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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14)화 (114/122)

114

하신후가 굳는 것이 느껴졌다. 연은 그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녀는 용이니, 용이 힘을 담아 손을 이리 세게 쥐었다면 보통 사람의 손은 부스러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신후의 손은 평범한 이에게 잡힌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연은 하신후를 염려하고 있었다. 꼭 잡은 손의 온기로 그 마음이 전해지고 있었다.

연은 하신후가 걱정스러우면서도, 자신이 누군가를 이리도 염려할 수 있다는 것이 생경했다.

아닌가, 이제는 이런 파동이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어느새 일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를 염려하는 만큼 이제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자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어. 당신의 벗이자 하을령의 정인이었다던 사내.”

권윤이라는 자다.

이름을 알았으나 부러 말하지 않았다. 이름을 들으면 그의 마음이 더 상할까 봐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월의 저주로 그리 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

“그의 육신을 월이 빼앗은 것일 수도 있어.”

그것이 권윤이 수백 년 동안 환생하지 못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직접 들은 적은 없으나 연은 하을령과 하신후가 내심 그의 혼이 이승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무슨 모습으로든 돌아오기만 한다면 알아볼 텐데, 그가 오지 않아 하을령의 마음은 불에 타 재만 남은 폐허와 같았다.

하나 처음부터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이었다면.

월이 그를 취한 것뿐이라면.

- 너희는 일평생 가장 아끼는 이에 닿지 못하리라.

- 너희는 일평생 가장 원하던 것을 거머쥐지 못하리라.

- 너희는 일평생 가장 그리던 곳에 다다르지 못하리라.

그럼 이 긴 세월, 저주에 짓눌려 그토록 원하던 ‘황위’에 오르지 못한 하신후의 생은 대체 무어라 위로해야 하는가.

월의 세 치 혀의 농간에 놀아나 버렸다고, 그가 과거를 허망히 돌이킬까 봐 두려웠다. 연은 자신이 희미하게 떨고 있음을 느꼈다.

전쟁이 끝나고 백오십 년.

하신후는 전쟁을 마치고 곧바로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을령이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그가 바라던 것은 오직 황위뿐이라고.

월을 죽이면 비로소 그것을 거머쥐게 될 텐데, 이제 와 그게 관심 없다고 말하는 것이냐고.

슬픔이 몰려든 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신후의 가슴에 공허가 밀려들까 봐, 분노가 그를 집어삼킬까 봐 겁이 났다.

침묵이 잠시 둘 사이를 메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신후의 손이 뱀처럼 뻗어져 나와, 연의 턱에 닿았다. 그가 그녀의 고개를 살며시 들어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 연은 멈칫했다. 그는 슬퍼 보이지도 분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대 덕분에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군.”

“…….”

“내 추측이 옳은 것이었음을.”

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신후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연을 안심시키려는 듯한 미소였다. 그 모습이 가슴이 시큰하도록 다정했다.

“나도 어렴풋 알고 있었어. 권윤은 그날 그에게 육신을 빼앗기고 죽었….”

“그건! 죽은 게 아니라….”

“아니, 죽었어.”

“…….”

“하니 돌아오지 않는 것이지. 권윤의 혼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육신을 되찾아 을령에게 돌아왔을 거야. 하지만 오지 않고 있으니, 그는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권윤의 몸은 지금 월의 것이다.

연은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었다. 하신후의 담담함이 아득하도록 슬펐다. 연에게는 권윤이 살았든, 죽었든, 기실 그리 중하지 않았다. 연에게 중한 것은 하신후였다. 그리고 하신후는 지금 눈에 뻔히 보이는 사실 하나를, 에둘러 외면하고 있었다.

연은 하신후가 도망치게 둘 수 없었다. 그를 위해 누군가는 분명하게 말해줘야 했다.

“…처음부터 권윤이 육신을 빼앗기고 월의 의지에 따라 거길 빠져나간 것뿐임을 알았다면… 그럼 저주가 당신들을 현혹하려는 거짓이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어?”

하신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잔물결이 일다가, 숨기지 못하고 슬픈 빛을 띠고 말았다. 그는 멋쩍은 듯 눈을 찌푸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래.”

“…….”

“처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어.”

침묵이 흘렀다. 연은 하신후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견디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하신후가 작게 숨을 삼켰다. 그의 손이 다시 연의 턱을 부드러이 당겼다. 연은 뿌리치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고개를 들었으나, 눈은 여전히 고집스레 내리깐 채였다. 지금 그를 마주하면 독설을 한 마디쯤 뱉고 말 것 같았다.

얼간이 같은 사내 아닌가.

지금 이 순간마저도, 연이 먼저 말하지 않았다면 자기 입으로는 그 사실을 떠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신후.”

연은 들끓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느릿하게 으르렁거렸다.

“너는 참으로 너를 아끼지 않았군. 내가 없었다면 너는 홀로 늙다가 끝내 외로워서 죽었겠지.”

하을령마저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당당하게 하신후가 원하는 것이 황위뿐이라, 그가 긴 세월 그것을 위해 월을 쫓아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까마득히 몰랐다.

