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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99)화 (99/122)

99

“아니, 말해야겠어. 나는 네가 나를 떠난 거라고 생각했어. 너는 적어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연은 미동 없이 하신후를 눈에 담았다. 하신후는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듯했다. 연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이든, 그 말을 하고 싶었다.

연은 되도록 평정심을 지키려 애쓰며 말했다.

“네가 갑자기 떠난 뒤로 나도 생각을 해 봤어. 처음에는 내가 용이라는 걸 알고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 뒤로 내게 이상한 힘이 생겼다는 걸 깨닫고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

“…….”

“너는 내게 어떤 힘이 생겼는지 알고 있지?”

하신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연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이상하게 얽힌 걸지도 몰라. 나도 잘 몰랐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어. 네가 없는 동안 내 곁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아니, 거의 다 이상하게 굴었으니까….”

연은 생각을 가다듬듯 천천히 말을 흐렸다. 문득 하신후가 예상 밖의 물음을 던졌다.

“그럼 그렇게 굴지 않은 자도 있었다는 건가.”

“음?”

“그대 입으로 그렇게 말했잖아. 모두 그렇게 군 건 아니었다고.”

그랬다. 모두가 이상했던 건 아니었다.

현한만이 예외였다.

연은 순순히 그 사실을 대답해 주려다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하신후의 눈이 약간 가늘어졌다. 그의 입가에 심기 불편한 듯한 미소가 번졌다.

“누구지?”

“…….”

“누군지 말해. 그러면 내게 네 정체를 숨겼던 일은 그냥 넘어가 주지.”

그 말에는 연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걸로, 그런 일을 용서한다고?”

그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흠. 용서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래, 뭐든지 상관없어. 용서하지.”

연은 웃는 그를 멍청히 바라보다가 흠칫 눈을 돌렸다. 용서를 운운하는 그를 보니 솔직히 머리와 다르게 마음이 안심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벌써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야 지난 수일간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던 자신의 마음은 대체 뭐가 된단 말인가.

“나는 아직 아무 것도 용서하지 않았어. 나는 화가 난 상태라고.”

“그래서 내 물음에 답해주지 않겠다고?”

연은 망설이다가 그와 슬쩍 눈을 마주했다. 그는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유순해 보일 정도로 다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신에게서 답을 끌어내려 수작을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연은 또다시 그 수작에 홀리듯 넘어가고 말았다.

‘용서를 한다잖아. 내가 용인 걸 그냥 넘어가겠다는 뜻 아닌가? 아니, 하신후만 그냥 넘어간다고 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넘어가겠다고 하잖아.’

“혀, 현한만 평소와 똑같았어. 며칠 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이 많은 건 아니니까, 아마 현한 말고 영향 받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있을 수도….”

연은 다시 말을 흐렸다. 하신후의 표정에 일순 스친 섬뜩한 냉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는데?”

연이 당황해 물음을 던진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가 연을 껴안았다. 딱히 수작을 부리려 그런다기보다는, 정말로 돌연한 불안에 휩싸이기라도 한 것 같은 태도였다. 그 바람에 연은 놀랐으나 그를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하신후는 그대로 연을 품에 안고서 잠시 말이 없었다. 연은 침묵이 깨지기를 기다리다가, 결국 자신을 감싼 팔을 살짝 밀어내며 물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잖아.”

하신후는 대답 대신 다시 연을 두 팔로 옥죄듯 껴안았다. 숨 쉬기 답답할 정도로 꽉 끌어 안기자 연은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화를 내야 하는 건지, 그냥 이대로 가만히 있기만 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때였다. 그의 품에 안겨 있다 보니 비로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아까까지는 노기가 격해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하신후 특유의 좋은 체취에, 혈향이 섞여 있었다. 자신이 공격해 피를 흘린 탓이라고 하기에는 그 향이 너무 짙었다.

‘뭐지?’

연은 당황해 얼굴을 굳히며 그를 홱 밀쳐냈다. 그리고는 그가 막을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그의 옷섶을 찢듯이 벌렸다. 사납게 풀어헤쳐진 상의 사이로, 맨 가슴이 드러났다. 연의 눈이 한층 크게 뜨였다.

“…이건….”

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하신후의 가슴팍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정확히는 날붙이로 새겨 넣은 듯, 살갗에 팬 글자마다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연은 말을 잃고서 흔들리는 눈으로 그 상처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하신후가 무언가 말을 하려 하자, 그를 저지하며 물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지?”

