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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00)화 (1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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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백 년 동안, 처음?

연은 다시 혼절이라도 할 것처럼 머릿속이 잠깐 아득해졌다. 그녀는 당황해서 잠깐 눈을 깜빡거리다가 말했다.

“거짓말 하지 마.”

“뭐가 거짓이라는 거지?”

“부, 분명 정인들이 많았잖아. 나도 들은 바가 있어.”

연은 창백해진 얼굴 그대로 기억을 돌이켰다. 회운성에서 들었던 말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분명 그때 들었던 하신후의 지난 행각은 오싹하다면 오싹했지, 순애와 거리가 멀었다.

하신후는 연의 얼굴에 번진 표정을 보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듯 눈을 찡그렸다.

“누가 그대에게 이상한 말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연은 하신후의 말을 자르며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중요한 건, 당신과 다르게 나는 정말로 아무도 없었다는 거야. 정말로 너밖에는 좋아한 적이 없고, 네게 속기 딱 좋을 만큼 얼이 빠졌지. 그런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

“그래, 나 때문에 그렇게 스스로 상처까지 냈다니. 그 말은 믿겠어. 당신이 내 이능에 당하지 않을 방도를 구하는 거야 당연하지. 우린 원래 적이어야 마땅하니까.”

잠시 연이 말을 그치기를 기다리던 하신후가 분명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나는 그대의 정인이야. 그대는 그러기로 이미 약조했어.”

“연심은 약조로 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내가 무슨 약조를 했다는 거야? 그런 적 없어.”

“정말로 많이 화가 났었나 본데.”

그는 후, 하고 작게 한숨 쉬듯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눈에는 웃음기가 사라진 채였다. 연은 약간 무섭게 보이기도 하는 그 표정을 빤히 마주했다. 그는 차분히 물었다.

“무엇을 원해? 화가 풀린다면 뭐든지 해줄 수 있어.”

연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신경질적으로 명령했다.

“그럼 옷을 벗어.”

“…뭐?”

“얼마나 다쳤는지 보고 싶으니까, 내 눈앞에서 벗어. 틈을 주면 이상한 술법으로 감출 수도 있잖아. 여인 모습일 땐 다쳤다는 걸 전혀 몰랐어. 모습을 바꾸면 혈향도 상처도 함께 감춰지는 거지?”

연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그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으려 말했다.

“내가 정말로 여전히 당신 정인이 맞다면 얼마나 다쳤는지는 확실히 알아야겠어.”

“…좋아. 그러지.”

하신후의 귓가가 엷게 달아올랐다. 연은 그 모습에 비로소 자기가 한 말이 얼마나 민망한 건지 깨달았다.

“다, 다리에도 이상한 짓을 했어?”

연의 물음에 재빠르게 답이 돌아왔다.

“아니야. 그러지 않았어.”

“그럼 윗옷만 벗어 봐.”

그가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옷을 벗는 손길이 느렸다. 연은 초조하게 그 모습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그의 맨 상체가 드러났다. 하신후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상의를 침상에 휙 던졌다.

그의 귓가도, 얼굴도 붉어진 채였다. 그러나 연은 맘 편히 얼굴을 붉힐 수 없었다. 드러난 나신은 선이 수려하고 아름다웠다. 본래라면 그저 감탄하거나, 부끄러움에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두 팔과 어깨, 가슴과 복부엔 온통 상처가 빼곡했다. 살갗을 경전으로 삼기라도 한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술법이란 말인가.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연은 무심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자 하신후의 표정이 덩달아 굳었다.

그가 다시 옷을 입으려 하자, 연은 그의 손을 막듯이 움켜쥐었다. 자기에 비해 커다란 하신후의 손을 쥔 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하면 치료할 수 있지? 원래라면 진작에 의술사가 낫게 했어야 하는 거잖아. 왜 이러고 돌아다닌 거야.”

“술법을 유지하려면 피가 필요해. 용이 자기 피를 쓰는 것과 똑같지. 그래서 일부러 회복을 늦추고 있는 것뿐이야.”

“그럼 술법을 유지하지 마. 내가-.”

내가 당신에게 이능을 사용하지 않으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려던 연은 흠칫 말을 멈췄다. 연은 아직 자신의 이능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아무에게나 멋대로 발현되고는 했다.

하신후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까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무섭도록 분명한 깨달음이 찾아들었다.

