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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96)화 (96/122)

96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여인은 연을 데리고 찻집으로 향했다. 다과를 함께 파는 곳이었다. 연은 호두와 밤이 든 말랑말랑한 과자를 맛있게 먹어 치웠다. 차도 향긋하여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었다.

게다가 주위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자라나 있어 운치가 있었다.

“바닷가 도시라서인지 회운성과는 공기 냄새도 조금 다른 거 같아.”

연의 중얼거림에 여인이 슬며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여기가 마음에 드세요?”

“응, 나쁘진 않은 곳이네. 처음엔 너무 시끌벅적해서 싫었지만 이 거리는 조용한걸.”

“회운성은 싫으셨습니까.”

싫었을 리가 있을까. 하신후에게 빠져드는 바람에 그곳을 싫어할 겨를이 없었다. 본래라면 제국 황가의 근본인 땅이니 더 경계하고 미워해야 마땅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곳은, 연에게 전혀 다른 장소가 되어 있었다.

연은 여인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싫지 않았어. 좋아하고 있다.”

“…다행이로군요.”

“거기서 만난 사람은 싫지만.”

여인이 멈칫 미소를 지웠다. 연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태연히 말했다.

“회운성의 주인인 북왕 하신후는 그림자 왕이라고도 불린다던데. 그래서 그런지 회운성 본성도 어쩐지 조금 으스스하게 생긴 것 같아. 회운성은 좋은 도시지만, 본성만큼은 이제 싫어졌다.”

“본성이 싫은 건, 역시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싫기 때문입니까.”

“그래. 사실 나는 본성에 볼일이 조금 있었거든. 물론 이젠 다 끝났지만.”

연은 무표정하게 덧붙였다.

“이젠 삼진으로 가서, 다신 회운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다.”

“…그럼 삼진에 계속 있겠다고요?”

여인의 표정이 한층 미묘해졌다. 눈을 슬쩍 찌푸린 것이, 연을 노려보는 듯도 했다.

“앞으로의 일은 네가 알 필요 없지.”

연은 시큰둥하게 답하며 과자를 입에 넣었다. 한참을 말없이 과자만 오물거리고 있자니, 여인의 시선이 점점 따갑게 느껴졌다.

연은 여인의 나빠진 안색을 힐끔거렸으나 아무 말도 더는 꺼내지 않았다. 둘 사이의 어색한 침묵은 한동안 이어졌다.

침묵이 깨진 것은, 찻집을 나와 배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어서 썩 꺼지지 못해? 너 같은 뱀의 족속에게 더 줄 돈은 없다고 했잖아! 혼혈 주제에 어디서 정체를 속이고는!”

“하지만 약속한 삯을 다 치르지 않으셨잖아요. 제가 혼혈이라서 그러신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그럼 왜 다른 아이들에게도 삯을 반만 주셨습니까?”

길모퉁이에 웬 소년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소년은 평범한 제국인들처럼 검은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멀리서 보기에도 피부는 사인처럼 무척 희고 말간 빛깔이었다.

소년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는 것은 웬 중년 사내였다. 사내 뒤로는 하인인 듯한, 보다 젊은 사내 둘이 서 있었다.

“다시 한번 삯이 어쩌고 하며 공방에 찾아왔다간 정말로 혼쭐을 내줄 줄 알아! 나처럼 사인 혼혈에게 남들과 똑같은 삯을 치르는 주인이 어디 흔한 줄 알아? 감사할 줄은 모르고, 쯧쯧.”

“하, 하지만-!”

소년은 돌아서려는 사내에게 황급히 외쳤다.

“다른 이들과 똑같이 반만 삯을 치러 주신 것뿐이지 않습니까! 본래는 분명-!”

“뭐가 어째? 그래도 이놈이!”

홱 다가온 사내가 소년을 걷어차려는 듯 사납게 발을 들어올렸다. 연이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연은 소년의 앞을 막아서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만 둬.”

연의 매서운 눈길과 대단한 덩치에 사내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뭐요? 댁은 뭔데 갑자기 남의 일에 끼어들어?”

“듣자 하니 삯을 제대로 안 치렀다지. 사인이라고 핍박하다니. 역시 너희는….”

회운성에서는 그나마 사인들이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 같더니. 역시 조금만 떨어진 곳으로 와도 이 모양이다.

연은 착잡함과 분노를 담아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 눈길에 담긴 살기에 사내의 낯빛이 파랗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드, 드, 들었다면 알 텐데 무슨 소리요. 나는 분명 이 애나 다른 애들에게 똑같은 삯을 지불했소.”

