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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은 하신후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화가 난 마음을 알려주기 위해 쳐다본 것인데, 그 얼굴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오히려 마음을 풀리는 것 같았다. 더 큰 저 문제는 눈빛이었다. 하신후가 황홀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 치 혀로 자신을 잘 달래려 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지금까지 당신의 삶은 다 나를 만나기 위한 기다림이었다고 치지. 하여 어찌 살았든 책망하지 않겠어. 하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마. 당신은 당신을 더 아껴야 해. 원하는 것은 가져야 하고, 희생을 했다면 남들에게 그에 대한 감사를 받아야 해.”
“그래, 그러지.”
그는 잠깐 소리 없이 웃어 보이고선 덧붙였다.
“한데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대만 줄 수 있는데.”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연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연은 고개를 조금 돌려, 그에게 입술을 맞댔다. 맞닿은 얇은 살갗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둘은 혼란과 번민을 사그라뜨리듯, 잠시 그대로 입술만 맞댄 채 서로에게 붙어 있었다. 연의 흉포했던 두 눈동자가 천천히 분노를 가라앉히고 인간의 눈으로 돌아왔다.
이윽고 하신후는 낮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실은 을령에게 조만간 저주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나는 그대와 혼인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거야.”
혼인하기 위해선 진실을 알게 된 하을령이 그에게 지니게 될 막대한 부채감마저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싫지는 않았다. 연도 그가 솔직히 말하는 게 좋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연은 일단 너무 동조하는 것은 위험할 듯하여, 슬그머니 말을 감추었다.
“그래, 그리고….”
그녀는 한 가지 더, 망설이던 추측을 입에 담기로 결심했다. 사실은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다. 조금 더 확실해지면 말해야겠다고, 내심 단서를 모아 보려 생각 중이었다. 그러나 감춰져 있던 하신후의 마음을 알고 나니 더는 망설이기 싫어졌다.
그는 이렇게나 솔직하다. 한데 자신만 그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를 마음 상하게 할까 봐 겁내기보다, 모든 문제를 대화하며 차근차근 풀어나가고 싶었다.
“한 가지 더 말해야 할 게 있어. 아직 추측일 뿐이지만.”
“음.”
그가 연의 말을 기다렸다. 연은 이번에는 단호히 권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리 해야 할 것 같았다.
“월이 권윤의 몸을 차지했다면, 그 후에 외양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야. 권윤의 모습으로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다른 이인 척 지내는 게 나았겠지.”
그편이 모두의 눈을 피하기 쉬웠을 것이다.
하을령과 하신후가 얼마나 백방으로 권윤을 찾았겠는가.
술법으로 외모를 바꿔봤자 들키기 쉬우니, 아예 그보다 더 확실한 수를 썼을 것이다. 실제 뼈를 깎고 살을 잘라 붙여가며 외모를 바꾸는 길이 있었다. 술법으로 외모를 바꾸는 것보다 고통스러우니 흔히 택하는 길은 아니나, 술법과는 달리 흉이 아물면 생김을 바꾼 증거를 찾을 수 없어서, 간혹 쓰이는 용 일족의 고대 기술이었다. 그 시술은 주로 신전에서 행해졌다. 이따금 시술 중에, 피가 필요하다며 이상한 청 같은 것을 넣어 연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아마 하신후도 그런 시술이 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겠지만….
“아마도 월은 달아난 뒤 그대로 부토에 숨었겠지. 하지만 계속 숨어 있기만 하진 않았을 거야. 부토에 있었다면 한 번이라도 직접 나를 만나러 왔겠지만, 내가 그를 만난 건 계속 환영을 통해서 뿐이었어. 그는 나와 가까이에 있지 않았던 거야.”
월은 연을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이는 하신후조차도 결코 알 수 없는, 연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월은 연이 태어난 뒤로 줄곧 멀리 떨어져 살아왔다. 연에게 대단히 집착하고 있으면서, 의아한 일이었다.
연에게서 먼 곳, 쉽게 연을 찾아올 수 없을 만큼 떨어져 있는 곳. 부토는 아닐 것이다. 그보다 훨씬 거리가 있는 곳일 테였다.
하면 어디겠는가.
부토가 아니면 제국뿐이다.
“내가 태어난 뒤로 나를 만나러 온 적 없으니, 아마도 그가 부토를 떠난 건 내가 태어나기 직전이었겠지. 게다가 한 가지 더 맘에 걸리는 건….”
연은 머뭇거렸다.
“내가 본 환영의 월은 강했지만 어딘가 이상했어. 자기 힘을 제대로 되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 그렇다는 건… 어쩌면… 권윤의 혼이 아직은 그 몸에 남아있는 걸지도 몰라.”
말을 뱉은 연은 숨을 죽였다. 하신후도 침묵했다.
