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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16)화 (116/122)

116

회운성에서 함께 지냈던 사람이, 실은 월과 권윤의 혼이 깃든 자였다니. 섬뜩함에 서늘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도 기이했다. 연에게 현한은 여전히 현한일 뿐이었다. 봇물 터진 듯 추측을 쏟아 냈긴 했지만, 정작 말을 한 본인도 현실감이 없었다.

현한은 부토에서 연의 일상에 스며들었던 사람이었고, 괜히 시비를 툭툭 걸어오는 모습은 유치하다고까지 느껴졌다. 그런 자가 월이라니.

머릿속이 복잡하기는 하신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날 밤 그는 굳이 연과 같은 침실에서 잠들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마음이 심란하고 어지러워 혼자 자러 가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감정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건, 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혼인할 사이인데 굳이 각방을 써야 할 이유가 뭔가 싶기도 했다.

‘세간의 이목이 신경 쓰여 따로 잔다기엔, 어차피 그들의 눈에 우리 관계가 순수해 보이기만 하지도 않겠지.’

그렇다면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깊은 밤, 연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하신후가 금언술을 풀어주었음에도, 성은 여전히 조용했다.

사람들이 긴장한 채 소리를 죽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공기마저 날카롭고 팽팽하게 조여들어 있었다.

연의 뛰어난 후각은 두려움의 냄새마저 감지할 수 있는 듯했다. 성 안에는 묵직한 공포의 냄새가 퍼져 있었다.

그렇다면 성을 적막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어떠한가. 연은 슬며시 눈을 떠 옆에 누운 사내를 바라보았다. 침상이 커서 두 사람이 함께 누워 있어도, 살이 닿지는 않았다. 하여 연은 그 점에 기대어 합방을 수락한 것이기도 했다. 침상이 넓으니, 접촉 없이 잘 수 있을 터였다.

감았던 눈을 뜨니 한 이불을 덮고 누운 그가 보였다.

그는 이미 잠들었는지 곱게 눈을 감고 있었다. 천장을 보고 반듯하게 누운 자세가 단정했다.

연은 이대로 잠든 그의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었다.

하신후는 현한의 미심쩍음이 수면 위로 드러나자마자 분주해졌었다. 잠시 연을 끌어안고 불안해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성주를 불러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는 듯했다.

하을령에게는 말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 을령은 삼강에 있어. 하니 곧 만날 수 있겠지.

을령이 삼강에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연은 눈을 감은 채 조금 전, 저녁 무렵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땅거미가 내려 날이 어두워졌을 즈음, 연은 기억 한쪽에 자리 잡았던 백색의 광휘가 다시 나타나 하늘을 물들이는 것을 보았다.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지는 하신후와의 첫 만남 이후, 삼진에서 함께 지낼 때 보았던 빛이었다.

정확히는 그가 연을 다홍과 리경에게 돌려보내고 혼자 월의 저주를 파훼하러 나섰을 때, 그가 가져갔던 무기가 뿜어내던 빛이었다.

하을령이 정말로 삼강에 홀로 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신후가 삼진에서 그리했듯 하을령도 저곳에서 광휘로 월의 피를 몰아내고 있는 것이리라.

하신후가 무기를 휘두르며 하늘을 새하얀 빛으로 물들였을 때, 그 빛은 월의 피뿐만 아니라 연마저도 뒤흔들었다.

연은 며칠을 깨어나지 못했다. 술을 마셔서 그렇다는 엉터리 같은 핑계를 댔지만, 실은 저 빛을 오롯이 몸에 받은 탓이었다.

먼 하늘에서 번진 빛이기는 하나, 이번에도 연은 그것을 보기가 편하지 않았다. 시야가 조금 일렁이고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차분히 정신을 가다듬자 곧 아무렇지 않아지기는 했지만, 지난번에는 이보다 훨씬 더 심했다. 새의 모습인 채로 간신히 리경과 다홍 곁에 돌아와, 그대로 혼절해 버리고 말았었다.

그 위험했던 빛을, 그때의 광휘를, 이번에는 하신후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저 무기가 용을 죽이려 만들어진 것임을 모르진 않았다.

하신후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얼굴은 창백했다. 연이 한 마디라도 괴롭다는 말을 꺼내면, 그가 무엇이라고 대답해 올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그가 연을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삼강의 하늘은 아주 먼 곳에 있었음에도 그는 창을 닫아 버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늘을 고집스레 내다보는 연 때문에 꾹 참는 듯했다.

