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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20)화 (120/122)

120

다른 누군가가 지켜보았다면, 모든 일이 이토록 고요하게 일어났다는 사실에 질겁했을 것이다.

밤하늘 아래서도 유독 어두운 길목에서부터, 연은 그들을 향해 나아갔다. 만나야 할 이들 말고는 곁에 다른 이들이 많지 않아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 많지 않은 몇몇 시선들이, 자신들 사이를 지나쳐 가는 연에게 들러붙었다. 아름다워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고 홀연한 자태에 놀라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은 그들에게로 고개를 돌려 그 반응을 굳이 눈에 담지 않았다. 연이 보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오로지 단 한 사람, 하신후였다.

그는 연이 온 것을 알았음에도 눈에 띄게 당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고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을 뿐이었다.

그를 따라 연에게서 뒤돌아 앉아 있던 하을령이 몸을 돌렸다. 그녀는 조금 더 반응이 분명했다.

“벌써 나타났나.”

그 말에 마지막으로 현한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현한은 하을령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여기까지 급하게 오기라도 한 건지 얼굴에 조금 피로한 기색이 묻어 났다. 그것 말고는 회운성에서 보았을 때와 같이 멀쩡했다.

연은 자신을 보고 멈칫하는 현한의 반응마저 무심하게 흘려보냈다.

하을령과 그의 모습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하신후는 이들에게 권윤에 대해 말하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현한의 육신을 권윤과 나눠 가졌을 월의 혼도, 아직은 날뛰지 않고 있었다.

연은 하신후의 옆에 착석했다.

그의 술잔을 힐끗 내려다보았다가, 하신후와 시선이 겹쳤다. 그가 연을 물끄러미 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들켰군.”

“나를 따돌린 게 맞구나. 네가 어딨는지 찾느라 애써야 했어.”

고저 없이 매끄럽게 흘러나온 연의 음성에 하신후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나 그건 진짜 미소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당황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물었다.

“화가 났어?”

“…….”

“하지만 나도 별로 기분 좋진 않았어. 그대를 속인 것도, 또 그대가 아무렇지 않게 위험한 수를 들먹이려던 것도.”

위험한 수라는 말에 연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이해 가지 않던 부분에서 답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하신후는 연이 현한에게서 월의 혼만을 취하려 드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그걸 위험한 일이라고 여겼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하을령과 현한만 따로 불러 이렇게 셋이서 오순도순 앉아 있던 이유는 뭘까. 하을령이 현한에게 깃든 권윤을 알았다면, 이런 얼굴로 태연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한도 자신의 처지를 알았다면 이렇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연이 보기에 현한의 인격은, 자신의 안에 깃든 월의 존재를 아직 분명하게 눈치채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거짓 태도를 꾸미는데 정말로 탁월한 재주를 지닌 것이리라.

현한은 정말로 아무런 영문을 모르는 듯, 그저 난데없는 하 씨들의 호출에 조금 상기된 채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늘 그랬다. 연이 곁에 보기엔 조금 가엾을 정도로 현한은 하 씨들의 관심을 사는 데 혈안이었다.

그 태도의 근원에 자리한 게 월로서의 살의든, 권윤으로서의 애착이든, 현한이라는 존재는 그 상반된 두 감정이 뒤섞인 두 혼의 겉껍질이었다.

그 껍질의 준수한 얼굴에는 솔직하게도 기분 나쁘지 않은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는 지금 하 씨들이 자신을 부른 걸 내심 기뻐하는 중이었다.

저것이 연기라면, 연은 속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 죽음을 꾀하는 자들을 앞두고 그런 얼굴을 꾸며낼 수 있다면, 나는 속을 수밖에 없어. 의심이 들지 않아. 현한은 정말로 자신이 월이자 권윤인 걸 모르는 거야.’

하신후가 그를 여기 부른 것, 그리고 불러 놓고도 하을령에게 그가 권윤이기도 하다는 걸 숨긴 이유는 아마도 한 가지뿐이다.

하을령과 함께 현한의 목숨을 그저 조용히 거두려 하는 것이다. 하을령이 지금 아는 것은, 현한에게 월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 하나이지 않은가.

다른 이의 혼이 함께 섞여 있다 한들, 하을령에게 그 사실이 월의 위협만큼 중대하게 느껴질 거란 보장은 없었다.