‘모든 게 내 탓이야.’

연의 얼굴이 찡그려지며 눈가가 붉어졌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연은 작은 흐느낌과 함께 사과를 중얼거렸다.

“왜 내게 갑자기 이런 힘이 생긴 건지 모르겠어. 내가 계속 통제하지 못하면 어쩌지? 계속 이럴 수는-.”

울음이 터져 나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연이 어깨를 움츠리자, 하신후가 연의 곁에 걸터앉았다.

“내게 그대의 힘에 대해 미리 말해준 자가 있어. 그자의 말대로라면 그대는 곧 안정될 거다. 그러니 울지 마.”

“미안해.”

하신후의 손이 연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연은 자기 손으로도 눈물을 함부로 닦아내며, 다시 그의 다친 몸을 바라보았다. 보기에도 아파 보였다.

“날 버리기로 한 거라고 생각해서 미안해. 아닐 거 같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내가 네게 너무 위험한 적 같았어.”

한번 울음이 터져 나오자 멈추기가 어려웠다. 연은 점점 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코를 훌쩍였다. 울음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널 죽이려고 잠입한 것도 미안해. 그땐 네가 이렇게 좋은 사람일 줄 몰랐어.”

“…좋은 사람이라. 그것 뿐은 아니지 않나.”

“맞아, 그것만은 아니야. 알고 있잖아. 모르는 척하지 마.”

울음이 터지자 눈물을 닦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점점 스스로 무슨 말을 뱉고 있는지도 아득해졌다.

연은 끅끅거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도 앞으로는 말을 하고 사라져야 해. 내가 그동안 얼마나….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그리고 얼마나 무서웠는데.”

고귀한 신룡인 자신이, 울면서 무서웠다고 외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으나 펑펑 흐르는 눈물은 수치심을 이길 만큼 거셌다. 다행히 하신후는 연의 무서움을 두고 놀리려는 기미가 없었다.

어쨌든 그는 연의 호적수였다. 그런 자에게 비웃음을 사면 얼마나 수치스럽겠는가. 그래서 연은 그가 별말이 없는데 안도했다. 그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어리석었어.”

들려오는 음성이 서늘했다.

“마음이 급해서 그대를 혼자 두었어. 그래서는 안 됐는데.”

연은 젖은 눈을 들어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눈빛이 어두웠다.

마치 정말로 자책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런 모습이라니, 분명 그에게 화가 났던 것 같기도 한데 도리어 마음이 철렁했다. 연은 흠칫 그에게 몸을 돌렸다. 충동적으로 두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움켜쥐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이렇게 피딱지투성이가 되어서는 그런 얼굴까지 하다니, 나더러 당신을 불쌍하게 여기기라도 하라는 거야? 그러기 싫으니까 하지 마!”

당황한 것인지 하신후의 표정이 변했다. 동시에 자책하는 듯한 어두운 기색도 사라졌다. 연은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엄지로 그의 입술을 쓸었다. 대체 언제 다친 건지 입술이 조금 터져 있었다. 아마 연과 입을 맞추다가 다친 듯했다. 연의 공격에 피를 흘린 바람에 입가에 핏자국이 남아 있기까지 했다.

연은 다시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으나,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대신 몸을 들어 그의 뺨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하신후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입맞춤이었던 모양이었다.

“…….”

“나는….”

연은 순식간에 목이 조금 잠긴 채로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돌연 분주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선실 밖의 분위기가 변해 있었다. 그 소리에 연은 퍼뜩 그에게서 몸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항구에 도착했나 봐.”

어색하게 화제를 바꿔 보았으나 여전히 침상에 걸터앉은 하신후에게서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모습을 바꿔야겠어.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또 누가 나를 감시할지도 모르고….”

연은 어설프게 말을 중얼거리며 눈 깜짝할 새에 변신술로 모습을 바꾸었다. 우락부락한 사내의 형상이 홀연히 그녀의 가냘픈 모습을 대신했다.

“항구에 도착하면 내릴 거지? 저번처럼 함께 뭔가 먹자.”

연의 어색한 제안에 뒤에서 비로소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연은 슬그머니 뒤를 돌아 풀어헤쳐진 앞섶을 바로 정돈하고 있는 하신후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슬쩍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침상에서 나를 덮치더니, 식사는 밖에서 하자고 권할 줄이야. 좋아. 그대 뜻대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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