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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02)화 (102/122)

102

“이게 무슨-.”

연은 화들짝 놀라 하신후를 보았다. 손목의 은빛 실은, 전에도 본 적 있는 것이었다. 부토에서 새로 변신해 있을 때 그가 채웠던 족쇄 아닌가.

다만 이번에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운이 강했다. 한순간이었지만 손목이 저릿할 정도로 강한 신력이 담겨 있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했잖아.”

하신후의 얼굴에서 거짓말처럼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특징 없는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가라앉은 눈빛은 무섭도록 그다웠다.

“연아, 달아나기 전에는 생각을 했어야지. 내가 얼마나 마음이 상할지 몰랐어?”

아까 배에서 연을 껴안고, 달래고, 그 뒤로 내내 미소 짓고 있던 사내는 어디로 가고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연은 어안이 벙벙해서 하신후를 바라보다가, 기어이 황당한 듯 물었다.

“…지금 날 방심시킨 거야? 그러려고 일부러 여인 운운하며 얘길 꺼냈어?”

“너는 내가 약할 때 가장 상냥하고, 내게 화가 났을 때 가장 순진해지지.”

그는 차분히 답하더니, 친절하게 조곤조곤 설명을 덧붙였다.

“배에서 억지로 채웠다간 지금처럼 식사를 마치지 못했겠지. 당연히 내가 주는 차를 마시지도 않았을 거고. 너는 지금 약해져 있는데, 나와 다투겠다고 끼니를 걸러서는 안 돼.”

“하, 밥 먹이려고 날 찾아내기라도 한 거 같네!”

하신후는 연의 사나운 비아냥거림에 못 들은 척 대꾸하지 않았다. 연은 그를 사납게 노려보다가, 반대편 손으로 은빛 실을 쥐어뜯으려 했다.

그러나 하신후의 손이 곧바로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막았다. 연과 그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그는 무언가를 참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침착했으나 억눌린 감정이 섬뜩했다.

그는 웃음기 없는 눈동자로 연을 보며 입꼬리만 비틀어 올렸다.

“네가 나를 떠나서 영영 숨기라도 하려는 게 아니라면, 내가 주는 선물을 거절하지 않아도 되지 않나?”

“나는 이런 선물 원하지 않아. 족쇄잖아!”

연은 새가 되었을 때 이 족쇄가 얼마나 굴욕적이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가 모르고 그런 것이었으니 굳이 따지고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연은 머릿속이 한순간 아찔해지며 온갖 생각이 밀려드는 가운데, 가까스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물음을 입에 담았다.

“당신 변태야?”

하신후가 한쪽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이거 날 새장에 가둘 때-.”

연은 말을 잇다 말고 수치스러워서 입을 다물었다. 결계를 지었으니 당연히 하신후 말고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말이지만, 그럼에도 듣기에 너무 민망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소리였다.

“난 이런 거 없어도 어디 달아날 마음이 없어. 그리고 달아나다니. 내가 왜 달아나? 간다면 그냥 떠나는 거겠지!”

“이건 그대를 보호하기 위해서야.”

그의 음성은 새삼 위압적이었다. 하신후는 정말로 연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자기 감정을 억누르고 있기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기가 막힌 자였다.

“그대의 힘은 지금 더없이 불안정해. 그리고 월은-.”

그가 연에게 이런 태도로 월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더 이상 월을 먼 과거 전쟁에서 그가 죽인 존재처럼 부르고 있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 그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대를 농락해 왔다던데.”

“…그만 해.”

“지켜보니 그 말이 진실인 걸 알겠더군. 아까 그대가 정신을 잃었을 때 그자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다. 그대가 원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자가 그대의 정신에 멋대로 드나드는 건 두고 볼 수 없어.”

연은 멈칫 말문이 막혔다. 하신후는 길고 긴 시간 오직 감정을 억누르며 지내온 자처럼 차분했다. 그 차분함은 냉담함보다도 오싹했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모습으로 나와 입 맞춘 여인이, 깨어나지 못하며 다른 자의 이름을 부르는 걸 내가 언제까지 견뎌야 하지?”

“무슨 소리야…?”

“그대가 회운성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며칠 동안, 나도 잠시나마 그곳에 함께였어. 잊은 건 아니겠지?”

그는 엷게 냉소했다.

“그때도 우린 다퉜었잖아. 그때도 그대는 나를 따르는 의원 앞에서 나를 의심했었고.”

