 위험에서 구한 영웅이라 불렀다. 처음에 그 말은 민심을 뒤흔드는 흉흉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 여파가 세간을 미처 다 지배하기도 전에, 그보다 더 생생하고 난폭한 위협이 제국 각지를 덮쳤다.

오래전, ‘월’이라는 흑룡이 있어 백년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자로 인해 무수한 자들이 혼을 빼앗기고 꼭두각시가 되었다는 역사가 다시금 떠들썩하게 회자되었다.

아직도 이 제국에는 그 월을 섬기는 자들이 숨어 있어, 그자들이 월이 남긴 피로 사람을 사람이 아닌 것으로 만든다. 그자들이 그 피로 요마를 부려 다시금 전쟁을 꾀한다.

그것은 그저 전설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었다.

각지에서 반역에 앞장서듯 출몰하는 요마 떼들을 막아낸 것은 오래전 백년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하 씨 황가였다.

그리고 그들 외에도 한 존재가 더 있었다. 북왕과 혼인한다는 백룡, 사인의 군주인 여인이었다.

사람들은 ‘삼진’과 ‘삼강’, 그리고 더러는 ‘옥읍’에 대해서도 말했다. 삼진의 백성들이 한 차례 그 피에 홀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자들이 되었었다는 사실이 만인에게 퍼졌다.

죽어서도 제국을 위협하는 흑룡의 피와 달리, 백룡의 피는 그것을 멸하고 사람을 구했다. 사인이든 제국인이든 가리지 않고 구해냈다.

그리고 그 구원자는 직접 본 자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저 몸을 조아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신이한 위엄이 넘쳤다. 아름다움이라는 말만으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는 존귀함이었다.

반년이 흐르자 백룡 연의 이름은 차례로 지위를 달리하다 끝내 흑룡의 천적에 가까워졌다. 어둠이 검듯 어둠을 물리치는 빛은 희다.

백성들의 이해는 단순하고도 직관적이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흑룡이 일으킨 전쟁을 실제로 겪어본 자는 없었다. 백오십 년도 더 전에 일어난 전쟁 아닌가.

그러니 그들은 단시간에 용이 두려운 존재라는 두루뭉술한 편견을 집어던지고, 그저 요마와 괴상한 피의 위협에서 자신들을 구해주는 하얀 구원자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그녀를 직접 보면 이상하게도 존경심이 솟구쳐 눈물마저 터져 나온다는 말들이 퍼져 나갔다.

하여 일 년이 지나고 드디어 하신후와 연의 혼례 날이 정해졌을 무렵, 혼례는 더할 나위 없이 큰 규모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만백성이 그토록 신이한 기품을 한 몸에 두른 백룡을 먼발치에서나마 눈에 담고 싶은 열망에 휩싸인 탓이었다.

물론 용과 혼인하는 북왕 역시 절세의 미남자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북왕 하신후는 본래 섬뜩하고 흉포한 자로 유명한 사내였다. 한데 그것이 지난 일 년간 정반대로 변하고 말았다.

백룡과 함께 있는 그를 멀리서나마 본 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송한 탓이었다. 그는 황홀할 만큼 수려하고 자애로우며, 미소가 더없이 기품 있는 사내였다. 물론 개중에는 그리 말하며 뜻 모를 웃음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 길게 산 귀족께서도 정인에게는 조금 팔불출이신가 봐요.

무엄하게도 그런 말을 흘리는 자마저도 있었으나, 황실에서는 의외로 그런 소문마저 퍼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여 하신후와 연의 혼례를 기대하는 자들 중에는, 그리 냉엄하고 무섭다던 사내가 과연 정인 앞에서 어떻게 굴지 직접 보고 싶어 조바심내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소란 뒤에, 조용히 묻힌 소식도 한 가지 있었다.

황제 하을령이 웬 미동 하나를 곁에 가까이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병약한 소년으로 딱히 남들 눈에 많이 보이는 것조차 꺼려한다 했다. 열서너 살쯤 된 아이로 대신들조차 그 존재를 함구하는 황궁의 비밀이었다.

궁인들 사이에서 은밀히 퍼진 말로는, 그 아이가 이상하게도 현한을 조금 닮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처음에는 그런 말을 소근대던 궁인들도 어느 시점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그런 생각을 잊고 말았다. 마치 누군가 그들의 혼에 그런 명을 불어넣기라도 한 듯, 조용히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아주 잠시 퍼졌던, 황제가 황위를 북왕에게–, 심지어는 북왕만이 아니라 그 반려에게까지 넘기고 싶어 한다는 괴소문 역시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그처럼 어떤 일은 지나치게 떠들썩하고, 어떤 일은 지나치게 잠잠한 채로 순식간에 일 년이 흘렀다.

연은 다시금 일 년 전과 같은 계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도 다시금 이곳, 회운성에서.

이상한 일이었다.

연은 일 년 전, 그 ‘서북의 하얀 밤’을 돌이켜 볼 때마다, 예상 밖의 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건 하신후에 대한 이해였다.

그전까지 그의 곁에서 연은 종종 답답했었다. 그가 왜 자신이 한 일을 남에게 세세하게 알리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더 칭찬받아야 했다. 세상에 알려진 건 사실 반도 되지 않는다. 그는 그가 다스리는 자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도, 아주 가끔은 부담을 무릅쓰면서까지, 은혜를 베풀곤 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일의 진상을 굳이 알리려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둔자인가 싶었다가 나중에는 욕심이 없는 자인가 싶었다.

