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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11)화 (111/122)

111

기쁜 건 기쁜 거고, 다친 건 다친 거였다.

연은 잠깐 하신후의 기세에 휘말려, 그대로 풀숲에서 무슨 짓이든 진도를 나갈 뻔했다. 인기척이라곤 찾으래야 찾을 수 없는 외딴 산지였고, 이리 온전하게 둘뿐이 되었으니 무슨 짓을 저질러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게다가 하을령에게 있는 그대로 둘의 관계를 털어놓았다는 게 불안했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기분에 취하여 정말로 다친 사람과 그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좀 더 신중해야 했다. 어떤 정신으로 수풀을 빠져나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연은 하신후의 다치지 않은 팔을 덥석 쥐고, 끌고 어떻게든 길이 있을 법한 곳으로 끌고 나왔다.

“나는 그리 급하지 않은데.”

그가 샐샐 웃으며 헛소리를 했으나, 귀담아들어서는 아니 되었다.

“너는 이대로 인가로 나가면, 너는 나를 의원으로 데리고 가 치료한 뒤, 월을 찾든 을령을 찾든 일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닌가? 둘 중 누굴 만나든 한동안은 둘이서 오붓이 있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지금 오붓이 있을 때는 아, 아니지요, 전하.”

“그런가요?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막, 이 제국과 부토의 사인국의 명운을 걸고 중대한 정략혼을 결정한 참 아닙니까. 정략혼 말입니다.”하신후의 께느른하게 들릴 만큼 나긋나긋한 음성이 연의 귓가를 들척거리며 파고들었다. 그가 연이 붙잡고 있던 팔을 빼낸 하신후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마디가 진 기다란 손가락이, 그에 비해 훨씬 가녀린 연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의 엄지가 손등을 부드럽게 쓰니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으나, 한편으로 추파가 역력한 손길이 정말이지 상황의 긴박함을 잊은 것처럼 느껴졌다. 절대로 거기 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연의 발걸음에는 절로 힘이 들어갔다.

길을 찾기 위해 기감을 넓게 펼치자, 곧 희미하게나마 사람이 지나간 기운이 느껴지는 길이 감지됐다. 그녀는 암말 없이 하신후를 그쪽으로 이끌었다.

그는 타박타박 따라오면서도 연신 연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살살 간질였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위기감마저 상실한 것인가.

그야 연도 물론 기쁘기는 했다.

‘혼인이라니, 정략혼이라고 하니까 약간 명분도 있어 보이고… 그래, 내 신분에 전쟁을 치를 게 아니라면 정략혼을 하지 못할 게 뭐야. 용이라고 해서 사람과 혼인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연은 열심히 혼인의 명분을 궁리해냈다.

아니, 실은 궁리할 필요도 없었다. 여러 상황을 따져보았을 때, 진정으로 사인들을 위하는 길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유지하며 제국의 입장을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지난 백오십 년 동안 제국의 사람처럼 살아왔다. 차별을 받으면서도, 성실히 제국에서의 삶을 구축했다. 리경과 다홍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리경은 진심을 다해 말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휘하며 제국의 술사로서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리경을 비롯하여 제국에서의 꿈을 쌓던, 사인들이 한순간에 생의 전부를 잃을 것이다. 누구도 그리 쉽게 다른 이의 삶을 망가트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신이 거짓으로든, 진실로든, 사인에게 신이자 군주라고 불린 적 있는 만큼 연은, 자신은 더욱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명분이 필요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연이 현실을 직시하며 얻은 깨달음이었다.

용은 존귀한 존재라는 긍지는 변함없었으나, 이제는 이곳의 사인들이 그저 꼭두각시처럼 맹목적으로 신룡을 추종하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제국에서 그들은 저마다의 삶을 가지게 되었다.

“연아, 이젠 이곳이 어딘지 알 것 같다. 여긴 삼진이 아니라 삼강 직전의 땅이로구나.”“삼강?”

