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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97)화 (97/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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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멈칫하더니 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몸이 안 좋아지기라도-.”

“아니야.”

연은 앉은 자리에서 여인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네가 의심스러워져서 마시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

“너는 누구지?”

여인은 답하지 않았다. 연은 가볍게 호흡을 골랐다. 오늘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서였을까. 평소보다 한층 분명하게 여인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실은 줄곧 신경 쓰였으나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내내 이 여인에게서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오늘은 비로소, 그 느낌이 더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해졌다.

연은 숨을 고르고, 용언을 써서 다시 물었다.

“다시 묻겠다. 너는 누구지?”

나직한 물음이었으나 거기 실린 힘은 강력했다. 평범한 자라면 당장 진실을 토해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이번에도 침묵했다. 표정에는 미동 하나 없었다. 반대로 연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섬뜩한 살기가 연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숨결마저 베어 낼 듯 공기가 날카롭게 얼어붙었다.

여인이 연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다가올 상황을 대비하려는 듯했다.

연은 무심하게 느껴질 만큼 메마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를 계속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네가 나를 너무 우습게 여겼구나. 네가 누군진 모르지만, 너를 여기 보낸 자가 나를 우습게 여긴 탓이겠지.”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너는 용언에 대비하는 훈련을 받은 자인 걸까.”

이렇게나 정면에서 용언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뛰어난 자일 것이다. 게다가 용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자가 틀림없었다. 그러니 저항하는 법도 익힐 수 있었으리라.

하면 더 이상 정체를 숨기는 건 소용이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내 곁에서 하루를 다 바치다니. 덕분에 표성에서 한 식사가 즐겁긴 했지만….”

연은 말끝을 흘리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은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았다. 아무런 대꾸 없이 그저 연을 곧게 올려다볼 뿐이었다.

“널 보낸 건 하을령일까.”

“…….”

“아니면 월인 걸까.”

연의 등 뒤에서 검붉은 피의 포말이 번져 나왔다. 용언만으로는 입을 열지 않는다면, 피의 힘 역시 더해 물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여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피의 안개를 보는 여인의 시선은 무섭도록 침착했다.

연은 고요하게 느껴지는 여인의 눈동자를 당혹스럽게 노려보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힘을 실어 묻는데도 답하지 않는다고? 대체 무슨 훈련을 받은 자인 거지?’

연은 당황한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무표정을 가장했다. 무심한 척 힘을 가다듬으며, 괜한 말로 여인의 입을 열어 보려 시도했다.

“하을령이든 월이든, 네 행동을 보니 그동안 나를 철저하게 지켜봐 왔다는 건 알겠던데. 일부러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주고. 그래, 살구라니. 놀랐어. 그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인데.”

“…….”

“첩자를 보내려고 그런 취향까지 관찰하다니. 나라면 아직 미숙해서 그렇게까지 하진 못할 텐데.”

연은 중얼거리다 말고 무심코 미간을 찡그렸다. 무언가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그래도 그의 말투를 따라한 건 너무 심했어. 내가 북왕에게 관심을 둔 건 오직 그 수려한 겉껍데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의 말투를 따라한다고 해서 내가 네게 넘어갈 리 없잖아.”

“…그렇습니까?”

여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몰랐네요.”

어쩐지 서늘한 웃음기가 섞인 말투였다. 그리고 그마저도 기분 나쁠 정도로 하신후를 연상시켰다.

연은 내심 이 여인을 보낸 자가 하을령일 거라 짐작했다. 자기 부하에게 하신후의 말투를 이 정도로 연습 시킬 수 있는 건, 아무래도 하을령 아니겠는가.

‘아니면 월일까? 월도 하신후와 전쟁에서 오래 맞부딪히긴 했으니까….’

연은 밀려드는 생각을 지우며, 한층 위압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계속 침묵한다면 나는 네 목숨을 거둘 것이다. 그러니 말해. 누가 널 내게 보냈지?”

진심으로 힘을 실어 물었으나 여인은 오히려 엷은 미소를 드리웠다. 그 미소에 연은 분노하고 말았다.

‘감히 나를 앞에 두고 여유를 부려?’

연의 눈동자에 열기가 고이는 순간이었다.

쿠당탕-!

여인의 몸이 반대편 벽으로 인정사정없이 날아갔다. 검붉은 안개가 허공에서 튀어나온 두 개의 손처럼 여인을 짓눌렀다.

