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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신후는 말없이 하을령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을령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뱉었다.
“내 오라비 하신후는 심심할 정도로 전쟁 말고 딴 데는 관심 없는 인간이었지. 어렸을 때부터 그랬어. 권력을 잡고, 적을 멸하는 것. 전쟁이 일어나 옛 황실의 전원이 월의 손에 죽고 나니, 댁은 오히려 돌아가는 상황을 기꺼워하는 듯 보였지. 그때부터 나는 알고 있었어. 황가의 피라곤 섞이지 않은 하 씨 가문의 일원인 하신후가 그나마 원하는 게 뭔지. 저 따분할 정도로 냉막한 인간이 원하는 거라곤 옥좌 하나 정도라는 걸 알고 있었지.”
“…….”
“그런데 이제 와서, 그 긴긴 세월 동안 정치나 전쟁 말고는 관심 없는 듯 굴던 오만한 자가, 적에게 눈이 멀어 옥좌까지 포기하겠다고? 월을 죽이면 드디어 사백 년간 바라던 것을 손에 넣게 되었는데도?”
하을령이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릿속이 뭉그러지고 있는 듯한 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하신후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답했다.
“네가 옥좌에 앉아 있는 게 질렸다면, 억지로 계속하라 시키진 않으마. 한데 이 제국엔 너나 나 말고 딱히 우리가 하던 것을 이어 할 수 있는 자가 없지. 그러니 네가 내게 옥좌를 넘기고 싶다면 이제 두 가지를 해결해야 할 거다. 하나는 전과 다름없이 월이고, 다른 하나는 용과 혼인한 귀족을 황위에 올리려 하면 생길 백성의 반감이지.”
“…뭐? 지금 혼인이라 했어?”
“그래. 당연한 얘기 아닌가.”
하을령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너무 놀라 솔직한 반응을 숨길 여력조차 없는 듯했다.
“미쳤군, 미쳤어!”
혼인이라면 그저 연애놀음과는 다르다. 사백 년 넘도록 혼담을 고사해온 하신후였다. 만약 그가 뜻을 달리해 누구하고든 혼사를 치렀다면, 제국의 권력 구도는 지금과 판이하게 달라졌을 리라.
누구든 그와 혼인하는 이의 가문은 제국 제일의 권세를 거머쥐게 될 터이다. 용의 정인이 되겠다는 것과, 용과 혼인하겠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하신후가 황제가 되면 적의 수장이었던 자가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것 아닌가.
“그럼 용을 화, 황후로 삼겠다고?”
터무니없는 소리이니 입에 담고 싶지조차 않았으나, 하을령은 저도 모르게 기가 막혀 묻고 말았다. 그게 어디 말이나 될 이야기인가.
그러나 돌아온 답은 더욱 터무니없었다.
하신후는 다친 손목이 조금 아프긴 한지 손목을 다시 까딱거리더니 태연히 답했다.
“황후로 삼다니. 그럴 리가.”
“그래, 역시 그건-.”
“만약 네가 내게 정말로 옥좌를 넘겨 내가 황위에 오른다면, 공동 통치를 해야겠지. 제국은 사인들과의 문제로 오래 골치를 앓아 왔으니 공동 통치는 좋은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거다. 사인은 수가 적어도 영력을 다루는데 뛰어나 강한 병사가 되기 쉽지. 그들이 위협이 되는 걸 막을 좋은 방도 아니냐.”
“…그 무슨, 헛된 소리를!”
“헛된 소리가 아니다. 내가 그리하고자 한다면 그리될 거다.”
하을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새하얗게 변하다 못해 새파래지기까지 했다. 그러다 천천히 붉으락푸르락 낯빛이 변했다.
공동 통치는 말 그대로 두 명의 황제가 생기는 것을 뜻한다. 이 미친 오라비의 머릿속에는 대체 무슨 생각이 든 것인가.
하을령의 표정이 일그러지다 못해 넋을 잃은 듯하게 변했으나, 하신후는 그러거나 말거나 태평하게 자기 생각에 빠져 있었다.
“용은 긍지가 강해 누굴 섬기는 걸 못 한다던데. 황후로 삼다니, 내 여인은 사인의 신이니 고작 황후 자리는 어울리지 않겠지.”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빙긋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나도 혼담이라니, 차마 섣부르게 입에 담지 못한 일이었으나… 나는 내 계획이 마음에 드는군. 연이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거다.”
“…누구 마음대로-.”
“네가 그렇게 하기 싫다면 지금처럼 네가 황제 자리를 지키면 되는 것 아니냐.”
하신후가 픽 웃는 얼굴로 하을령을 마주했다.
