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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03)화 (103/122)

103

연은 자신이 납득한 일에 대해 계속 분해하는 성품이 아니었다. 연의 표정이 풀어지자 그녀의 노기를 따라 일렁거리던 공기 역시 가라앉았다.

이윽고 하신후가 무슨 수를 쓴 건지 손목을 감고 그에게로 연결된 실은 금세 보이지 않게 변했다. 미미하게 저릿한 느낌이 남기는 했으나 그마저도 이내 희미해졌다.

요리점을 나서며 연은 힐끗 그의 표정을 살폈다. 족쇄인지 팔찌인지 모를 이런 것까지 받아들여 주었건만, 그는 여전히 어딘가 마음이 상해 보였다.

하신후가 이렇게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늘 자기가 먼저 살살 웃으며 요망하게 굴던 자 아닌가.

문득 아까 하신후가 월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정신을 잃은 채 월의 이름을 중얼거렸었다니….

‘어쩐지 배에서 내가 깨어났을 때 하신후가 너무 침착해 보였어.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내 입술부터 탐하려던 자가, 깨어났을 땐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잖아. 대뜸 월에 대해 묻기부터 하고.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저 혼절한 연에게서 월의 기운이 느껴져 그의 수작을 알아챘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만 해도 불쾌한 위협이었을 것이다.

‘난 왜 계속 월의 이름을 불렀던 거지? 하필 이름이라니. 괜히 의미심장하게 들리잖아.’

돌이켜 볼수록, 하필 여인의 정체가 하신후였다는 걸 알아챈 순간 혼절해 버린 것이 슬슬 억울해졌다.

그 순간 그는 분명 연의 저주흔이 사라진 얼굴에 놀란 듯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놀라고 동요를 드러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니 연은 귀한 순간을 혼절로 놓쳐 버린 셈이었다.

게다가 입을 맞춘 뒤였다. 밀폐된 선실이었고, 옆에는 침상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혼절만 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그런 순간이었던 것도 같은데….

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라 생각을 그쳤다.

‘적어도 내 진짜 얼굴이 어떤지, 그 감상 정도는 제대로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월 때문에 심각한 얘기만 나누다가, 난 결국 울기만 했어.’

이제 와서 억울해해 봤자 어쩔 수 없었다.

월의 이름은 주위의 공기를 더럽히는 듯한 꺼림칙함이 있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더는 연 자신의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적과 사랑에 빠져 버린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은 배로 돌아가, 곧장 선실로 향했다. 어느새 해질녘이 되었으니, 뱃전으로 나가 바다에 노을이 번진 것을 구경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그보다는 하신후와 둘이 있고 싶었다.

연은 단둘이 되자 곧장 모습을 바꾸었다. 본모습으로 돌아오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슬슬 우락부락한 사내 모습을 하는 데 질린 걸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있을 때면 하신후도 여인 모습으로 변해 있는 점이 아쉬웠다.

연은 자신의 본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듯 멈춰 서 있는 그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아까 항구에 내리기 전에 분명 실컷 보았을 모습인데 새삼스러운 반응이었다.

“나도 네가 보고 싶어. 본모습으로 돌아와 줘.”

그 말에 거짓말처럼 여인의 형상이 흐려졌다. 주위 공기가 홀연히 일렁이더니, 하신후의 본모습이 나타났다.

연은 곤란할 정도로 수려한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일이면 삼진에 닿겠네. 오늘 이곳이 거쳐 가는 두 항구 중 마지막이었으니.”

하신후는 말없이 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시 보아도 아름답다는 칭찬이라도 한마디 건넬 줄 알았더니, 그저 침묵할 따름이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연이 가볍게 핀잔을 던지는 순간, 배가 출항하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한차례 갸우뚱했다. 주위에 가득하던 바다 냄새가 이내 더 짙어졌다.

하신후는 한참 만에 침묵을 깨며 침상 머리맡으로 다가섰다. 침상 쪽에 서 있던 연은 작게 움찔했으나, 그가 한 행동은 머리맡의 투박한 서랍장을 여는 것이었다.

“차를 끓이도록 하지.”

서랍장에서 다구를 꺼낸 그는 차를 끓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불을 피워 물을 끓이느라 제법 번거로웠을 것이지만, 하신후는 그저 작은 도기 차호에 찬 물을 부었다. 그러자 차호의 주둥이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연은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침상에 걸터앉았다.

