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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06)화 (106/122)

106

하신후와 하을령이 뒤엉킨 순간, 연도 덩달아 그 충격을 감당해야 했다. 그나마 하신후가 연을 손으로 감싸고 있어 나동그라지거나 품에서 떨궈지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연은 기겁했다.

이렇게 다짜고짜 싸움이 날 줄은 몰랐다. 원래 남매는 다 이런 건가? 인간들과 이리 엮이는 게 처음이니 다른 인간들도 다 이런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들은 혈육이고, 게다가 여긴 다른 백성들까지 휘말리기 십상인 뱃길의 하늘 아닌가.

“너는 저 아래 창생이 어찌 되든 좋은 거냐.”

다행히 하신후에게도 아직 생각이랄 만한 것이 남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하을령을 힐난했다.

그 와중에 그의 손길이 연을 한번 가벼이 다독였다. 하을령의 시선이 미처 닿지 않은 순간이었다.

하을령은 자신이 만들어낸 찢긴 듯한 하늘길과 야단법석이 난 바다를 힐끗 보더니 퉷, 하고 하신후 쪽에 침을 뱉었다. 보면 볼수록 하신후와 닮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분위기로 기세가 대단한 여인이었다. 형형하고 새카만 빛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는 하신후를 물어뜯어 숨통을 찢어발기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 살기가 어찌나 대단한지 연은 저절로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어쩐지 가끔 하신후가 이리 대단한 재능과 수려한 용모를 겸비한 것치고 너무 순한 성품을 지닌 것 같을 때가 있었다. 뭐랄까, 남들이 그에 대해 떠드는 것에 비해서는 훨씬 점잖다 못해 어딘가 풀이 좀 죽은 듯 느껴지기까지 하는 구석이 있었다고나 할까.

이제 보니 저 동생의 기세가 너무도 흉포하여 그리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을령은 딱 봐도 남을 놀리고 비웃는데 도가 튼 자 같았다. 그녀에 비해, 연이 보아 온 하신후는 남을 비웃는데 의욕을 불태우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밍밍한 자였다.

‘나 때문에 이러다 여동생에게 맞아 죽는 건 아니겠지?’

연은 저도 모르게 걱정이 되어 가슴을 졸였다. 하신후가 강한 건 사실이지만, 하을령도 강하지 않겠는가.

‘여차하면 내가 나서서 지, 지켜주기라도 해야 하나?’

연이 그렇게 걱정하며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을령의 육신이 사라졌다.

흠칫하는 찰나에 그녀는 다시금 하신후를 찍어누를 듯 덮쳐왔다. 그 대단한 일격을 따라 파지직거리는 화염 같은 신력이 대기를 갈랐다. 하을령의 손이 그의 얼굴을 짓뭉개기 직전, 하신후의 형상이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뒤쪽에 나타난 그가 못마땅하게 동생을 노려보았다. 하을령은 약간 창백해진 하신후의 얼굴을 비아냥 가득한 눈초리로 흘기며, 곧바로 다음 일격을 날렸다. 주먹이, 다음에는 발이 마구잡이로 날아들었다.

“이 머저리! 고작 원수에게 몸을 바치려고 사백 년간 반동정으로 지내온 거냐?”

“…….”

“그러게 내가 진작에! 제대로 된 애인을 만들라고! 그렇게! 일렀거늘!”

“…….”

“이제는 스스로 무슨 술수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그토록 위험한 재주를 가진 짐승에게! 제대로 돌은 게지! 너무 오래 아랫도리를 곰팡내 나게 두는 바람에 기어이-!”

“그 입 다물어!”

하을령의 비린 이죽거림을 하신후의 일갈이 성마르게 동강 냈다. 그 와중에도 내리치고 피하며 옥신각신하는 둘의 싸움은 그치질 않았다.

“헛소리 그만해라.”

하신후가 날아드는 하을령의 주먹을 낚아채 멈추며 짜증스럽게 으르렁거렸다.

“네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아는 거냐. 어째 네 말버릇은 어린 시절에서 발전이 없구나.”

하을령은 멈칫 붙들린 주먹을 빼낼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희미하지만 하신후의 두 귀가 붉어져 있는 걸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 비웃음과 사나움이 뒤섞인 헛웃음이 터져 나오듯 번졌다. 하을령은 새카만 눈동자를 무섭게 빛내며 살기등등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허, 뭐지? 오빠, 부끄럽기라도 한 거야? 사백 년간 반동정이었다는 말이 드디어 좀 부끄러워졌나 보지? 그야 그렇겠지. 댁이 장기 말로 쓸 상대가 아닌 여인을 가까이해본 적이 있기나 해? 그 긴 세월 어디 남과 입술이나 제대로 맞대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인데!”

