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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21)화 (121/122)

121

기어이 그 말을 뱉으니 더 화가 치밀었다. 연은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기 시작하는 분노로 두 눈을 일그러뜨렸다. 하신후가 자신을 따돌리고 옥읍 성을 떠났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부터 억눌렀던 분노가, 기어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에게 지녔던 의심이 진실이었다는 걸 확인한 까닭인가. 아니면 그가 자신을 지켜야 할 존재로만 취급하는 듯한 태도에 울화가 치밀어서인가.

“지금 나는 당신 적으로서 하려 한 모든 일을 내팽개쳤지. 그건 물론 당신에게 눈이 멀고 마음을 빼앗겨서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 사는 사인들을 구원하겠다던 내 어쭙잖은 사명이 전쟁 따위가 아닌 다른 길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해. 나는 사랑 때문에 그들을 저버리기만 한 게 아니야. 월이 내 진짜 적이고, 그를 물리치는 게 내 진짜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지!”

“…연아.”

“그런데 당신은 지금 내가 간신히 스스로 찾은 목적을, 얼기설기 나마 다시 일으켜 세우려던 내 사명을, 내 능력을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별 설명도 없이 앗아가 @버리려 한 거야. 그걸 알고 있어?”

그가 처음으로 얼굴을 굳혔다. 연은 이를 악물었다. 잠시 호흡을 골랐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는지 손이 얼얼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든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눈길이 자신의 손에 머무는 게 느껴졌지만 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내를 한 대, 딱 한 대만 쳐버릴 것만 같았다.

이곳이 어디인가. 지금이 대체 어떤 때인가.

하을령의 코앞에서 하신후 얼굴을 갈긴 꼴을 보여줄 순 없다. 왜냐면 그는 어쨌든 연과 혼인할 상대였고, 그의 동생인 하을령은 연과 정치적으로 손을 잡아야 할 제국의 황제였다. 하신후의 말대로 언젠간 그와 연이 그 자리를 받을 수도 있을 테고,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하신후가 그 자릴 갖게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를 때릴 수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단 한 대라도 때려서는 안 된다. 왜냐면 그는 이제 연의 적이 아니라 연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연은 지금 이 순간도, 앞으로도, 자신의 긍지를 어떤 이유로든 앗아가려 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연의 긍지는 사인의 군주이자 신룡으로서의 긍지였다. 아무리 월에 의해 거짓에서 출발한 사명이라 해도, 사인들이 과거와 현재에 용을 신으로 섬기는 것은 변함이 없다.

월이 그릇된 용이었다면 그를 물리치고 연이 그릇되지 않은 신이 되어야 한다.

전쟁이 아니라 정치로 그들을 구원하는 군주가 되어야 한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연은 억눌린 숨이 섞인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반했어. 용의 마음은 사람과 달리 쉬이 변하지 않으니, 나는 아마 영원히 당신을 탐할 거야. 하지만 당신을 탐한다는 게 당신에게 분노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야. 분노해도 당신을 놓을 수 없으니 나는 괴로워지겠지.”

“…….”

“나를 괴롭게 하지 마.”

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현한에게서 월의 혼을 없애고, 권윤의 혼만을 남길 거야. 그럼 남겨지는 게 과연 누구로 변할지는 모르지. 더는 현한조차 되지 못하는 혼의 부스러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권윤이 살아 돌아올 거라고, 예전처럼 멀쩡한 하나의 혼을 가진 인간으로 돌아올 거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현한이 온전히 계속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연도 자신이 뭘 하게 될지는 몰랐다.

그러나 연에게는 직관과 감이 있었다. 감, 그건 참으로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적어도 연이 사람이라면 그런 터무니없는 것을 믿고 움직일 수는 없었겠지만, 연은 사람이 아니었다. 용의 직감은 천명의 그림자나 다름없다.

연이 만약 이번 일을 해결해낸다면 연은 그 사실을 그녀가 사랑하는 인간 사내에게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제국의 황제가 자신에게 큰 빚을 지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하을령이 내게 빚지기를 원해. 내가 당신의 여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연이기 때문에 내게 갚을 수 없이 신세 지게 되길 원해. 그래야 나의 백성들이 그녀의 치세 하에서 존중받을 수 있을 테니까.”

연은 조금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맺었다. 그리고 하신후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계속 침묵을 지킨 탓에, 그리고 그의 얼굴이 몹시 창백해져 있는 탓에, 연의 분노는 서서히 수그러졌다.

그는 괴로워 보였다. 솔직하게 연을 염려하고 있었다. 근심으로 수척해져 수려한 얼굴이 겁에 질린 소년 같았다.

“괜찮아. 나를 믿어.”

연은 무심코 손을 뻗어 자기 손보다 큰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서늘한 손이었다. 연은 그 손을 한번 부드럽게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먼저 등을 돌렸다.

