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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이 되어 외진 곳을 찾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인기척이 없는 골목을 찾으려 해도, 뱀 꼴로는 길 하나 건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쳇, 외진 곳 찾는 게 쉽지가 않네. 그냥 당장 새가 될까? 아니면 그냥 사람이 되어버리든지.’
연 자신의 본래 모습만 아니라면 사람이 된다 한들 누가 그녀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대단한 신력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연에게서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연은 몇 번이나 인내심의 한계를 견디며 가까스로 인적 드문 외진 길목에 다다랐다. 으슥한 길가에 선 것은 빈가(貧家)인지 폐가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허름한 가옥 몇 채뿐이었다.
연은 주위의 기척을 살피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신하고 비로소 모습을 바꾸었다. 조그만 뱀은 순식간에 한 명의 사람으로 변했다. 다만 연이 변한 모습은 여인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본래의 가냘픈 체구와도 몹시 거리가 멀었다.
“후후, 성공했다. 역시 혼자서 모험하려면 이 정도 모습이 더 편하겠지.”
연은 만족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는 팔척장신을 넘어, 구척은 되는 듯한 거구의 사내로 변해 있었다. 우락부락하다 못해 누가 봐도 기가 죽을 만큼 험상궂은 생김이었다. 팔뚝에는 털이 무성하고 턱과 코밑에도 수염이 짙었다.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날 알아볼 수 있는 자가 있을 리 없지. 잘 됐어.”
연은 새침하게 중얼거리며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문득 하신후가 새가 되었던 그녀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때와 달랐다.
그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연락 한번 해 오지 않았다. 적이 되었다고밖에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니 괜한 기대나 감정놀음은 자신에게 독이 될 터였다.
본성 밖으로 나와 얼렁뚱땅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연은 이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비록 사방의 감시자를 피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수일 전까지만 해도 하신후를 만나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없진 않았었다. 지금도 그러한 마음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만나면,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걸까.
아직 연은 자신에게 새로 생긴 능력마저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이제 연 스스로도 혼란스러워졌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하신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능력이 그에게도 발휘되었던 걸지도 몰라. 믿고 싶진 않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의심스럽지.’
하신후는 처음부터 별 이유도 없이 연에게 호의적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늘 이상할 만큼 사근사근했다.
‘그가 내게 다정할 이유가 없잖아. 우린 처음 시작부터 모든 게 문제였던 걸지도 몰라.’
서로의 지위가 언젠가는 끝내 불행을 자초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연심이라 부를 만한 마음만큼은 진짜였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보였던 모든 태도가 이능의 농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그 사실까지 직면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는 못 하겠어. 못 하겠으면 일단 그를 피해야지, 별수 없잖아. 나도 살길을 찾아야지. 하을령도 월도 나를 노리고 있는데… 정인인 줄 알았던 사내에게까지 목숨이 노려지고 싶진 않은걸.’
목숨만 노리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하신후의 성품으로 미루어, 자신이 이능에 놀아나 원수 같은 용에게 연심을 지껄인 것을 알아챈다면 복수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살의를 내비칠 그를 떠올리니 가슴에 서늘한 날붙이가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연은 파리한 낯빛으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산도적처럼 험상궂은 거구의 모습 덕분인지 어딜 가든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내주었다. 그것 하나만은 마음에 들었다.
‘지금 내가 가볼 수 있을 만한 곳은 하나뿐이야. 내게는 단서가 더 필요해. 월에 대한, 그리고 그들의 음모에 대한 단서가.’
연이 향하는 곳은 삼진이었다. 삼진에서 그녀는 월이 꾸민 음모의 한 자락을 마주하지 않았던가.
그곳으로 가리라. 우선은 그곳 말고 달리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 * *
연은 금세 삼진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도를 알아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그저 아무 주점으로나 들어가 시끌벅적한 무리에게 물었을 따름이다. 몇 마디 묻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기겁하며 연에게 방도를 알려주었다. 아무래도 이 험상궂은 외모가 꽤 요긴하게 쓰이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일러준 대로 강가로 나가보니 과연 꽤나 큰 배가 정박해 있었다. 배 근처에는 벌써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몰린 채였다.
‘저 배를 타면 되는 거 같은데. 좋아. 이 정도면 뱃삯 정도는 치를 수 있겠지.’
연은 주머니에서 슬쩍 패물과 지전을 꺼내 확인했다.
뱀의 몸으로 도망쳤으니 딱히 가진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하여 연은 급한 대로 약간의 재물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썩 올바른 방법으로 얻은 것은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번쩍번쩍한 부자들 주머니만 조금 턴 것뿐인걸. 이 정도는 어쩔 수 없지.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나는 제국인들의 적이잖아. 당장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대신 뱃삯과 여비만 좀 빌리는 것뿐이야. 흥.’