얼간이 같기도 하고, 소름 끼칠 정도로 차분한 듯도 한 얼굴이었다. 하을령은 기가 질려 눈앞의 낯선 사내를 노려보았다.
이 자는 그녀가 지금까지 알아 온 오라비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미친 사랑놀음에 눈이 멀고 혼이 멀어 돌아버린 자였다.
그는 지금 담담하게 그녀를 협박 중이었다.
황제가 되면 용과 공동 통치를 하겠다니, 그것은 하을령에게 영원히 스스로 황위에 앉아 있으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이 헛소리까지 듣고 나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하신후는 정말로 더 이상 황위에 오르는 데 미련이 없어 보였다. 대체 어느 틈에 마음을 그렇게까지 정리한 것인가.
대체 어느 틈에 이 모든 사달이 났단 말인가.
대체 어쩌자고, 그 백룡이 대체 무엇이기에.
하을령은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하신후가 사인 계집 둘을 끼고 논다는 흉한 소문을 들었던 것이 삼진에서였다.
그래, 그때부터 뭔가 이상한 기미가 있기는 했다. 자기 외모 이야기라면 질색을 하던 하신후가, 돌연 실실 웃으며 자신에게 잘생겼다 하는 자가 있다고 지껄이지 않았던가.
그때는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겼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어쩐지 그날의 그 얼굴이 신경에 거슬렸다.
평소라면 하신후는 그에게 외모를 칭찬해 오는 상대를 곱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첨을 떨려 그런 말 한 것이라면 일주일은 말소리를 앗는 벌을 내렸을 터이고, 그저 그에게 반해서 칭찬하고 만 것이라면 사흘은 시력을 앗는 벌을 내렸을 것이다.
함부로 아첨을 떠는 자는 말을 조심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함부로 외모에만 눈이 머는 자는 눈에 보이는 것의 허망함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그 벌에 가져다 붙이는 핑계였으나, 하을령은 알고 있었다.
하신후는 그저 어릴 때부터 외모 칭찬이라면 질색하고 싫어했었다. 그들의 아비가 하신후의 용모와 자질을 두루 시기했을 때부터 줄곧 그러했다.
그런 하신후가 잘생겼다는 말을 듣고 흡족해 웃은 것 아닌가. 그때, 삼진에서 말이다. 그날은 그저 오라비가 냉소를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제게만 농을 치는 것이리라 여겼다.
그러나 돌이켜 모든 사실을 알고 나니, 이제는 분명했다. 그때 그는 이미 그 백룡과 수작질을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틀림없이 하신후의 용모를 두고 좋은 말을 지껄인 것은 그 여인이리라. 연이라 하는, 인간조차 아닌 짐승!
하을령은 기가 차다 못해 노기로 두 눈이 충혈되기까지 했다. 이러다 미친 오라비 때문에 두 눈이 노기를 못 이겨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믿어지지 않아. 네놈이 보낸 안홍이라는 자의 말대로라면 그 백룡은 사특한 이능을 지녀 보는 자를 혹하게 만드는 여인이라지. 혹시 오빠가 잠시 방심한 틈에 그 이능에 당해 이러는 것은 아닌지-.”
“그렇지 않아.”
하신후가 다친 손목 아래로 거침없이 옷자락을 내려 보였다. 그러자 피딱지가 앉은 글자 모양의 상처들이 드러났다.
하을령의 눈이 일그러지며 커졌다.
“나는 처음 본 순간부터 그 여인이 마음에 들었고, 그때 연은 이능 따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지금도 오히려 그 빌어먹을 능력 때문에 겁을 먹고 내게서 달아나려 들지.”
“그걸 믿는다고?”
그 말에 하신후가 갑자기 낮게 웃음을 뱉었다. 살벌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진심 어린 미소였다.
“그 여인이 말해서 믿는 게 아니야. 연은 아는 게 별로 없거든.”
마치 떠올린 상대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하을령은 눈앞에서 그 꼴을 보고도, 두 귀로 그 음성을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눈앞의 이 얼빠진 사내는 누구인가. 정녕 그 오랜 시간 동안 알아 온 제 오라비가 맞단 말인가.
하신후가 지금까지의 모든 말을 진심으로 지껄인 것이라는 것이 비로소 또렷하게 느껴졌다. 기가 막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지금 하신후의 모든 고백에는 아무런 꿍꿍이도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황제가 된다면 용과 공동 통치를 할 계획이다. 아니, 그보다 앞서 진심으로 용과 혼인할 생각이다. 심지어 그는 그 계획을 입에 담으며 조금 부끄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남들이 보면 그저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라 여길지도 모르나, 하을령은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자는 진심으로 사랑에 빠져 광증에 가까운 감정에 놀아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가 사백 년 넘는 세월 동안 처음으로 갖게 된 연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