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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94)화 (94/122)

94

연은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다가 멍하니 물었다.

“그, 그럼 내가 뭘 더 이야기해야 하는데?”

여인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입가의 미소는 한층 짙어진 채였다.

“흠, 왜 제 상대가 되어주실 수 없는지 이유는 알려줘야지. 궁금하니.”

뭔가 말투가 괴상하게 들렸다. 그러나 연은 차마 그걸 따질 수 없었다. 듣고 보니 여인의 말이 일리가 있는 듯도 해서였다.

정말로 연에게 관심이 있었을 줄이야. 하긴 그저 다른 사내들에게서 보호해달라고 청하는 것치고는 지난 사흘 너무 연의 곁에 딱 붙어 있는 듯하긴 했다. 대체 어떤 점을 보고 대뜸 연에게 반한 걸까? 딱히 그 ‘이능’에 걸려든 자도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이유가 되었든, 그런 마음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게 무심하게 대했으니 여인으로서는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연심이 얼마나 쉽게 사람을 기쁘게도, 아프게도 하는지는 연도 잘 알았다. 연 역시 지금 그 빌어먹을 연심 때문에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으니 말이다.

연은 고개를 돌린 채 무뚝뚝하게 말했다.

“특별할 거 없는 이유다. 나는 따로 마음에 둔 사-, 상대가 있어.”

사내가 있다고 말할 뻔했다. 확실히 사내를 좋아하는 게 맞긴 했지만, 이 모습으로 그리 말했다간 괜히 상대가 대화를 길게 끌고 갈 빌미만 주게 될지도 모른다.

연은 어색하게 덧붙였다.

“음, 사실 내 연심도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 그래서 네 처지가 가엾게 느껴져서 알려준 거야. 내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마음을 접도록 해.”

기껏해야 사흘 만난 사이이니 마음이 깊어졌을 리는 없으리라.

사람의 연심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사람이 아닌 연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신후를 겪어보니 느낀 바는 있었다.

그토록 진정이 깃들어 보이던 그의 연심조차 사실은 그렇게까지 대단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진정이었다면, 적어도 화를 내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연을 만나러 왔겠지. 그렇게 홀연히 등 돌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겠지. 그가 그러했으니 이 여인의 마음 정도야 더 쉽게 사라질 터였다.

‘남겨지는 건 사람이 아닌…, 용인 나의 마음뿐이겠지.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 마음은 사람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

연은 괜히 씁쓸한 마음이 들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여인의 손이 뻗어 나와 연의 턱을 누른 것은 그때였다.

“무 하는 그야?”

화를 내려 했으나 눌린 입술 탓에 발음이 뭉개졌다. 연이 어색하게 여인을 쏘아보자, 그녀는 연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 표정을 마주하니, 하신후가 떠올랐다. 입술 깨무는 건 나쁜 버릇이라 했었지.

그 말이 떠오르자 괜히 입술을 이로 짓씹고 싶어졌다. 그러나 연이 신경질적으로 여인의 손을 밀어내자마자, 여인이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밤 차를 드리는 걸 잊었네요. 어제 드린 차를 또 드리지요.”

“응? 어째서 또-.”

“오늘도 무사님 몸이 이렇게나 차가운걸요. 다 바닷바람 때문입니다. 고뿔이 들지 않으려면 차를 드셔야 해요.”

연은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여인의 태세 전환이 너무나도 태연하고 재빨랐기 때문이었다.

아까까지 자기 마음에 화답하지 않아 준다며 문을 발로 차던 자가 누구였더라? 눈앞의 이 여인 아니었던가?

“저, 저기. 내가 한 말 다 잘 들은 거 맞지? 나는 그쪽한테 관심이 없어. 나랑 잘 해 볼 마음은 버리는 게 좋아.”

“물론이지요. 잘 새겨들었습니다.”

여인은 찻잔을 가져와 상에 놓으며 미소 지었다.

“앞으로 누가 저와 같은 것을 묻거든 아까와 같이 답하세요. 마음에 둔 다른 상대가 있다고 말이지요.”

“…그래, 그렇긴 한데….”

연은 얼떨떨하게 여인이 차를 따르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또 예의 익숙한 향기가 풍겨오고 있었다. 어디서 맡아 본 향기였더라.

“드세요. 다 드셔야 합니다.”

여인이 연에게 찻잔을 권했다. 연은 어색하게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려다 말고, 멈칫 물었다.

