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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모든 말들이 실은 정곡을 찌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가엾은 오라비는 너무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마음을 내주지 않다가, 그간 울린 모든 상대의 저주를 받은 듯이 최악의 상대에게 반한 것이다.
곰팡이 피도록 오래 방치한 아랫도리 덕분에 기어이 머릿속까지 곰팡이가 피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하을령이 얼이 빠져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사이, 하신후는 또다시 그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만 가보마. 다음에 네가 조금 더 진정되면 다시 이야길 나누는 게 좋겠다. 나는 사랑 때문에 눈이 먼 게 사실이지만, 네가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게 제국에게도 나쁜 얘기가 아니란 걸 알 거다.”
“…나쁜 얘기가 아니라고?”
“연은 월의 적이다. 그리고 우리의 적 역시 월이지. 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건 제국의 앞날에 나쁜 일이 아니야.”
그는 충고하듯 하을령에게 담담히 말을 뱉었다. 그러나 하을령은 자신에게 흘러드는 그 말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신후가 얼빠진 하을령의 얼굴을 잠깐 보다가 떠나려는 듯한 기색을 보인 순간이었다.
갑자기 하을령에게서 화염 같은 기운이 솟구쳤다. 하신후조차 예상하지 못한 듯 흠칫하는 순간, 하을령의 끓어오르는 불길 같은 살기가 하신후를 덮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하신후가 머뭇거리는 동시에 하을령의 광기 어린 중얼거림이 살의처럼 흘러나왔다.
“나쁜 얘기가 아니라니, 아니지, 아니지, 오빠, 이건 나쁜 얘기야. 제국은 지금 어마어마한 위기에 처했어. 월보다도 더 나쁜 위기야. 제국의 창이자 방패인 북왕 하신후가 적의 수장의 사특한 이능에 홀려 긍지를 잃었으니 이보다 더 위험한 일이 어디 있겠어.”
하신후가 인상을 구기며 하을령의 기운을 파훼하려는 순간, 붉은 신력의 불길 가운데서 돌연 화염 그 자체로 이루어진 환한 손이 그의 몸을 결박했다.
“윽-.”
하신후에게서 낮은 신음이 뱉어졌다. 정령의 손아귀가 그를 불태울 듯 옥죄며 옷깃을 파고들었다.
하을령의 진의가 담긴 공격이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발이 붙들린 하신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으로 연을 감추듯 감쌌다.
연은 그의 손에 감싸인 채로도 일렁거리는 하을령의 신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건가? 지금 당장 연이 나서서 이 정령을 막아야 하나? 순식간에 붉은 불길이 눈 앞을 가릴 듯할 때였다.
‘흣, 뭐지…?’
연은 환영을 보았다. 불길 가운데 그녀의 혼을 파고드는 기묘한 기억의 조각이었다. 연은 하신후의 손에 감추어진 그대로, 돌연 보일 리 없는 풍경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몸은 여기 있는데 그녀의 눈은 기억의 급류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마치 정신을 잃은 채 연이 자신의 숨겨진 과거를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그때는 월이 감췄던 기억을 돌려받았던 것이었는데… 이건 대체 뭐지?
연은 밀려드는 환영과 더불어 일렁이는 어지럼증에 콱 눈을 감았다. 울컥, 입안에 피 맛이 감도는 듯도 했다.
그리고 아릿한 통증과 함께 누군가의 형체가 또렷해졌다.
* * *
숲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누덕누덕 기워져 만들어진 듯한 숲은, 추위와 습기로 얼룩져 한층 기괴하고 음산했다. 그 음습함 가운데 숲의 다른 빛깔과는 어울리지 않는 붉은 화염이 타오르는 곳이 있었다.
그것은 하을령의 불이었다.
하을령은 검고 곱슬거리는 긴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너덜거리는 옷소매를 접어 올렸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검을 고쳐 쥐며 저만치 앞에 선 사내를 응시했다.
“이제 곧 끝날 겁니다. 저자도 한계에 몰렸어요.”
그녀의 귓가에서 익숙한 음성이 속삭여왔다. 말해주지 않아도 아는 사실을 굳이 소리 내어 읊어 주며 쓸데없이 친절을 베푸는 이, 그는 권윤이었다.
권윤의 상냥하고 온순한 흑갈색 눈동자에 그림자가 스며 있었다. 그는 지쳤고 떨고 있었으나 그 사실을 숨기려 애쓰는 중이었다.
하을령은 권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서 그저 월만을 바라보았다. 권윤의 말대로 월은 오늘 여기서 죽게 되리라.
하을령은 사납게 허공에 검을 그었다. 검에 묻은 검은 피와 체액이 점점이 흩뿌려졌다. 월이 불러들인 요마 떼의 것이자, 월의 피였다.
대충 접어 올렸던 하을령의 옷소매가 주인의 기세를 이기지 못한 듯 다시 흘러내리려 들었다. 곁에 붙어서 숨을 죽이고 있던 권윤이, 습관처럼 허리를 숙여 하을령의 소매를 공손히 접어 올렸다.