연은 둘의 생각이 빠르게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둘은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긴 시간이 흘러, 두 혼이 서로 완전히 나뉘지 않고 뒤섞였을 수도 있다. 월에게서는 바로 그런 기척이 전해져 왔었다. 자기 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불안정한 기색이 흘러넘쳤다.
하신후는 월이 그리 긴 시간, 연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제국에 숨어들어 와 있었을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도 그렇지 않은가. 월은 약해진 채였고, 이지가 있는 자라면 사지가 될 곳으로 기어들 리 없었다. 적어도 힘을 되찾기 전까지는.
한데 월은 그리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온전히 월만의 의지이겠는가.
“권윤의 의지가 살아남아 있다면 그가 그것을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을 리는 없어.”
하신후의 음성이 희미하게 떨렸다.
연은 그의 손목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이었다. 머릿속에 온갖 추측들이 가득 차 점점 날카로워져 저도 모르게 입술이 짓씹어졌다.
“직접 알리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알려 왔다면… 적어도 당신들 곁으로 돌아오려 했다면…”
월의 혼에 지배당한 육신을 끌고, 그의 혼에 집어삼켜지는 동시에 그 혼을 집어삼키려 했다면.
연은 마침내 짙은 안개처럼 깔려있던 추측을 헤치고 한 가지 생각에 다다랐다. 그것이 너무 또렷해 더는 입에 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이미 같은 지점에 다다라 있는 것이 분명했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외양이 변했을 테니 더는 겉모습만으로 그의 정체를 추측할 수 없다. 하면 시기적으로 연이 태어난 때와 비슷한 시기에 제국에 나타난 자. 부모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고, 정체가 어수선하나, 그런데도 고집스레 하신후와 하을령의 곁에 있으려는 기이한 자.
“…현한이 제국에 나타난 것도 그 즈음이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연이 말을 흐렸다.
그러고 보니 현한은 연의 이능에도 반응하지 않은 유일한 자였다. 하신후 역시 그 사실을 듣고 불쾌해하지 않았던가.
“그가 하씨 가문 일원으로서의 힘 덕분에 내 이능에 반응하지 않은 걸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어쩌면 그것만이 아니라….”
연은 미처 말을 잇지 못했다.
권윤과 월의 혼이 뒤섞여, 현한이라는 새로운 인간을 빚어낸 거라면.
아니, 하지만 아직도 월은 그 자아를 잃지 않고서 제국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권윤의 자아는 어떻게 된 걸까.
현한은 혼의 뒤엉킴으로 태어난 인간이라기엔 너무도 생생한 자아를 지닌 자였다. 그저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하여 연은 이 무서운 추측을 쉽게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연이 지켜본 현한에게는 오직 한 가지 바람만이 불거진 채였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하신후와 하을령에게 집착했다. 멸시받을 때조차도 그들 곁을 맴돌고, 오로지 그들과 말을 섞는 것이 그가 지닌 가장 큰 욕망인 듯 굴 때도 있었다.
그런 행동의 원인은 인정받지 못한 서자의 질투와 원한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그뿐이었을까.
“부토에서 당신을 보았을 때 느꼈어. 당신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그다지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었지. 하지만 현한이 말을 걸 때면 태도가 달랐어.”
분명히 현한을 싫어하는 것이 틀림없는데, 그런데도 희미하게 위화감이 느껴졌었다. 현한 역시 그랬다.
어리석고 경박한 자인 듯하다가도 하 씨 남매에 대한 집착만큼은 이상하게 끈질겼다.
“내가 부토에서 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어.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건지는 밝히지 않았지. 하지만 내게 갑자기 나타나서는 조심하라며 경고했어.”
하신후가 처음 듣는 말에 멈칫했다.
어쩌면 그때 현한의 경고야말로, 그에게 두 혼이 깃들었다는 단서였을지도 모른다. 월이 아는 연의 비밀을, 권윤의 의지가 현한의 육신을 통해 연에게 경고한 것이다. 월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월이 하신후와 연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아주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이 사실을 하을령에게 알려야 해.”
연이 떨리는 손으로 하신후의 손을 겹쳐 잡았다. 그도 연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하신후가 굳은 음성으로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은, 연의 예상을 빗나가는 것이었다.
“다시는 그대를 혼자 두고 떠나지 않겠어.”
“…응?”
“회운성에서 내가 떠난 뒤 그대 곁에는 현한이 남아있었지. 내가 어리석었어. 만일 그때 그가… 정말로 현한의 몸에 깃든 월이 그대를 해쳤다면….”
그의 음성이 떨렸다. 차마 말을 이을 수 없는 듯 하신후가 침묵했다. 연의 손목을 움켜쥔 손아귀가 억셌다. 연은 통증을 느꼈으나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