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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12)화 (112/122)

112

그와 걷는 길은 왜 늘 이토록 찬란하게 아름다운가.

조금이라도 팔목이 아픈 기색을 보이면 얼른 제정신을 차리고, 이동술을 사용해 여길 뜨자 말했을 텐데.

연의 이기가 범람하도록, 하신후는 그저 꿈결처럼 웃고만 있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남들은 어찌 여길지 모르지만, 연의 눈에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 동물처럼 순수하고 무구해 보일 정도였다.

수려한 사내이긴 했지만 번듯한 얼굴에도 감춰지지 않는 어둡고 냉한 기운이 있었다. 그 싸늘함을 연도 아예 모르지만은 않았는데.

그런데 왜 연에게는 냉기 어린 모습마저 곱게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랬을까, 연의 오랜 고민이었지만 이제 그걸 되짚어 보지 않기로 했다. 하신후가 하을령에게 말하길, 연을 보자마자 한눈에 마음에 들었다 하지 않았던가.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지난날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굳이 어떤 순간이라 떠오르지 않았던 이유를 뒤늦게 알았다.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어왔고, 그 뒤로는 그래서 극적인 순간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얕은 산의 오솔길이 평온하고 고요하여, 앞으로 닥칠 일을 잠시 잊고 그저 발을 맞춰 걷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연은 지금 함께 걷는, 이 인간 사내와 혼인하리라. 그리고 그 뒤로는,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 자를 거머쥔 채로 헤쳐나가리라 다짐했다.

용의 탐심은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한번 가지기로 했으니, 연은 반드시 하신후를 손아귀에 넣을 터였다. 처음 입술을 맞댄 순간, 용의 기민한 예지가 그리 말해주었다. 이 사내는 연이 그저 평화뿐이던 돌이자 알의 시간에서 깨어나, 혼란한 인간 세상에 던져져서 얻은 유일한 보상이었다. 사인들을 구원하든, 이 제국을 구원하든, 연도 태어난 이상 보상 없이 남들 좋을 일만 하면서 살아갈 순 없는 거 아닌가. 연의 귀한 보상이, 이 자인 건 분명했다.

그리고 하신후의 행복한 얼굴로 보건데, 자신보다 더 오래 혼자 지냈던 이 자 역시, 비로소 그동안 버텨 온 보상을 누릴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연은 사백 해가 넘는, 그의 짧지 않은 삶에 마침내 주어진 보상이었다.

*

하신후의 말대로 이곳은 삼강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읍, 옥읍이었다.

옥읍은 삼강보다는 크지 크지 않았으나, 성주라면 마땅히 의술사들이 곁에 두기 마련이었다. 본성에 찾아가 하신후의 신분을 고하니, 그 뒤로는 마주치는 모든 이가 그저 혼비백산한 낯으로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옥읍의 성주는 백발의 노인으로, 옥안을 비롯한 삼진과 삼강 일대를 두루 다스리는 려 씨 가문의 려경인이 태수가 되기 전부터, 성주 자리에 앉아 있던 자였다. 어린 태수 려경인과도 단 한 번밖에 면식이 없었는데, 그마저도 려경인이 어렸을 때 일이었다. 그는, 그런데 북왕 하신후가 옥안을 찾았다니, 그는 기겁하여 납죽 엎드렸다. 그의 식솔과 가신들 전원이 죄다 몰려나와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제, 제국의 홍복이신 부, 북왕 전하를 뵙습니다.”

성주를 비롯하여 거기 엎드린 모든 자는 한편으로 연신 한곳으로 쏠리는 눈길을 애써 숨겨야만 했다.

말로만 듣던 북왕 하신후가 이곳에 찾은 것도 놀라운데, 그가 한 여인의 손을 쥐고 있는 상황에 더 기가 막혔다.

하신후의 곁에 선 여인의 용모 또한 가히 충격적이었다. 충격이라는 말 말고 달리 어떤 말로 저 생김을 표현할 수 있을까.

일찍이 북단의 회운성에서부터 이곳까지 괴이한 소문 하나가 퍼지고 있기는 했다. 설마 저 여인이 바로 그 소문의 주인공인 것일까.

한데 여인의 용모가 소문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북왕 하신후는 본래부터 여색과 관련해선 썩 좋지만은 않은 소문을 몰고 다녔다. 듣기로는 그와 가까워진 여인들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결말을 맞기까지 했다. 그러다 얼마 전에는 그가 기이한 취미를 발동시켜 얼굴에 흉한 저주흔이 있는, 사인 여인 하나를 가까이 두었다 했다. 그것도 마음이 동한 게 아니라, 그저 그와 약혼하게 될 진희설의 심기를 그저 괴롭히며 그 가학적인 즐거움을 느끼려 그랬다는 말도 있었다.

한데 정작 하신후가 손을 쥐고 있는 저 여인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경국지색이라는 수식이 경박하게 들릴 만큼 고아하고도 귀한 생김이었다. 진주를 녹여 빚어낸 듯한 오묘한 빛깔의 머리칼과 희고 맑은 얼굴은 그녀가 서 있는 자리에 없던 달빛이, 갑자기 비추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어, 어찌 저런...”