“더는 시간을 끌면 안 되겠어. 당신이 또 무슨 계략을 꾸밀지도 모르고, 또 그대로 당신을 두었다간 걱정에 집어삼켜져서 쓰러지기라도 하겠어.”연은 괜스레 가벼운 빈정거림을 담아 그렇게 말하고는 걸음을 뗐다. 빈정거리기라도 하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우선 하신후의 감정을 살피는데 휘말리고 말 것 같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가 정체 모를 일을 시도하려 나서는 것이라면 연은 무슨 수를 써서든 그를 막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그토록 오래 앓아 온 자기 벗에 대한 기대를 접을 만큼 나를 염려하고 있어.’

그 사실이 통증처럼 가슴에 퍼졌다. 조금 목이 메었으나, 이제 할 말은 다 했으니 목이 좀 메어도 상관없었다. 연은 몇 발짝 더 떼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시 하신후의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무섭도록 잠긴 채 불안정하게 갈라지는 음성이었다.

“용의 마음은 사람과 달리 쉬이 변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대가 잘못 아는 게 있어. 나는 그저 사람이 아니야. 그저 사람이기에는 너무 오래 살았지.”

“…….”

“내 긴 삶에서 네가 내 유일한 무엇이라는 의미를, 그대는 제대로 이해해야 해.”

연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창백한 얼굴 가운데서 두 눈이 섬뜩할 만큼 가라앉은 채 어둠과 비슷한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형형하고 짙으며 끈질겼다.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움 말고는 달리 느낄 수 있는 것이 없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은 그게 하신후가 두려움에 대처하는 표정임을 알았다.

그녀는 그를 아끼니, 그를 달래야 했다. 그 사실이 비로소 전해져 왔다. 사명감을 읊는 것만으로는 정인의 불안을 잠재울 수 없다. 오랜 벗의 죽음마저 단호히 공언하고 마는 그의 마음에 응답할 수 없다.

“이제 보니 당신 정말로 팔불출이네. 걱정하지 마. 나도 혼례도 하기 전에 죽을 생각 없으니까. 나를 누구라고 여기고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연은 겁에 질린 자를 다정하게 달래는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서툴지만 단호하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이 지켜주기만 해야 하는 연약한 인간 따위가 아니야. 당신이야말로 그 사실을 제대로 이해해야 해.”

마지막 두 마디는 용언이었다. 연의 의지를 더없이 노골적으로 실어 보내는 말인 것이다. 그 말에 실린 묵직한 기운에 하신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쯤이면 정신을 차리고 이해할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하신후는 자신이 연모하는 여인이 누군지, 연이 그가 누군지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연은 더는 머뭇거릴 수 없어 다시 뒤를 돌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결계를 거두고 환한 불빛을 향해 걸었다.

하신후가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마음속이 동요로 가득했다.

실은 연도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월의 혼이 얼마나 강한 건지, 과연 혼을 다루는 일에 연이 얼마나 능할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대로 하신후에게 돌아가 그냥 현한을 없애버리자고, 모든 걸 이대로 묻고 그와 혼인부터 하자고, 둘이서 영원을 함께 살아가는 일이나 꿈꿔 보자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 충동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니 충동이 거세지기 전에 차라리 빨리-.

“뭐, 뭐야? 뭘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하을령이 연의 거친 기세에 당황했다. 현한도 움찔하며 그녀를 보는 듯했으나, 연은 개의치 않았다.

더는 무엇에도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연은 그저 그대로 현한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신의 핏줄이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본능이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용의 피와 용의 말은 만물의 혼을 다스리는 힘을 지닌다. 그것은 용 자신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그러니 연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혼을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을 지닌 존재였다.

현한의 이마에 연의 손이 닿고, 그의 목이 뒤로 꺾이며 눈동자의 검은 점이 생의 이면으로 향하는 입구처럼 커지는 순간이었다.

연의 주위로 순백의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훗날 만백성이 서북의 하얀 밤이라 부를 순간이었다. 그 희고 찬연한 빛이 어둠을 물들이고, 그 빛에 감싸인 자들 모두가 사람이 아닌 장엄한 존재의 기운에 압도되었다. 밤이 희게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은 자신이 다다른 그 생의 이면에서, 겹겹이 뒤엉킨 칠흑의 손아귀에 붙들린 소년 하나를 보았다.

비늘이 돋아난 검은 손들 끝에 잠들어 있는 소년의 얼굴은 분명 연이 처음 보는 자의 것이었다. 그러나 조금쯤은 현한을 닮아있기도 했다.

연은 그 모습에 고요히 깨달았다. 그녀의 직감은 역시나 천명이다. 존엄한 용의 직감은, 선대의 용처럼 연 스스로 천명을 거스르고 타락하기 전까지 그녀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연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가시 돋친 검은 손아귀가 그녀의 손끝에서 희게 물들어갔다. 이곳의 고요는 월의 비명이었다. 검은 비명이 연의 발치를 물들여 나갔다.

그러나 연은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당부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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