“설마 독이라도 타서 주고 있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조금 전 그 질문은 용언이었다. 거짓으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닌 것이다. 여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독이 아니라 답했다.

‘역시 독은 아닌 게 틀림없어. 하긴, 이 여인에게선 월이나 그의 피로 조종당하는 자들이 풍기는 기분 나쁜 기운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걸. 그렇다고 하 씨 가문 사람들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좀 특이한 사람일 뿐이지…. 평범한 장사꾼이 맞는지도 몰라.’

연은 한 번 더 용언으로 물었다.

“너는 정말로 그냥 내가 마음에 들어서 내 옆에 있었던 거냐? 아니, 물론 다른 사내들이 무서워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정말로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거야?”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용의 힘을 실은 물음이었다. 여인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대가 마음에 들기에,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 * *

그 밤 이후, 연은 여인에게 한 가지만을 더 단단히 못 박았다. ‘그대’라는 부름은 금지였다. 하신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우선 불편했다.

종일 그를 떠올리며 후회와 원망과 기대를 곱씹고자 회운성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를 붙잡으려 했다면 차라리 삼진이 아니라, 그가 있다던 상화성으로 향했으리라.

하지만 연은 상화성의 반대 방향인 삼진으로 향하는 여정에 올라 있었다. 어느새 처음으로 배가 서는 항구에 다다르기까지 한 참이었다.

항구가 있는 표성은 꽤나 번화한 도시였다. 항구 도시라 각지의 물자가 오가는 까닭인지, 오가는 사람들의 복색 역시 독특했다.

‘여기 사람들은 회운성과 차림새가 다르네. 날씨도 조금 더 따뜻해진 거 같고. 하긴 삼진보다 회운성이 더 추웠었지.’

표성은 회운성과 삼진 사이에 있는 도시니, 삼진으로 갈수록 따뜻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봤자 모두 추운 북쪽 고장이긴 매한가지였지만 말이다.

배가 다시 출항하는 건 내일 아침이었다. 하니 하루 동안 표성을 둘러볼 수 있었다.

‘설마 여기에도 월의 수하들이 와 있진 않겠지?’

물론 삼진에서의 소동을 생각하면 어느 곳이든 아주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연은 약간 평범한 여행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곁에 있는 장사꾼 여인 덕분에 더욱 그러했다. 여인은 표성에 도착하자마자 연을 데리고 돌아다닐 생각이 가득했다. 항구 근처 저자에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며 권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표성은 한 계절에도 여러 번 날이 얼어붙었다가 따스해지기를 반복하는 곳이지요. 기후가 변덕스러우니 곡물도 과실도 다른 곳과는 다르답니다. 향기도 전혀 달라서-.”

“알겠어. 그렇게 살살 꼬드기지 않아도 널 따라갈 테니 앞장서라. 어딜 데려가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연은 시큰둥하게 여인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내심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곳과 전혀 다른 향기라니, 대체 뭘까?

물론 회운성이나 삼진 같은 곳들 말고는 가본 적 없으니 다른 곳과 다르다고 해봤자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는 모른다. 그래도 기왕 여기 왔으니 여기 특산물을 먹어 보고 싶긴 했다.

그러나 연은 항구를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괜한 걸음을 했나 후회하게 되었다. 여러 배에서 사람들이 내린 탓일까. 거리는 번잡하기 그지없었다.

축제를 벌이던 삼진의 거리가 떠오를 정도였다.

‘체구가 커진 탓에 더 나아가기가 어렵잖아? 쳇, 이렇게 혼잡한 곳에서는 내 험상궂은 외모도 별로 도움이 안 되네.’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길이다 보니, 사람들은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서 그저 서로에게 떠밀려 다녔다. 어쩌다 연에게 쿵 부딪치기라도 하면 그제야 연의 위협적인 외양을 깨닫고 질겁해 달아나긴 했지만, 그것도 별 소용이 없었다.

연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가는 일에 영 서툴렀다. 그에 비해 장사꾼 여인은 가벼운 걸음으로 인파를 헤치며 걸어 나갔다.

결국 연은 인상을 찡그리고서, 앞서 걷는 여인의 뒷모습을 향해 투덜거렸다.

“네가 가자는 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번잡한 길은 질색이야. 나는 그냥 배로 돌아가겠다. 너 혼자 마음대로 돌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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