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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92)화 (92/122)

92

험상궂은 장정의 모습을 하니, 모든 이들이 알아서 눈치를 살펴오는 것 이상으로 좋은 점이 더 있었다.

이 모습을 하고 있으니 연의 새로운 ‘이능’이 발현되지 않았다. 틀림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험상궂은 모습 때문에 다들 잠깐 겁을 먹어 다가오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배에서 지낸 지 사흘째가 되자 연은 비로소 안심했다.

‘정말 이 모습이 되자 아무도 내게 아부를 하지 않네. 나를 경탄한 듯이 바라보지도 않고, 그냥 저주흔 있는 얼굴로 지낼 때랑 똑같아. 혹시 모습을 바꾸면 그 이능이 발휘되지 않는 걸까?’

그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더없이 큰 수확이었다.

“뭐가 그렇게 기쁘세요?”

“응, 그런 게 있어.”

사흘째가 되며 또 달라진 게 있다면, 어느새 이 장사꾼 여인이 곁에 있는 게 그리 불편해지지 않아졌다는 점이었다.

전에 어디서 몸종으로 일하기라도 한 걸까. 여인은 꽤나 살뜰하고 눈치가 빨랐다. 깊은 밤, 연이 바닷바람을 하도 쐬어 조금 추위를 느낄 즈음이었다.

여인은 연을 모포로 꽁꽁 싸매더니, 무슨 수를 쓴 건지 연의 선실에 둘 화로를 하나 더 가져오기까지 했다. 덕분에 연은 모포를 휘감은 채 아침까지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이래서야 내가 이 여인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이 자가 나를 돌보러 온 거 같기도 하고. 원래 민가의 사람들은 다 이렇게 상냥한가?’

여인은 연에게 직접 말린 약초로 우린 차라며, 웬 차를 내어주기도 했다. 바닷바람에 추위를 느끼던 터에 뜨거운 차를 주니 당연히 반가웠다.

반갑기도 하고, 그 상냥함이 꽤 고맙기도 했으나, 딱 한 가지 약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어젯밤 내게 준 그 차 말이야.”

연은 여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약초를 우린 것이라고 했었지. 혹시 무슨 약초인지 알려줄 수 있어?”

“그건 안 되죠.”

“응?”

여인이 생긋 눈을 휘어 미소를 지었다. 장난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속을 숨기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미소였다.

“저는 과실도 팔고, 과자도 팔고, 차도 파는 장사꾼입니다. 무사님께 드린 차는 제가 고민하고 고민해서 배합한 약초들로 우린 것이고요. 저의 영업 비밀인데 그걸 어떻게 알려드릴 수 있겠어요?”

“그런가…?”

하지만 희미하게나마 섞여 있던 그 향은,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는 것 같은 향이었다.

뭐였을까. 달콤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마냥 달기만은 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오묘했는데.

“그런데 약초는 왜 궁금해졌어요?”

“응? 아, 향기가 독특해서.”

“…향기요?”

여인의 얼굴에 순간 낯선 표정이 스쳤다. 연은 멈칫 그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러나 여인은 금세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아무튼 알려 줄 수는 없어요. 그러니 궁금해도 참아 주세요.”

어쩐지 억지로 더 캐묻기가 어려워지는 미소였다. 저런 것도 장사꾼의 수완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초에 대해 물은 뒤로 여인은 저녁이 되도록 어쩐 일인지 연이 지내는 선실에 오지 않았다. 연은 훔친 돈으로 좋은 선실에 홀로 묵는 중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부유한 것과 거리가 먼 장사꾼이니, 가장 저렴한 값을 치르고 배에 올랐을 터였다.

‘따로 선실을 잡지 못했다면 다른 이들과 다 함께 지내고 있을 텐데. 하면 옆에 사내들이 우글거릴 테지…?’

그 틈을 노려 여인을 노린다던 그 사내 무리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연하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누구 경호나 해주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니야. 게다가 나와 배에 함께 오른 모든 이들은 사인이 아니라 제국인뿐인걸. 내게 지킬 의무가 있는 건 사인뿐이야. 그나마도 이제는 무엇이 내 진짜 의무였는지 혼란스러울 정도인데, 이럴 때 제국인 여자를 보호해주다니. 그렇게 귀찮은 일을 내가 왜 하겠어?’

연은 괜히 새침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그런 생각을 곱씹었다. 평소의 모습대로였다면 새침한 표정이 꽤나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러나 우락부락한 장정이 된 채 거친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난 얼굴을 구기니, 전혀 다른 인상이 생겨났다. 그대로 뱃전에 나가 바닷바람을 쐬려 하자 다른 이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그녀를 피할 정도였다.