사람들은 하신후의 이름에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벌벌 떨었으나, 한편으로는 자꾸만 그 여인에게 가서 붙박이는 눈길을 제어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황홀한 기품을 지닌 사람 아닌가. 마치 사람이 아니라 천신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잠시 왕림한 것만 같았다.

저리 귀해 보이는 자가 자신들과 같은 사람일 리 없지 않은가.

연은 아직 허락을 받지 못해 차마 온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면서도, 저를 보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차분히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북왕과 혼인할 상대다. 그리고 사인들이 섬기는 신인, 백룡이기도 하지.”

엎드린 사람들 사이로 한 순간 기이한 침묵이 번졌다.

하신후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누군가 홀린 듯 고개를 들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연은 그 얼굴을 마주했다.

다른 한 명, 그 다음으로 다시 두 명, 서서히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하였으나, 입을 벌려도 그에게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눈을 부릅뜨고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기 목을 감쌌다.

그의 벌어진 입에서 돌연 왈칵, 피가 토해졌다. 그를 본 자들이 기겁하여 소스라쳤으나 그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오는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연은 하신후를 돌아보았다.

하신후는 무표정하게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잠시 소리를 빼앗긴 자들을 보며, 고저 없는 음성으로 나른히 말했다.

“외딴 도읍이라 그러한가. 귀족을 만날 일이 드물어 지켜야 할 예법마저 잊었나 보군. 너희는 내가 보기를 허할 때만 나를 볼 눈을 지니고, 내가 지껄이기를 허할 때만 내게 할 말을 지니는 자들이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내가 나의 생을 바쳐 너희를 지키는 대가 아닌가.”

그의 말에 사람들이 목을 감싸 쥐고 소스라치며 몸을 움츠렸다. 고개를 땅에 대고 벌벌 떨기만 하는 자도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개를 들지도, 비명을 뱉으려 하지도 않는 자도 있었다. 단 한 사람의, 젊은 궁인이었다.

하신후는 그 젊은 궁인을 시켜 의술사를 불러오라 일렀다.

사람들은 잠시 소리를 빼앗긴 채로 겁에 질려 있다가, 점차 두려움에 짓눌려 잠잠해졌다.

북왕 하신후나 황제 하을령은 이 제국에서 기실 무슨 죄를 짓든 저희의 죄를 눈감으라 명할 필요조차 없이 모두의 섬김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백성의 사랑이나 존경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백성이 그들 없이 이 제국의 땅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저 적을 죽일 강한 검인 것이 아니라, 그 몸에 깃든 신과 같은 힘으로 이 땅이 부토처럼 요마와 재해로 인해 폐허가 되는 것을 막는 방패였다. 그것이 하신후가 자신들이 아니면 누구도 자신들과 같은 일을 이어 할 수 없으리라 말한 까닭이었다.

만일 하신후나 하을령이 그 절대적인 지위에 기대어 패악을 부리려 했다면, 사람들은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그 패악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그들이 없으면 이 땅은 삽시간에 부토와 다름없어질 터이니, 부토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은 그저 이 신과 같은 자들이 부디 패악을 떨지 않으며 영생하기를 소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하신후는 지난 수백 년 간 딱히 누리길 기꺼워해 본 적 없는 자신의 전능함을 얼마든지 증명해 보일 생각이었다.

가장 껄끄러운 존재인 하을령에게마저 향후의 행보를 선포한 터였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연을 데리고 의술사를 만났다. 젊은 궁인과 의원 하나를 제외하곤 성안의 누구도 말을 할 목소리를 되돌려 받지 못한 채였으므로, 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했다.

의술사는 그를 거의 쳐다보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면서 그의 손목을 치료했다. 겁에 질린 태도와 달리 치유술은 멀쩡하게 발현되었다.

연은 하신후의 손목이 본래대로 말끔해지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의술사가 물러가자 연은 냉큼 하신후의 손목을 양손으로 쥐었다.

“나도 의술을 배우고 싶어.”

손목을 만지작거리자니, 서늘한 살갗의 감촉이 좋았다. 두근두근하며 그의 맥이 뛰는 것이 전해져 왔다.

“용의 산에서는 내내 신전에서 남들이 시키는 것만 배웠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가 배우고 싶은 걸 배울 거야.”“그건 좋은 생각이군.”하신후는 부드럽게 수긍하다가 약간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물론 의술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는 자들이 따로 있긴 한데….”

“그건 나도 알아. 한데 나는 사람이 아니니,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나의 신력은 너희와 달라. 사람처럼 기질이 정해진 게 아니니까. 그래서 하을령과 있을 때도….”연은 말을 뱉다가 멈칫했다. 그의 손목도 고쳤으니, 이제 이 얘길 나눌 때가 된 것 같았다. 그와 하을령의 기억이 뒤섞여 빚어낸 그 장면에 대해서 말해야 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생각을 가다듬었으니 이젠 충분히 말할 때가 되었다.

그 장면을 보고서 연에게 찾아든 날 선 추측에 대해 말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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