한껏 이죽거리며 하을령이 사납게 붙들렸던 주먹을 거두어들였다. 하신후는 구겨진 표정과 달리 그 손을 순순히 놓아 주었다.

“생각할수록 억울한걸. 댁이 댁 좋다던 여인들 눈에서 눈물 뺀 대가를 왜 이 제국이 같이 치러야 하지?”

“그게 무슨 소리냐.”

“그렇잖아. 대충 아무 여인이나 정을 붙이고 적당하게 연애 놀음을 했더라면, 네가 지금처럼 기어이 잘못된 상대에게 눈이 돌진 않았겠지.”

하신후가 따분한 소리 지껄이지 말라는 듯 두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고작 그런 말이나 하려고 날 여기 잡아둘 셈이냐.”

하을령의 얼굴이 구겨졌다.

“무엄하군. 오빠가 마주하는 나는 황제야. 황제가 바른 말을 해주는 것이니 공손하게 들어야지. 오빠 같은 멍청이는 더더욱 그래야 하는 법이고.”

“네가 화난 건 이해한다.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을 이렇게 입 다물고 듣기만 했잖아. 내가 할 말은 이미 마쳤다. 나와 연은 함께할 거고,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그 뜻에는 변함이 없어. 내 결정으로 생겨날 다른 문제라면 차차 너와도 의논하도록 하겠다. 오늘은 이쯤 하는 게 어떠냐.”

하신후가 이미 하을령이 저지른 짓을 보여주듯, 자신의 너덜너덜해진 손목을 허공에 들어 보였다.

처음 하을령의 일격을 고스란히 받아낸 그의 손목이 검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하신후는 손목을 다친 직후 하을령의 목덜미를 내려쳤던 것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별다른 공격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그녀와 싸울 마음이 별로 없어 보였다. 이따금 하을령의 공격을 따라 난장판이 되어버린 하늘과 바다의 길에 눈길을 던질 따름이었다.

하을령은 하신후의 손목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피식 냉소했다.

“무슨 짓을 하든 뜻에 변함이 없다라. 참 담담하게도 그런 소릴 지껄이네. 댁은 역시 제정신이 아니야.”

“…….”

“오빠가 그 여인을 택한다면, 내가 자결하겠다고 해도?”

하신후의 한 쪽 눈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그는 눈썹을 비딱하게 비틀어 올리며 가볍게 헛웃음을 뱉었다. 딱히 차갑지도, 사납지도 않은 어처구니없음을 담고 있는 웃음이었다.

“울증을 치료받아야 할 때가 된 듯한데, 어의를 만나는 게 좋겠군.”

그는 건조하게 그 말을 뱉고서, 그때까지 내내 지그시 품의 어딘가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 품에 연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하을령이 기묘한 눈빛으로 그 행동을 주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신후는 빈손으로 태연히 부어오른 반대쪽 손목을 움켜쥐었다.

으득- 작은 소리가 오싹하게 이어졌다. 엇나가 있던 손목뼈를 대충 되돌려 넣기라도 하는 듯한 소리였다.

“나는 연과 함께 둘이서 움직일 계획이다.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월은 살아 있고, 돌아올 준비를 마쳤어. 나는 여길 떠나 삼강으로 갈 거다. 이 또한 이미 네게 전한 일이지.”

삼강은 삼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하는 북방의 또 다른 요지였다. 보다 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북에서 수도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그 삼강에서 월의 피가 퍼지고 있었다. 근본적으로는 삼진에서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피를 써서 그것에 노출된 자의 혼을 제물로 삼는 것이다.

제물이 된 자는 월의 꼭두각시가 된다.

지난 전쟁 때와 똑같은 짓의 반복이었다.

하신후는 다친 손목을 몇 번 까딱여 보더니 힐끗 눈을 들어 하을령을 보았다.

“오늘은 내 손목 하나 내준 걸로 충분할 듯한데. 이쯤하고 너도 부디 네 백성에게나 마음을 쓰는 게 좋겠다.”하신후가 눈짓으로 저 아래 난리가 난 배 몇 척을 가리켜 보였다. 배들은 때아닌 폭풍처럼 요동치는 바다에서 방향을 잃고 난파 직전에 내몰려 있었다.

돛대가 부러진 배도 있었다.

하을령의 눈길이 저 밑의 배들을 천천히 훑었다. 다시 눈을 들어 하신후를 보는 눈동자에 스민 것은 검은 슬픔이었다.

그녀가 길고 그르렁거리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부서지기 직전인 배들을 보니 하을령 역시 조금은 살의가 진정되는 듯했다.

“끝까지 내 백성이라고 지껄이는군. 내게 떠넘길 생각 마. 오빠 백성이잖아. 월을 죽이고 저주를 풀어 황위에 오른다. 그게 하신후가 가진 유일한 소망 아니었나? 대체 내 오빠는 어디로 가고 댁 같은 머저리가 나타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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