저 무기를 고안해낼 때, 하신후도 하을령도 용을 자신들의 적으로만 여겼을 테고, 그 때문에 용에게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어 낸 것이리라.

먼저 침묵을 깬 건 연이었다, 그에게 빈 찻잔을 내밀며 연이 입을 열었다.

“실은 거짓말을 한 게 있어. 삼진에서 회운성으로 이동하면서 말이야. 내가 술병이 나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건 거짓이야.”

“…….”

“사실은 새가 되어 당신이 월의 수하와 있는 모습을 봤어. 당신이 그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도 다 보았어. 그러다 저 빛이 하늘을 물들이니 갑자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간신히 다홍과 리경에게 돌아갔고… 그 아이들이 술병이라고 오해를 해 주는 덕에 그 뒤로는 그냥 그렇게 된 거야.”

연은 그의 표정을 살짝 살핀 뒤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었지?”

그는 대답 대신 연의 빈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랐다. 조르륵-. 찻물 떨어지는 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이 그의 마음 같았다.

여인으로 변해 배에서 연을 따라다닐 때도, 회운성에서 다과를 차려 낼 때도, 꾸준히 먹이려 드는 바로 그 차였다.

하을령이 삼강의 하늘을 용에게 치명적인 빛으로 물들이는 동안, 하신후는 여기서 자신에게 용의 힘을 강대하게 해 준다는 차를 대접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이질적인가.

연은 태연히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하신후의 나직한 음성이 뒤따랐다.

“…그대가 새가 되어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건 지금 알았군.”

그는 잠시 말을 그쳤다가 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대는 나를 해친 적 없지만 나는 그대를 해친 적이 있는 셈인데. 내게 화가 나지는 않았나?”

연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 사내의 셈법에는 오류가 하나 있었다. 하신후가 자신에게 눈이 멀어 있기는 한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질문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지금에야 이런 사이가 되었지만, 본래 연은 하신후를 죽이려고 했다. 서로를 죽이려던 관계에서 그런 문제로 화라니, 당치 않았다.

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웃음 섞인 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내 마음은 당신을 향한 염려로 가득 차 있어.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모두 좋았던 기억으로 새겨져 있지. 하지만… 현한이 월이라면, 그건 당신의 벗인 권윤이라는 뜻이기도 하잖아. 그래서 나는 당신이 아플까 봐 염려돼.”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었다. 하을령의 마음이 어찌 반응할지,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하신후는 현한이 월과 권윤의 혼이 뒤섞인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대화를 나눈 뒤에도, 그 점에 대해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연은 눈을 돌려 희고 찬란한 빛으로 물든 삼강의 하늘을 잠깐 보았다가, 다시 하신후와 눈을 맞췄다.

“당신 동생이 이렇게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당장 찾아오지 않는 건, 그 사람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겠지. 이렇게 정체를 다 드러내고 있는데, 우리가 여기 있단 걸 모를 리도 없을 테니.”

하을령의 성격상 정말로 타협의 여지가 없는 문제라면 이미 눈을 시퍼렇게 뜨고 연과 하신후를 죽이겠다고 달려왔을 것이다. 두 사람을 죽여 버리든, 재지 않고 덤비다가 죽어 버리든 벌써 피바람이 불었으리라.

한데 그녀는 여기 옥읍이 아닌 삼강에 먼저 찾아갔다. 일견 삼강의 일을 해결하려는 이성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그녀는 망설이는 중일 것이다. 그날 하신후가 했던 이야기 중에, 어떤 말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동생이 우릴 곧장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적이야. 그러니 역시 우리 둘 사이의 모든 일은, 지난 일이든 지금 벌어지는 일이든 온통 좋은 것들뿐이라 말할 수 있겠지.”

연은 싱긋 눈을 접으며 미소 지었다.

가냘픈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웃는 모습에, 하신후는 무심코 말문이 막혔다. 저주흔으로 생김새를 감추고 있을 때도 이렇게 미소를 지었었지. 긍지 높은 존재의 웃음이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이리 좋은 일들뿐인데, 왜 우리를 둘러싼 일들은 온통 흉흉할까. 하지만 그것도 이젠 괜찮아. 내 모든 추측이 옳다면, 내게 묘책이 하나 있긴 하거든. 어쩌면 내 힘으로 그 권윤이라는 자와 월의 혼을….”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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