좁은 선실에서 그와 가까이에 있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윽고 연은 그가 내민 찻잔을 받아 들어 홀짝였다.

차의 향이 은은했다.

두 사람은 한참 말없이 차호와 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예전에 민가의 당신 거처에서 나 혼자 이 열매를 먹었었지.”

그가 연을 보며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나도 기억하고 있어.”

“사실은 그날 밤 꿈에서 당신을 보았어. 앞섶을 풀어헤치기까지 하고 있었는데, 물론 그건 당신이 그때 정말로 그러고 있었기 때문이긴 하지만….”

횡설수설한 말에 하신후의 표정이 달라졌다. 눈이 조금 커지기까지 한 듯했다. 연은 민망했으나 어물거리듯 말을 이었다.

“흠, 아무튼, 다음날이 되어서야 내가 왜 하필 꿈에서 당신을 본 건지 알게 되었고, 그때는 사실 믿고 싶지 않았어. 내 앞가림하기도 곤란했고, 또 우리는 적이기도 하고, 음.”

연은 부끄러워 괜히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는 건 내 마음이 꿈에서 일부러 불러낸 사내는 당신 하나라는 걸-.”

연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바깥에서 쿵!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선체에 둔탁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연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체가 거칠게 흔들렸다. 진동은 그저 한 번이 아니었다.

‘풍랑인가?’

연의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순간, 더욱 거센 진동이 선체를 덮쳤다. 일어나 있던 연은 그 바람에 휘청거렸다. 동시에 허리를 감싸는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괜찮아.”

“갑자기 왜 격랑이-.”

“을령일 거야.”

하신후는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는 듯 말했다. 그는 불쾌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해가 저물었으니 이제 달이 뜨는 시각이지.”

하을령은 두 번째 달의 정령을 수족으로 부린다. 연은 몸을 바로하며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하신후가 아쉽다는 듯 비어 버린 손을 느리게 거두었다.

“쯧, 왜 번번이….”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음산하게 말을 흘렸다. 연은 잠깐 그 뒷말에 신경이 쓰였으나, 이내 뇌리에 다른 추측이 스쳤다.

연은 하신후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는 격랑에 놀란 기색이 없었다.

“…당신이 하을령에게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린 거지?”

연의 물음에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신이 여인 행세를 하고 있을 때, 나더러 당신을 노리는 것 같다고 말했던 사내들이 알려줬어. 당신이 달빛 아래서 보물 같은 무언가를 살펴보더라고. 보물은 허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달빛 아래로 간 건 당신 동생에게 뭔가를 전하려고 그랬던 거야. 그렇지?”

그가 연에 대해 알게 되었듯, 연도 그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하신후는 그저 평범한 사내들을 농락할 목적으로 굳이 번거롭게 굴 자가 아니다. 연은 자신의 추측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현한에게 내가 부토의 새였다는 걸 알린 자가 있잖아. 하신후가 먼저 하을령에게 내 정체를 알리지 않았더라도, 누군가 먼저 단서를 줬을 거야. 하을령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니 그것만으로 충분했겠지.’

하신후는 잠시 연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그의 눈빛은 생각을 읽을 수 없이 서늘하기만 했다.

이윽고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반쯤은 맞는 말이군. 다만 몇 가지는 조금 다른데. 그들이 보물이라고 여긴 것 역시 허상이 아니야.”

쿵!

때를 맞춰 다시 성난 파도가 선체를 덮쳤다. 마치 배를 직접 공격하는 듯 기이한 울림이었다.

그러나 하신후는 그 공격이 허상이기라도 한 듯 태연했다. 그는 연의 앞에 빈 오른손을 펼쳤다.

비어 있던 손 안에 광채를 내뿜는 사슬 하나가 나타났다.

“이것은 정말로 족쇄지.”

그가 나직하게 속삭이며 사슬을 내려다보았다. 듣기 좋은 속삭임이었으나 숨결에는 선연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연은 움찔하며 작게 휘청거렸다. 그러자 곧바로 하신후의 빈손이 연의 어깨를 감싸듯 붙잡았다.“월을 결박했던 것이자, 그가 죽은 자리에 남겨졌던 물건이야. 시신은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으나 이 족쇄는 그대로 남았지.”

연은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으로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족쇄를 보던 시선 그대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걸 왜 내게 가져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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