그녀의 오라비는 처음부터 저주 따위 믿고 있지 않았다는 걸. 그가 황위에 오르지 않은 것은, 권윤이 어찌 사라진 것인지 그 진실을 밝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저주는 핑계였다.

그는 대체 그 긴 세월 동안, 어떻게 홀로 비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권윤이 육신을 빼앗길 무렵, 곁을 지켰던 것은 하을령이었다. 그녀는 꼭 붙잡고 있던 제 연인이 월의 혼에 육신을 빼앗기는 것을 막지 못했다.

정말로 막을 방도가 없었을까.

연조차 이리 쉽게 아쉬워지는데, 하을령이라면 더할 것이다.

자책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그늘을 만들고, 그곳에 엉켜드는 순간, 하을령은 고통에 뒤얽힌 괴물이 되었을 터였다.

아니, 괴물이 되었다면 적어도 살아는 있었겠지.

일기장 속 그녀는 강하지만 나약한 자였다. 곧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고, 권윤이 아니었다면 바로 자기 생을 내던져버릴 것 같았다.

하신후는 그녀가 어두운 책망의 그늘 속으로 가라앉아 버릴까, 오직 그녀를 지키기 위하여 저주를 믿는 시늉을 해 온 것이다. 그 숲에서 비명을 지르던 하을령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저주를 믿지 않으면 버텨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도 오라비도 막을 수 없는, 불가해하고 강력한 용의 저주는 반드시 존재해야 했다. 의심조차 품을 수 없었다. 의심은 진실을 보게 하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직면할 수 없는 자는 두 눈을 꼭 감아야 했다.

“을령의 죄가 아니야. 내가 막았어야 했어. 아니면 그를 찾아냈어야 해. 이렇게 긴 시간이 흐르기 전에… 세월을 견디다 못한 권윤의 혼이 닳아버리기 전에… 찾아내서 월의 혼을 멸했어야 했어.”

하신후의 중얼거림에 연은 퍼뜩 눈을 들어 매섭게 그를 질책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내게 그런 거짓은 통하지 않아. 너는 얼간이야. 하을령은 지금처럼 네게 당당해서는 안 돼. 너는 네 동생을 위해 가장 바라던 걸 버렸어. 그자는 그 사실을 알아야만 해.”

노기가 치밀어 연의 동공이 길쭉하게 세로로 찢어졌다. 흉포한 용의 눈동자였다. 하신후는 멈칫 그 눈을 내려다보았다. 연은 그의 기색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누군가는 그를 위해 화를 내야 했다.

그의 희생에 이토록 긴 시간 무심히 기대기만 해온 하을령에게 화를 내든, 아니면 멍청하게 몸을 빼앗긴 그 권윤이라는 무능력한 사내에게 화를 내든, 하신후가 시달리는 꼴을 그냥 당연히 여기던 자들에게 화를 내든, 아무튼 지난 모든 것에 화를 내야 했다.

“너는 네가 가장 바라던 것을 버렸어. 남을 위해 그리 했고, 누구도 그 은혜를 온전히 갚을 수는 없을 거다. 이미 흐른 시간은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연은 부아가 치밀어 저도 모르게 고압적으로 말하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던 그가 머뭇거리다가 농을 치듯 눈을 슬쩍 휘었다.

“흠, 버리진 않았습니다. 동생에게 주었을 뿐인데….”

“그런데 은혜도 모르고 네 손목이나 분지르다니!”

연이 하신후의 손목을 낚아챘다. 다쳤던 손목이었다. 눈앞에서 손목이 그리 상하는 것을 보았으니, 그 장면은 오래도록 생생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네 동생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여인과는 전쟁을 하고 말았을지도 몰라.”

“백룡이시여, 그건 좀 위험한 말씀인 듯한데요.”

“자꾸 말을 높이지 마. 네 입술을 물어뜯어 버리고 싶으니까.”

연은 으르렁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진줏빛이 감도는 듯, 붉은빛이 스민 듯 오묘한 빛깔의 눈동자에서 세로로 찢긴 동공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신의 눈이자 괴물의 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신후가 연모하는 여인의 눈이었다.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연의 눈은, 그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품고 있었다.

하신후는 느리게 숨을 삼켰다. 목 아래 어딘가에서 열기가 꿈틀거렸다. 열감에 말문이 막혔다.

연에 대한 그의 마음이 차올라, 범람에 휩쓸린 것처럼 정신이 일렁거릴 지경이었다. 어쩌겠는가. 정신이 조금 아득해도, 평생 이 마음에 사로잡혀 살아갈 터였다.

“나를 위해 슬퍼해 줘서 기쁘구나, 연아.”

그는 가까스로 갖가지 기이한 충동을 억누르며, 되도록 상냥하게 한 손을 들어 연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동그란 머리통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그의 여인이 움찔하며 그를 마주했다. 그는 다시금 들끓는 충동을 잘 달래며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한데 너무 슬퍼하지는 마라. 내가 달리 살았다면 이렇게 너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 황제가 되었어도 내 삶은 밋밋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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