부유한 제국인들의 재물에 조금 손댄 것으로 죄책감을 느끼기엔 당장의 상황이 벅찼다. 연은 희미한 죄책감을 얼른 떨쳐버렸다.
고귀한 신룡으로서 고작 이런 재물 때문에 좀도둑질을 했다는 수치심 역시 그러했다. 재물을 좀도둑질한 것보다는 그동안 월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면서도 자신의 기억 하나 제대로 방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수치스러웠다.
“거기 무사님, 이 배에 승선하시렵니까?”
커다란 배의 사공 중 하나로 보이는 자가 연에게 물었다. 한참 지켜보기만 할 뿐 탑승객들의 줄에 끼어들지 않으니 이상해 보인 모양이었다.
“탈 거다.”
연은 무뚝뚝하게 답하며 줄의 끝에 섰다. 한데 배에 오르기 전, 문득 좌판 하나가 연의 시선을 끌었다. 정확히는 시각에 앞서 후각을 홀렸다. 연은 초조하게 배를 주시하고 있다가 멈칫 좌판에 눈길을 주었다.
투박한 좌판에 소담하게 놓인 것은 잘 익은 살구였다.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가 단숨에 연의 주의를 끌었다.
연은 무심코 좌판 앞에서 머뭇거리고 말았다. 살구라니, 이런 와중에 스스로 자조가 나오는 일이긴 했지만 맛있어 보였다.
몇 알이라도 사 가면 어떨까? 너무 먹고 싶었다. 그동안 마음을 졸이고 긴장해 있어서인지 통통한 과실이 더욱 탐스러워 보였다.
“…무사님, 제가 내놓은 것이 마음에 드십니까.”
연은 들려오는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좌판 너머 앉은 여인이 연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얼굴을 유독 주시해오는 것이, 살구를 사려거든 돈을 내라고 넌지시 말해오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살구를 사려면 값을 치러야 한다. 도둑질해서 마련한 여비를 이렇게 간식을 사는 데 써도 될까? 잠시 치워두었던 죄책감이 다시 슬그머니 밀려들었다.
그러나 역시 죄책감은 이 상황에 썩 쓸모가 없다. 연의 여정에는 달콤한 간식도 꼭 필요하다. 이렇게 지치고 외로운 순간일수록 간식의 소중함이 빛을 발하지 않겠는가. 그리 달콤한 말을 떠들던 사내마저도 자신을 저버린 때이지만, 적어도 이 살구들은 값을 치르고 산 이상 자신을 등지지 않을 것이다. 그냥 얌전히 입속으로 들어가겠지.
“살구…. 살구를 내게 팔아라.”
그 말에 여인이 한층 물끄러미 연을 바라보았다. 딱히 손님을 골라 받을 것 같은 장사꾼은 아닌 듯한데. 왜 그러는 걸까. 연이 의아해하는 순간, 여인의 얼굴에 돌연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몇 개나 드릴까요?”
여인은 연의 행색을 슬쩍 살피더니 능란하게 말했다.
“행낭 따위가 없으니 따로 이런 것을 챙길 곳이 마땅치 않으실 듯한데…. 마침 저도 저 배에 오르니 제 짐에 함께 챙겨드릴까요?”
“저 배에 오른다고?”
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저 배를 타는 객이 왜 여기서 장사를 하고 있는데? 그쪽도 이제 배에 올라야 하는 거 아닌가.”
“네, 그렇지요.”
여인은 생긋 눈을 휘어 웃어 보이고서,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요령 좋게 좌판을 정리했다. 연의 눈앞에서 살구들이 여인의 짐꾸러미 속으로 속속들이 사라졌다.
“무사님 말씀이 맞아요. 저도 이제 배에 올라야겠네요. 한참 여기 있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잊었나 봅니다.”
연은 어쩐지 여인의 미소가 신경 쓰여 물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연에게 잊지 말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살구를 사셨으니 이제 제게 와서 달라고 말씀하시면 내어드리겠습니다. 아셨죠?”
“응. 아, 그렇지. 그런데 나는 아직 값을 치르지 않-.”
“어서 승선하세요. 이러다 배가 떠나겠어요.”
여인이 연을 앞질러 배로 향했다. 연은 우물쭈물하다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어쩐지 특이한 여인인걸. 장사꾼들은 다 이런가? 한 번도 장사꾼과 가깝게 지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배에 오르고 나서도 여인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살구를 사 주는 손님이 있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연은 엷은 미소를 드리운 여인의 옆얼굴을 가만 내려다보다가 어색하게 물었다.
“그쪽은 어디로 가?”
“저요?”
여인이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저는 삼진으로 갑니다. 그곳에 볼일이 있거든요. 무사님은 어디로 가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