하신후를 마주하는 연의 눈동자에 노기가 어려 있었다. 그는 동요한 얼굴로, 연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연은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 손을 주먹 쥐었다. 타오르는 노기에, 공기가 일렁거리는 듯할 정도였다.

“대체 어디서, 무슨 짓을 하다 온 거지?”

다시 뱉어진 연의 물음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신후가 천천히 정신을 차린 듯 미소를 비쳤다.

“좀 감동적인걸.”

그는 정말로 기쁘다는 듯 한껏 눈을 휘어 웃기까지 했다.

“내가 다쳐서 화를 내 주다니. 그대는 역시 아직 내게 마음이 있구나. 다행이야.”

“그게 다행이라고? 지금 이런 꼴로-.”

“염려해 줘서 기쁘지만 나는 괜찮다, 연아.”

그가 웃는 얼굴로, 조금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내가 건 술법이다. 누가 내게 이런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해 주다니, 이 제국에서 너처럼 나를 염려해 줄 자는 아무도 없을 거야. 정말로 기쁘군.”

술법이라고?

하긴, 그의 몸에 새겨진 것은 글자들이다. 상처를 내면서까지 글자를 새길 이유라면 저주든 술법이든 둘 중 하나이겠지. 그것도 이렇게 섬뜩한 기운이 짙게 밴 글자들이라니.

문득 날카로운 의심 하나가 가슴속을 스쳤다.

“무슨 술법인지… 말해.”

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솔직하게 말해줘. 나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 나랑은 무관한 일인 거지?”

가슴속이 답답해지다 못해 누가 머리를 세게 때리고 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연은 눈앞이 까마득해져 바르르 손을 떨고 말았다.

연은 떨리는 손으로 하신후의 팔목을 붙잡고 재촉하듯 흔들었다.

“빨리 대답해 봐. 나 때문에 그런 건 아니잖아. 그렇지? 술법이라고 해 봤자 빨리 치료 받으면 아무렇지 않아지는 가벼운 거지?”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말이 없었다. 떨고 있는 연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서서히 어둠이 짙어졌다. 이윽고 그는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럴 리가 있겠어. 내가 그대가 아니면 누구를 위해 스스로 이런 짓을 할까.”

“그, 그건-.”

“보이는 것보다 더 괴로웠는데….”

“…….”

“그래도 조금 전 들었던 말보다는 덜 괴로웠어. 그대를 위해 나는 이런 짓을 무릅쓰고 있었는데, 그대는 그동안 내가 자길 떠났다고 믿고 있었군. 내가 그대에게 준 신뢰가 그 정도였을 줄은 몰랐어.”

감미로운 음색으로 말이 이어지는 동안, 그의 손이 연의 목덜미를 타고 느리게 기어올랐다. 연은 흠칫 몸을 떨며 그를 밀어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녀를 집요하게 마주해 오는 하신후의 눈빛 때문이었다.

‘이번에 또 밀어내면 정말로 상처 받을지도 몰라. 마음이 힘들면 몸도 따라서 약해진다고 했어. 저렇게 부상을 입었는데….’

그의 상처를 본 순간부터 연의 사고는 아까까지의 냉철함을 잃고 말았다. 분명 그에게 할 말을 제대로 준비해 두고 있었건만, 그 모든 말을 대신해 자책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연의 얼굴에 죄책감이 번졌다. 연은 눈가가 서서히 붉어지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을 본 하신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손을 뻗을 때였다. 연이 허공에서 그의 손을 홱 쳐내며 괴롭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정말로 나 때문에 이 꼴이 되었어? 내게 말 한마디 없이 혼자서 이렇게 했다고?”

“…….”

“이게 뭐에 쓰는 술법인데?”

연의 눈에서 천천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신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답했다.

“네 새로운 이능이 내게 듣지 않게 된다. 네 말대로 나는 네 이능이 무엇인지 알아. 그리고 네가 품게 된 의심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지.”

“…….”

“내가 너를 의심할 필요도 없이, 그동안 지켜본 네 성품으로 미루어 너는 무조건 나를 의심하고 있겠지. 내가 네 이능에 휘둘려 네게 연심을 품는 거라고.”

“그럼 아니라고? 우린 처음부터 너무 이상하게-.”

“이상하다라.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손을 들어 손끝으로 눈물에 젖은 연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상관없어. 너는 사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가 처음으로 마음에 들이게 된 존재이니, 나는 절대로 너를 놓치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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