“아휴 저, 저 산도적 같은 자는 왜 자꾸 여기 오는 거야? 저 무시무시한 표정은 또 뭐람.”

“조용히 하고 얼른 이리 와. 괜히 시비 붙었다가 저자가 바다에 빠트리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연의 뛰어난 청력 덕에 몇몇 사람이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연은 그러거나 말거나 모른 척하며 바다에 눈길을 주었다.

잠시 풍경을 응시하던 연에게 누군가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인기척에 돌아보니, 예의 사내들이 연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장사꾼 여인이 겁내 하던 바로 그 자들이었다.

“무슨 일이지?”

연이 근엄하게 묻자 가장 앞에 있던 사내가 헤헤 비굴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이봐, 무사 나리. 무사 맞나? 검은 안 차고 있는 듯하지만 댁처럼 온몸에 살기가 자자한 자가 무사가 아닐 리 없지.”

“내가 누구든 그쪽과는 상관없을 텐데.”

“아니, 꼭 상관이 없지만은 않더라고. 실은 댁 곁에 딱 붙어 다니는 장사치 계집 말이야. 그년에 대해 나눌 말이 있어서 그래.”

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정말로 여인의 말대로 이들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한데 그건 그렇고…. 감히 누구 앞이라고 생각하고 년, 년 상스러운 소릴 입에 담는 것인가. 당장 아까 도망친 사람들 말대로 바닷물에 퐁당 담가주면 더러운 입이 깨끗해지려나?

연에게서 스멀스멀 번지는 짜증스러운 기색에, 사내가 흠칫하며 눈알을 굴렸다.

“아 잠깐만 우리 말을 들어봐. 정말로 댁이 알아서 나쁠 거 없는 정보가 있다니까? 그 계집이 무사님께 자길 지켜달라고 돈깨나 쥐여 준 것 같은데, 맞지?”

연이 침묵하자 사내는 자기 추측이 맞다고 믿은 듯 안색이 밝아졌다.

“얼마를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 푼돈을 받고 일해줄 필요 뭐 있어? 그 계집이 겉보기엔 허름해 보여도, 우리가 분명히 봤어. 그년이 자기 보따리 안에 뭔가 귀중한 걸 숨겨둔 거 같더라고.”

“귀중한 것?”

“그래, 뭔진 모르지만 틀림없이 보물이었어. 분명 보석에서 번쩍! 하고 빛이 나는 걸 우리가 다 보았다고.”

“어디서, 언제 보았는데?”

“아 우리가 배에 오른 첫날, 그년이 야밤에 혼자 뱃전으로 보따리를 들고 나가더라고. 그래서 왜 그러나 하고 몰래 따라가 봤지. 그랬더니 보따리 안에 틀림없이 보물이 들어 있었어. 혼자 그걸 확인해 보고 있었다니까?”

사내는 그 밤의 일이 생생히 떠오른다는 듯 상기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그때 그년을 확 바다에 밀어 넣어 버리고 그걸 당장 빼앗았어야 하는데-.”

연은 탐욕이 그득한 사내들의 표정에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골치가 아픈데 이런 한심하고 못난 자들까지 꼬여 들다니. 귀찮고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너희는 원래 그런 식으로 남의 것을 빼앗느냐?”

“어, 엉? 아 그야 그렇지. 아 근데 무사님 말투가 어째 좀-.”

“그만, 조용히 해. 시끄러우니.”

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명했다. 그녀의 말은 어느새 평범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용언으로 변한 채였다. 나직이 던져진 명령에 사내들은 순간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연은 못마땅하게 사내들을 바라보다가, 더러운 것을 본 눈을 정화하듯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회운성에서 지낼 때엔 언제 하신후에게 들킬지 몰라 용언을 쓰지 못했다. 마음껏 힘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피의 안개를 드리워 장막을 치고서야 간신히 힘을 조금씩 드러낼 수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곳은 망망대해 한복판 아니던가. 용언을 쓰든, 무엇을 하든, 연의 기운을 알아챌 만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배에 탄 모두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서 여정을 계속하리라.

“그거 한 가지는 참 편하네.”

연은 다시금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의지를 목소리에 담아 용언을 통해 명했다.

“너희가 그 여인을 본 일을 잊어라. 그 여인이 무엇을 가졌는지도 잊고, 그 여인에게 관심을 가졌던 일도 잊고,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그저 얌전하게 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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