연이 그를 돌아보았다. 하신후는 약간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삼강이라니, 더 먼 곳이라면 좋았을 것을.”“응? 삼강이라면 괜찮은 거 같은데… 아까 분명 삼강에서 월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고….”연이 의아해하며 중얼거리자 하신후가 슬쩍 시선을 피하면서 웅얼거렸다.

“하루나 이틀쯤은 그대와 평온하게 보내고 싶었는데. 우린 지금 막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나.”

그거야 그렇다. 하을령과의 만남 끝에 남은 건,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긴 하나, 자신과 하신후의 정략혼이었다. 솔직히 연의 머릿속에도 생각이 가득했다. 갑자기 등장한 혼인 이야기 때문에, 월에 대한 생각마저도 잠깐 잊혀질 정도였다. 하기야 그게 어디 보통 일인가. 그러나 연은 흠칫 또다시 휘말릴 뻔한 자신을 다잡으며, 잡은 손을 휙휙 흔들었다.“아냐. 내 꿈에 월이 멋대로 드나든 걸 벌써 잊었어?”

“…그건 ….”“그것 때문에 내게 그렇게 화가 난 척을 했으면서.”“척이라니, 연아. 너무하는 걸.”그가 애교 있게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솔길을 집어삼킬 듯, 무섭게 키가 큰 나무들 새로 새어든 햇살이 새어들어 그의 옆얼굴을 비췄다. 햇볕이 닿은 검은 듯 오묘한 빛의 눈동자는 투명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이를 어쩌지. 나도 내가 이리 굴면 안 되는 때라는 것은 아는데, 나를 내 마음대로 억누를 수가 없으니.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군.”

그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그대와 함께 을령을 만나고, 이리 혼약을 하게 되다니. 즐거울 일이라고는 없이 길기만 하던 나의 지난 생이, 실은 지금을 위해 그리 어두웠던가 싶어.”그는 정말로 기분이 좋다는 듯 웃고 있었다. 연은 그가 하는 말이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신우의 말대로 그들은 이제 막 그의 혈육을 만나 자신들의 사랑을 고하고 혼약까지 알린 참이다. 하나 다시 말해 그것은 그 혈육이 분노하여 그들을 뒤쫓을 것임을 뜻했고, 제국의 두 기둥인 황제와 북왕이 분열한 상태에서 월의 위협이 그들을 덮쳐올 것임을 뜻했다.

무엇 하나 순탄한 것이 없었으나, 연은 그럼에도 결국 그를 따라 눈을 휘어 웃어버리고 말았다.

“즐거울 일 없이 길기만 한 생이라니, 자기 삶을 너무 낮잡아 말하네.”“나는 진심이다.”

“알고 있어. 내가 느끼기에도 넌 처음부터 별로 행복해 보이진 않았으니까. 너처럼 고운 사내가 왜 그렇게 세상에 재미있는 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건지 이상했지. 내가 너라면 거울에 자기 얼굴만 비춰 봐도 재밌었을 것 같은데.”그가 조금 앓는 듯한 소리로 낮게 웃음을 흘렸다. 으음, 하는 침음이 섞인 웃음에 연은 불쑥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네가 고와 보이는 건 네 생김이 뛰어난 까닭이기도 하지만, 너에게 기나긴 시간이었던 지난 사백 해를 용케도 타락하지 않고 잘 견뎌온 탓이기도 하겠지.”“…….”“너처럼 명민하고 강한 인간이, 이유 없이 남을 해치지도, 탐욕에 사로잡히지도 않고, 긴긴 세월을 그저 자기 본분을 지키는 데만 바치며 지내온 것 아닌가. 나는 그런 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밖에는 할 수 없는데. 그 짐작만으로도 약간 지치는 기분이야.”연은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백오십 년 정도 인간 모습으로 살았고, 그 이전에는 아마도 용의 산의 많은 알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은데… 알이라 해도 눈으로 보기엔 그저 조금 둥근 돌처럼 보일 정도이고, 그러니 나는 인간 세상에 깨어나기 전엔 그저 돌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

이런 이야기는 연도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그저 거기 쌓인 많은 돌 모양의 알 중 하나, 아니, 심지어 눈으로 보기엔 그저 돌일 뿐인 존재였다니. 존귀한 신룡의 근원으로는 영 밋밋한 이야기가 아닌가.