“윽-.”

사지가 벽에 결박된 여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네 눈에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지는 모르지만, 너를 죽이겠다는 건 거짓이 아니다. 지금까지 나는 이 땅에서 사람에게 살생을 저지른 적이 없어. 그러니 네가 나의 처음이겠구나.”

연은 천천히 여인에게로 다가섰다. 피의 안개에 짓눌린 채로, 여인이 고개를 들어 연을 응시했다.

“처음이라니, 그건 조금 반갑기도 한데….”

또다시 그 엷은 미소였다. 여인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렇다고 분노가 어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부드럽게 느껴질 정도로 다정한 눈빛이었다. 연은 흠칫 평정심을 잃었다.

자신을 가지고 놀려 드는 것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한순간 아찔해지는 듯싶더니, 연의 손은 어느새 여인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손을 통해 흘러들어 갔다.

“으윽-.”

여인의 입가에 한줄기 선혈이 흘렀다.

“하긴, 내가 무엇 하러 굳이 네 답을 들어야 할까. 누가 너를 보냈든 너도 죽이고 그자도 죽이면 되는걸.”

피를 흘리면서도 여인의 눈빛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그에 오히려 동요한 것은 연이었다. 이제 보니 미친 여인 아닌가.

광인이 아니라면, 이토록 고통스러운 상황에 저런 눈빛을 띠는 것은 무리다.

‘이 자는 대체 누구지?’

연이 진심으로 동요하자, 그 순간 연이 유지하고 있던 변신 역시 흔들렸다. 여인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제일 먼저 달라졌다. 손가락이 가늘어지고, 손이 작아지며, 손목 역시도 희고 가늘게 변했다.

다음 순간 홀연히 거구의 무사를 대체한 것은 본래의 연이었다. 진줏빛 머리칼이 흘러내리고 저주흔 없이 말간 얼굴과 가냘픈 몸이 나타났다.

“…….”

“…….”

연과 여인은 둘 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여인의 눈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여인을 짓누르던 피의 안개 역시 연의 동요를 따라 꿈틀거렸다.

연은 의지와 무관하게 돌아와 버린 본모습에 당황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여인의 손이 돌연 연의 어깨에 닿은 것은 그때였다. 분명 안개에 포박되어 있어야 할 손이, 겁 없이 연을 움켜쥐었다.

“이게 무슨 짓-.”

연은 미처 말을 맺지 못했다. 여인의 입술이 그대로 연의 입술에 포개어진 까닭이었다. 연이 기겁하여 여인을 밀치려 했을 때였다.

문득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다. 여인의 손이 연의 얼굴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그 모습이 달라졌다. 수려한 사내의 눈이, 입술을 겹친 채로 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의 눈이 충격으로 부릅떠졌다.

“-!”

여인의 모습을 지우고 나타난 것은 하신후였다. 그는 연이 그를 밀쳐내기 전에 먼저 몸을 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내게서 피를 보려 드는 건 부토에서와 똑같구나.”

연에게 입 맞춘 그의 입술에, 조금 전 그녀에게 공격 당해 흘린 피가 생생했다. 연은 기절할 듯 멍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든 꺼내야 할 듯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체 왜 이자가 여기에 있는 걸까.

말문이 막힌 연 대신 침묵을 깬 것은 하신후였다.

“지월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나 아닌 다른 이가 그대를 먼저 보게 된 것이 거슬렸는데.”

“…….”

“드디어 그대의 진짜 얼굴을 보게 돼서 기쁜걸.”

저주흔을 지운 게 대체 언제 적 일인데 이제 와 기쁨 운운인가. 그동안 대체 어디서 뭘 했기에? 연은 동요와 분노가 뒤섞여,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도 했고 뜨겁게 들끓는 듯도 했다.

“…어떻게 내게-.”

웃으며 말을 건넬 수가 있어?

그렇게 물으려 했으나, 말은 목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 한순간이었다. 연은 핑그르르 점멸하는 시야에 휘청거렸다.

“연아!”

사람이 너무 충격을 받으면 기절하고 만다던데, 사람만이 아니라 용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인 모양이었다.

연은 그 자리에서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혼절하고 말았다. 하신후가 놀라 부축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녀는 밀쳐내지조차 못한 채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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