자그마치 백오십 년이 넘는 시간이다. 보통 사람의 혼이 그 정도로 오랫동안 월과 뒤섞여 현한이라는 새 인격이 되어 있었다면, 그 혼을 여전히 예전 그 사람의 혼이라 부를 수는 있는 걸까. 인격이 닳아 없어지고 훼손되어 더는 그자가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연조차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하을령도 주저하지 않으리라. 굳이 연의 힘을 빌려 현한에게서 월의 혼만을 없애려는 모험을 무릅쓸 이유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그 닳아버리고 일그러졌을 혼이, 권윤이라는 걸 안다면…….

“조금 취해 보이는데. 잠깐 나와 걷지 않을래?”

연이 탁상에 나른히 놓인 하신후의 손을 쥐었다. 연의 손에 비해 크고 서늘한 손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겹쳐진 연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럴까.”

하을령이 그들을 날카롭게 흘겼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하신후와 함께 연을 따돌리고 여기까지 온 탓인 듯했다. 굳이 소란을 피울 생각이 없던 것이다.

“빨리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진 모르지만,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으니.”

곁을 스쳐 가려는데, 하을령의 나직한 이죽임이 뒤따랐다. 연은 그 말에 현한의 얼굴이 의아해지는 것을 보았다.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다.

그건 현한에게 깃든 월이 언제 무슨 난동을 피울지 알 수 없단 거였다. 지금까지 월은 직접적인 육신을 갖춘 실체로 그들 앞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럴 것인지, 월이 실제로는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현한마저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여 그는 그저 무슨 위험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인상을 굳힐 따름이었다.

연은 조금 가엾게도 보이는 그 모습을, 그리고 그보다 더 가엾은 여인을, 그들을 가엾게 둔 채로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려 한 자신의 정인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연은 하신후의 손을 쥐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더 어두운 곳으로 가야 했다. 하을령의 귀에 그들의 음성이 쉽게 닿지 않을 곳으로 향해야 했다.

다행히 객점은 숲이 산길로 접어드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하여 연은 짙은 어둠이 발치를 물들이는 길목으로 하신후를 이끌었다. 그녀는 어둠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으나, 하신후가 저지르려 한 짓은 두려웠다.

연은 결계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가두는 것까지를 마쳤다. 결계라니 하을령이 조금은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따돌림당한 분풀이를 하려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냥 넘어가 줄 것이다.

하신후는 무표정하게 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연은 그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솔직하게 대답해 봐. 지금 저 자리에서 현한을 그냥 죽이려 했던 거지?”

“…지켜보려 했지.”

그는 순순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의 짐작대로 권윤과 월의 혼이 뒤섞여 현한이 된 것이라 해도, 나는 권윤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권윤은 죽었다.”

“그건-.”

“죽지 않았다면, 을령이 그를 알아보았겠지.”

“……”

“하지만 을령은 현한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 나도 그랬지. 오늘은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을령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내 벗을 꽤 자세히 기억하고 있으니, 지켜보면 알지 못할 리 없잖아. 그와 권윤이 아주 조금이라도 닮아 있다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 거야.”

연은 저도 모르게 힘주어 두 주먹을 쥐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치미는 듯하여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차릴 수 있는 게 없었어?”

“그래, 없었어.”

“…그럼 역시 죽이려던 거구나. 그에게 깃든 월이… 환영을 빌리지 않고도 육신의 지배권을 온전히 갖게 되기 전에… 그냥 없애는 편이 쉬우니까.”

“그대가 나설 필요는 없어.”

“만약에 월이 깃든 게 현한일 거라는 추측이 빗나간 거라면?”

연은 어쩐지 머릿속이 무뎌지는 기분에, 감정이 실린 물음을 아무렇게나 뱉었다.

“정말로 이대로 나를 따돌리고 그냥 현한을 죽일 셈이었어? 그렇게 해서 모든 일을 지워버리는 게 당신의 방식이야?”

하신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연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쥐려 했다. 연이 흠칫 뿌리치자 홱 손을 뻗어 연의 손목을 낚아챘다. 연이 분노하며 다시 그 손을 뿌리쳤다.

“혹시라도 하는 얘긴데, 나를 걱정해서 이러는 거라고는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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