그 말에 즉시 소년이 외쳤다.

“똑같이 적게 주셨지요! 그래 놓고서는 갑자기 왜 제가 혼혈이라서 적게 주셨다는 듯 말하십니까?”

“그럼 너 말고 다른 녀석들에게만 돈을 더 주기라도 하면 좋겠느냐? 너는 혼혈이라서 적게 준 것이고, 다른 녀석들은 일을 시원찮게 해내니 적게 준 것이다. 어쩔 테냐?”

사내가 호통을 치자 소년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소년이 자리에서 애써 몸을 일으키며 다시 무언가 말을 꺼내려 할 때였다.

뒤쪽 모퉁이에서 갑자기 작은 인영 하나가 튀어나왔다. 소년보다 조금 더 몸집이 작은 다른 소년이었다. 작은 소년은 얼른 소년 앞을 막아서며 겁에 질려 말했다.

“그, 그만 해. 그냥 가자. 나 때문에 괜히 이럴 필요 없어. 약 값은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비켜, 네가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주시기로 약속한 돈이니 받을 거야!”

“그만 하라니까. 제발 날 봐서라도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 이러다 너 정말로 큰일 나.”

소년들은 서로 말리고 밀치며 옥신각신했다.

“흥, 웃기는 것들. 저희들 분수를 알아야지 원.”

사내는 소년들이 그러는 틈을 타서 얼른 자리를 뜨려는 듯했다. 그는 연의 눈치를 힐끔 보더니 중얼거렸다.

“댁도 그만 참견하고 가던 길 가시오. 저것들은 어차피 제대로 배운 것 하나 없는 부랑배 애새끼들이오. 나처럼 일거리를 주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고마워 할 생각은 않고, 배은망덕한 것들.”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달아나듯 부리나케 그 자리를 피했다.

“감사합니다, 무사님. 덕분에 친구가 얻어맞지 않았어요. 저자는 성미가 더러워서 한번 손찌검을 시작하면 끝 모르고 패악을 떨거든요.”

작은 소년이 연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여 보였다. 큰 소년도 연의 눈치를 살피다 쭈뼛거리며 고개를 까딱했다.

연은 큰 소년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넌 정말로… 사인과 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인 건가?”

큰 소년이 곧바로 얼굴을 구기며 반항적으로 대꾸했다.

“그건 왜요? 보면 몰라요?”

“이 도시에 너 같은 아이들이 얼마나 되지.”

“그야 셀 수 없이 많죠. 여기 처음 왔나 본데, 글쎄 그런 건 왜 궁금해한답니까?”

소년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연은 멍하니 침묵했다. 혼혈이라니, 그런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아무도 내게 이런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 적이 없었어. 하지만,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나 스스로 짐작해 볼 수 있었을 텐데. 내 세계는 대체 얼마나 작았던 거지.’

머릿속이 돌연 아득해졌다. 멍하니 서 있는 연의 곁으로, 조용히 물러서 있던 여인이 다가왔다.

“자, 이걸 받고 그만 가 보거라.”

여인은 품에서 지전 몇 장을 꺼내 소년들에게 나눠 주었다. 지전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연은 그만한 금액을 서슴없이 건네주는 여인의 모습에, 아연한 가운데서도 슬쩍 표정을 달리했다.

여인은 연을 돌아보고서, 잠시 안색을 살폈다.

“그만 배로 돌아가지요.”

여인의 손이 연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연은 잠자코 여인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여인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길만 골라 연을 이끌었다. 갈수록 바다 냄새가 짙어지는 걸 보니 항구로 돌아가는 길이 분명하기는 한 듯했다.

“사인이든, 사인과 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든, 아니면 제국인이든….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지요.”

“…….”

“지금 이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물입니다. 무사님이 마음 써 주신 소년들은 가진 것 없이 태어난 거리의 아이들이니, 무슨 피를 타고났든 그저 다 같이 지난한 삶을 겪게 될 겁니다.”

“부유하게 태어나면 어떻지?”

“글쎄요, 최근에는 사인들 가운데서도 타고난 재주로 빠르게 재물을 얻어 가는 자들이 생겨났다던데.”

연은 자신의 손을 쥔 여인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아는데?”

조금 앞서 걷던 여인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은 배에 도착해서야 잡고 있던 연의 손을 놓아주었다.

밤이 깊자, 여인은 다시 평소와 같은 차를 끓여 왔다. 연은 선실로 들어서는 여인을 바라보다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오늘은 그 차를 마시기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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