일 년이 흐른 지금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더는 높아질 자리가 없는 그에게 그런 일은 그저 불필요한 노동이었다. 칭송조차 귀찮아지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건 연의 자리이기도 했다.

‘서북의 하얀 밤’이라 불리는 그 밤은 사흘간 이어졌다. 연은 그동안 월과 권윤의 혼이 함께하는 자리에 있었다.

하얀 밤의 빛이 불러낸 기적을 찬양하는 백성 가운데 누구도, 그녀가 그 사흘 동안 무엇을 했는지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

연은 영생할 것이고, 이 땅의 누구보다도 약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자신이 다스리는 자들에게 베풀 은혜는 앞으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질 터였다.

그러니 연은 칭송조차 굳이 필요하지 않은 자리에 올라 있었다. 그 자리는 까딱하면 몹시 외로울 수 있을 만큼 높은 곳이었으나 연은 외롭지 않았다. 혼자가 아닌 덕분이었다.

물론 한 가지 문제가 있기는 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예상 밖으로 상당히 오랜 시간 연을 괴롭혔다.

“또 발목이 아파?”

마침 지금도 바로 그 문제가 말썽이었다. 연은 등 뒤에서 들려 온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했다. 몰래 발목을 주무르고 있었는데 벌써 눈치를 채고 온 모양이었다.

연은 멋쩍은 미소를 배시시 흘리며 그녀의 정인, 며칠 더 지나면 반려가 될 사내를 바라보았다.

“들켰네.”

하신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연에게 다가왔다. 굳은 표정이었음에도 변함없이 눈에 담기 즐거운 얼굴이었다. 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그가 몸을 굽혀 연의 발목에 손을 가져다 대고서야 표정을 바꾸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녀가 웅얼거렸으나 그는 들은 척하지 않았다. ‘서북의 하얀 밤’ 이후 연은 왼 발목과 왼 손목을 다쳤다. 손목은 그나마 금세 나아졌지만 발목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깊은 상흔이 남아, 아직도 이따금 통증을 느꼈다. 그것은 선대의 용인 월을 멸한 대가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죽었어야 하는 인간을 살려낸 대가일 수도 있었다.

하신후는 말없이 무릎을 꿇고 연의 발목을 주물렀다. 서늘한 손과 발목의 살갗 사이에서 금세 온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연이 어느 순간 통증에 움찔했다. 하신후가 흠칫하며 연의 안색을 살폈다. 연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혼례 전까지는 나아져야 할 텐데. 백성들 앞에서 절룩거리고 싶지 않아.”

최근 이 북단의 영지 근처에 큰 흉사가 있었다. 정확히는 큰 흉사가 될 징조였으나, 그것이 흉사가 되기 전에 연이 억눌렀다. 흉사의 징조를 억누르는 것은 이 땅이 부토와 같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요마의 땅이 되지 않도록 필요한 일이었다.

그 일을 하다가 아주 조금 지친 탓인 듯했다. 한동안 괜찮던 발목에 다시 통증이 찾아왔던 것이다.

연의 발목을 감싼 하신후의 손에서 서늘한 듯도 하고 따스한 듯도 한 기운이 전해져 왔다. 그 기운이 발목에 감돌자 통증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면 기운에 앞서, 우선 이 사내의 손길이 마음에 들어 그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연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부토 가운데 있는 용의 산, 그곳은 실상 조금만 멀리 나서도 요마를 마주하는 고립된 영토였다. 연은 자신도 지키기로 마음먹은 이 땅을 그곳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월을 섬기고 연을 거짓 속에서 길러낸 용의 산의 사람들. 그들은 백년 전쟁에 패배하고 이곳을 떠나며, 이곳에 무수한 사인 백성들을 남겨 놓은 자들이기도 하다.

언젠가 그들도 세대를 거듭해 옛 원한과 야심을 모두 잊고 나면, 연이 수호하는 이 땅으로 찾아올 수도 있을까.

그때가 되면 연은 그들을 온전히 용서하고 모든 미움과 분노를 잊은 채 다시금 그들마저도 백성으로 여기게 될까.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에게는, 그리고 그녀와 혼례 할 사내에게는 앞으로 기나긴 시간이 주어질 터였다. 연은 그것이 지금은 알 수 없는 것을 알아나가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길 바랐다.

“그렇게 만져 주는 것보다 더 쉽게 통증을 잊을 수 있는 방도가 떠올랐는데.”

연은 중얼거리며 하신후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내게 입을 맞춰 줘.”

그녀의 나직한 청에 내내 심기 불편한 듯 굳어 있던 그의 눈매가 쑥스러움으로 이지러졌다.

“-.”

찡그린 눈과 엷은 미소가 뒤섞인 얼굴로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연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입술에 온기가 닿자, 연의 예상대로 발목의 통증이 금세 잊혀졌다. 연은 만족스럽게 눈을 휘어 웃었다. 용의 마음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연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이런 즐거움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 같았다. 그러니 아무렴, 필요한 것은 시간뿐이었다. 길고 길며 찬연한, 용과 그 반려의 영생.

둘의 혼례 준비로 정신없는 자들의 원성마저도 들려오지 않는 닫힌 문에 회운성의 고요한 오후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희고 아름다운 오후였다.

<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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