“이제 곧 끝날 거예요. 조금만 더 버티시면-.”
“알고 있어, 시끄러워.”
하을령의 나직한 뇌까림에 권윤이 입을 다물었다.
“네가 겁먹었다는 걸 내게 알려주고 싶기라도 한 거냐? 그게 아니라면 정신 사나우니까 조용히-.”
낮게 으르던 하을령의 말이 그치기도 전에, 멀찍이서 월이 비틀거리며 한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하을령의 전신에 긴장이 감돌았다.
한계에 몰린 건 하을령이 아니라 월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눈 한 번 깜빡이기가 어려웠다. 월은 위험하다. 단 한 번 긴장을 놓는 순간, 저자의 울부짖음으로 땅이 찢길 것이다.
월의 이능은 산 자의 혼을 제물로 삼는 것이다.
그는 제물을 취할수록 강해진다. 그의 제물이 된 자는 꼭두각시로 부려지다가 망가지면 그에게 식량처럼 취해진다.
이 주위의 모든 요마는 이미 월에게 혼이 바쳐진 제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죽었다.
하니 이제 남은 것은 월뿐이다.
그도 죽을 것이다.
하을령은 힐끗, 저만치 떨어져 선 사내의 기색을 살폈다. 얼굴은 닮지 않았으나 목덜미에서 조금 흘러내린 머리칼이 새카만 빛깔로 곱슬곱슬하다는 것만큼은 똑같은 사내였다. 사내는 그녀의 하나뿐인 오라비였고, 하을령은 알고 있었다.
오라비 하신후가 월을 죽이리라. 그것은 바로 오늘 벌어질 일이었다.
하신후는 지금껏 하고자 한 일에 실패한 적이 없다. 그가 오늘 월을 도륙하겠노라 말했으니, 그 일은 지켜질 터였다. 지긋지긋한 회운성을 떠나 이 전쟁에 나선 이후, 하신후는 이루고자 한 죽음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깃든 것은 무한한 믿음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신후의 다음 움직임으로 현실이 되었다. 하신후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죽어가는 짐승의 목덜미를 맨손으로 움켜쥐었다.
검이 듣지 않는 거죽을 지닌 짐승이니, 우선은 손으로 저 껍질을 뜯어내야 한다. 하신후의 손이 거침없이 으득거리며 월의 거죽을 짓이겨 벗겨냈다.
검은 피가 왈칵왈칵 토해져 나왔다. 팔 한쪽이 짐승이었던 본래의 거대한 형상에서 미처 돌아오지 못해, 아직 사람의 꼴이 아니었다. 검고 흉악한 발톱이 땅을 파고들며 몸부림쳤다. 대지를 휘감은 하신후의 흉포한 신력이 그 거대한 팔을 휘감아 결박하고 있었다.
월이 비명을 토했다. 그 꺼져 가는 울부짖음에 이미 엉망이 된 땅이 다시 흔들렸다.
죽어가는 월이 사람도 짐승도 아닌 꼴을 하고 있듯, 하신후는 악귀의 꼴을 한 채였다. 그는 무표정하게 월의 가슴 거죽을 벗겼다.
찢어 발겨진 살점이 풀숲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괜찮을 거예요. 도련님께서는 성공하실 겁니다.”
“나도 도와야겠-.”
“아니요!”
권윤이 하을령의 팔을 껴 안 듯 붙잡았다. 그의 몸이 떨고 있었다. 하을령은 멈칫 그를 돌아보았다.
“도련님 혼자서도 하실 수 있어요. 아가씨는 가지 마세요. 저자에게, 저 괴물에게 가까이 가지 마세요. 이미 다치셨습니다. 이미 다치셨기 때문에, 아가씨는-. 저는-.”
권윤의 더듬거림에 하을령이 비틀, 한 발을 휘청이며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다 뜯기고 휘어진 갑주 아래로, 그녀의 복부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용의 모습으로 돌아갔던 월의 발톱 파편이 하을령의 옆구리에 아직도 꽂혀 있었다.
걸음을 떼면 피가 쏟아질 것이다.
하을령이 비틀거리자 권윤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을 겁니다. 도련님께서 임무를 끝마치시면 우리 모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어요. 오늘이 바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오늘은 저 짐승을 죽이는 날이다.”
“그래요, 오늘이 바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에요. 아가씨께서는 무사히 회복하실 겁니다.”
권윤의 눈길은 오롯이 하을령의 상처에 붙박여 있었다. 하을령은 그를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월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느새 하신후는 검을 든 채였다. 한 발로 월의 복부를 짓밟고 서서, 검을 들어 올려 자신이 거죽을 벗겨 뼈가 드러난 가슴에 가져갔다.
쿠지이익-.
느리고 무딘 소리를 내며 하신후의 육중한 검이 월의 가슴에 꽂혀 들어갔다. 심장을 찌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