“나를 깨운 사람들은, 나를 둘러싸고 일 년 정도 기도를 올렸다던데. 실은 그 기도가 들려온 기억이 조금 남아 있어. 아마도 내가 가진 최초의 기억일 거야. 고작 일 년의 시간이지만, 내게 뭘 해달라고 졸라 대는 소리를 그저 하염없이 듣고 있어야 했어. 기분 좋은 기억은 아니지. 한데 너는 북왕이라는 네 자리에서, 무려 수백 년을 애원하는 자들에게 응해 가며 견뎌 온 거잖아?”

연은 그건 참으로 즐겁지만은 않은 일일 거라는 듯 눈을 찡그렸다.

차라리 알에서 깨어난 뒤로는, 자신이 신룡이라는 자각을 하며 어떤 긍지에 기대어 상황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용 특유의 그 대단한 긍지마저 없던 일 년, 그저 알인 채로 낯선 사람들의 독한 소망들을 견뎌야 했던 기억은 그저 거대한 고독이었다.

수백 년에 비하면, 자신과 하신후가 함께한 시간은 찰나의 순간처럼 짧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곁에서 본 하신후는 북왕의 책무 외엔 자기 마음을 진정으로 준 곳 없는, 나른한 태도 뒤에 만년설 같은 고독을 방치해 둔 자였다.

그는 용이 아니었기에, 용과 같은 긍지가 없었다.

진심으로 그를 아끼기에 연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혼 안쪽에 고여든 건, 지울 수 없는 어두운 기억들뿐이었다. 그 기억들이 만든 폐허 위에서, 북왕의 책무가 그의 생을 고요히 지탱하는 중이었다.

“너랑 혼인하면 너를 이전처럼 두진 않을 거야.”연은 하신후의 옆얼굴을 가만히 만져 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손을 거두니, 그는 귓가가 붉어진 채로 연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신후의 표정이 아이 같았다. 사백 년 넘게 산 늙은 자 같지 않았다. 그저 마음에 인 풍파에 잠시 말문이 막힌 소년 같았다.

“자, 가자.”

연은 다시 그의 다치지 않은 팔의 손을 겹쳐 잡고 길을 앞장섰다.

연이 여기까지 오며 자신의 이동술로 여기까지 하신후를 한 번에 옮겨버린 것처럼, 그도 마음만 먹는다면 연을 단숨에 인가까지 옮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연처럼 술법에 서툴지 않으니, 그가 이동술을 부리는 게 인가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일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는 연이 신룡이 아닌 그저 평범한 술사라 우겼으니, 평범한 술사의 몸으로는 버텨내기 어려운 술법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쉽게 목적지로 데려다줄 술법을 제쳐두고, 이리 둘이서 이 길을 걷는 것은, 그저 연이 그 점을 짚지 않고 잠자코 걷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신후는 혼인 이야기가 오고 간 뒤로 영 평소와 달랐다. 아마 혼인에 대해 곱씹느라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연은 지금 이렇게 걸을 필요 없단 사실을 알아챌 만한 정신은 남아 있었다.

‘빨리 가서 팔목을 고쳐 줘야 하는데. 그런데도 굳이 이 길을 잠시 더 걷고 싶은 건… 나의 이기로구나.’

연은 결국, 오솔길이 끝날 때까지만 잠깐 이동술 얘길 꺼내기를 미루기로 했다. 아름다운 산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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