연은 할 말을 잃었다. 딱히 연을 힐난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상처 받지 않았을 리 있겠냐는 듯한, 당혹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도, 이번에도, 나는 그대가 깨어나지 못하며 그자의 이름을 부르는 걸 들었어. 악몽에 시달리는 것 같았지만 내가 불러도 듣지 못했지.”

연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내가 그랬다고? 그래, 배에서 혼절한 동안 꿈속에서 월을 보았어.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이름을 불렀다니…?’

동요한 연에게 다시 하신후의 낮은 음성이 이어졌다.

“나는 그대를 지켜야겠어. 내게는 그럴 수 있는 힘이 있고, 그대는 그걸 거절할 수 없어.”

연이 흠칫했다.

거절할 수 없다는 말은, 명백한 명령이었다.

“그래, 당신 말대로 내가 무방비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이제 나도 모든 걸 기억해 냈어! 아까도 아무 문제없이 그자를 떨쳐냈어! 그 얘긴 내게서 아직 듣지도 못했잖아!”

잠시 수그러졌던 연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극에 달한 수치심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존심만 앞세우지 않게 된 그녀라 해도, 자존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연은 확실히 약하고 어리석었다. 오랫동안 월의 술수에 놀아나 온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이제 달라질 수 있었다.

이제 막 진상을 알아채고 스스로 무언가를 해 보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하신후라고 해도 그런 연을 멋대로 휘두를 수는 없었다.

“당장 이 실을 풀어. 그렇지 않으면 내 힘으로 풀겠어.”

연은 싸늘하게 명령하며 그를 마주했다. 하신후는 미동 하나 없었다. 냉담한 표정은 잔혹한 군주라는 악명에 더없이 걸맞았다.

연은 끝내 실로 다시 손을 가져갔다. 이번에도 그가 막으려 한다면 완력으로 갚아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연이 억지로 실을 잡아 뜯으려 할 때였다.

하신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섭섭한 기색이 번졌다. 연은 멈칫 쥐어뜯기를 그치고 말았다.

그는 정말로 상처를 받은 듯 보였다.

둘 사이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하신후가 연의 손목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가느다란 팔찌처럼 감긴 실의 한쪽 끝을 쥐었다. 실은 부토에서 족쇄로 채워졌을 때처럼 길이에 제약이 없었다.

무게도, 그림자조차 없었다.

하신후는 마치 허상 같은 그 실을 그대로 자신의 왼쪽 손목에 감았다. 그의 입에서 조곤조곤 연을 달래는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이렇게 하면 내게도 그대의 힘이 더해지지. 그대 말대로 그대에게 보호가 필요 없다면, 좋아.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어떻지?”

“…….”

“그대가 보았듯 나는 그대를 위해 스스로 부상을 입었어. 한동안은 상처를 회복할 수조차 없지. 월이 이런 내 처지를 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대는 그게 전혀 염려되지도 않나?”

연은 움찔했다.

월이 하신후를 찾아간다?

마치 연의 꿈속에 나타났던 것처럼…. 지난날 어린 연을 찾아왔다가 기억을 지웠던 것처럼….

하신후가 겪은 그 오랜 전쟁에서 그를 공격하고 궁지로 몰았던 것처럼….

연에게 유일한 온기를 나눠 주었던 그 여우들을 죽였던 것처럼….

“이 실로 내가 당신에게 뭘 할 수 있는데.”

연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녀는 어디 들어는 보자는 듯, 그의 표정을 주시했다. 하신후는 차분하게 답했다.

“내가 어디에 있든 나를 찾을 수 있겠지.”

“…….”

“만일 내가 위험해진다면, 내게 그대의 신력을 베풀어줄 수도 있을 거고.”

“내 힘을 나눠준다고…?”

연은 문득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마다 하신후가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짚던 것이 떠올랐다. 서늘한 기운이 흘러들어 왔던 것도 기억났다.

때로 손을 맞잡았을 때도 그랬다. 그의 신력이 흘러들어 와 연을 도왔다.

“서로 떨어져 있어도 그렇게 할 수 있어?”

“그래, 아마도.”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답했다.

“전쟁 중에 내 피붙이와 그리 해 본 게 다지만, 그대와 나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대는 나만큼 강하니.”

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연 혼자만 이 실을 차고 있는다면 불공평한 족쇄 같았지만, 하신후의 손목에 연결된 것을 보니 약간 나았다.

게다가 분하지만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끝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좋아. 당신과 연결되어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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