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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89)화 (89/122)

89

뱀은 새 다음으로 연에게 변신하기 쉬운 짐승이었다. 새에 비해 느리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새의 모습은 이미 하신후에게, 그리고 현한과 그에게 정보를 준 누군가에게도 들켜버린 터였다. 새가 되어 회운성을 떠나려 한다면 들킬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원래라면 뱀이 되는 건 기분이 좀 이상해서 싫었는데. 사인(蛇人)의 군주라느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내가 정말로 뱀이 되다니….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지.’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무렵 하신후가 자신에게 뱀을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가 키우던 뱀이었다고 했던가.

아니, 지금은 그런 기억을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여기 없었다. 그는 연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녀를 떠나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만난다면 적의 얼굴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적이라니.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너질 듯 아찔했다.

하신후에게 연심을 고백하고, 입을 맞추던 순간이 너무나도 생생하다. 지금이라도 그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서든 인연을 놓치지 않으려 할 것만 같다. 자신을 등지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몹시도 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의 덫에 걸려들 때가 아니었다.

연은 작은 뱀이 된 채 열심히 숲을 기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성을 빠져나가리라. 그러려면 밤새 쉬지 않고 움직여야 했다.

‘내일 나를 늦게까지 깨우지 말라고 일러두긴 했지만, 그래도 한낮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사라진 게 알려지겠지. 그럼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적들이 자신을 추적하려 추적자를 보낼 것이다. 거기 붙잡히지 않으려면 어딘가로 숨어야 했다.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그것은 회운성을 나간 뒤 차차 생각해봐야 할 일이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적들의 눈에 들키지 않을 만한 곳으로 가리라. 그곳에서 새로운 이능을 통제하는 법을 익힐 것이다. 그리고 월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몸을 숨기고, 모르는 것들을 더듬어 익혀나갈 시간이.

* * *

지하는 어둡고 습했다. 희미한 불이 밝혀져 있기는 했으나 어둠은 빛에 비해 훨씬 짙었다.

하신후는 피 냄새 가운데 서 있었다. 그를 둘러싼 것은 음습하고 기이한 기운이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무표정했다.

지월에게서 통령(通靈)이 아닌 환영을 통해 연락이 취해진 순간에도 그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지월의 환영이 어른거리며 나타났다. 하신후는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그것이….”

지월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일견 차가워 보일 정도로 무심하던 하신후의 얼굴이 조금 달라졌다. 지월이 이렇게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월은 착잡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사라졌습니다.”

“…누가 말이냐.”

“연 님이 사라졌습니다. 달아난 것 같습니다. 안홍마저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월은 차마 그 이상 설명을 늘어놓을 수 없었다.

안홍은 하신후가 직접 연의 곁에 붙여두라 이른 자였다. 지월로서도 안홍이 뭐 하는 여인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신후가 그녀에게 연을 감시하라 일렀다는 것은, 응당 그만한 재주를 지녔다는 뜻일 터였다. 연은 그런 안홍을 완벽하게 따돌리고 달아난 것이다.

지월은 자신이 연에게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마치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어쩌자고 이리 손 놓고 그녀를 놓쳐버렸단 말인가.

연은 회운성 안 어디에도 없었다. 본성을 넘어, 도시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지만 어쩐지 몹시도 불길했다.

“제 능력으로는…. 연 씨를, 아니, 연 님을 붙잡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월은 불안한 음성으로 죄를 고하듯 중얼거렸다.

원래도 어쩐지 쉽게 볼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부토에서 돌아와 모습이 바뀐 뒤로는 한층 더 그러했다.

무엇이 변한 건지 정확히 종잡아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본래의 얼굴을 되찾은 뒤부터, 지월은 전보다 훨씬 더 연을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던 기이한 기운 같은 것이 저절로 그를 지배하려 드는 것만 같기도 했다.

지월은 홀린 듯 연을 떠올리다가,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그리 독특한 빛깔의 머리칼을 지닌, 그만한 용모의 미인이 돌아다닌다면 당연히 이목을 끌게 되겠지요. 어디서든 그 모습을 내비치기만 한다면-.”

“그만.”

하신후가 지월의 말을 잘랐다.

하신후는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감싸듯 가렸다. 잠시 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짧은 한숨을 삼켰다.

손을 떨구고 다시 지월을 마주했을 때, 그의 얼굴에 자리한 것은 냉막할 정도로 침착한 무표정이었다.

“…내 여인이, 마지막으로 만난 자는 누구냐.”

“몸종들입니다.”

“정말로 적의 흔적은 없었던 건가.”

지월은 틀림없이 그러하다고 답하려다가 무심코 말을 멈췄다. 하신후의 눈빛 때문이었다.

차분해 보이는 눈빛 같기도 했으나, 지월은 하신후의 곁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바 있었다. 주인의 가라앉은 눈동자에 고인 감정이 섬뜩했다.

‘역시 연을 그냥 등지시려던 건 아닌 것인가?’

한데 적이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 하신후는 그에게 연의 적이 누구인지 특정해 말해준 바가 없었다.

부토까지 그녀를 납치해 데려갔다던 그 원혼들을 뜻하는 것일까?

지월은 혼란스럽고 불안해져 더더욱 말을 잇지 못했다. 하신후는 그의 그 두려움 섞인 침묵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돌아가겠다. 그때까지 이 일은 조용히 두어라.”

“하면 병사들을 시켜 수색-.”

“내가 직접 찾을 것이다.”

지월은 동요하여 하신후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조아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지월의 환영이 사라지자 사방엔 다시금 어둠이 깊어졌다. 희미한 빛 가까이 선 하신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아무렇게나 흘러내려 있던 소매를 들춰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팔목부터 팔꿈치, 그리고 그 위쪽의 살갗에 이르기까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그저 평범한 상처가 아니었다.

칼끝으로 새겨진 고어(古語)의 글자들이었다. 하신후는 자신이 직접 상처를 만들어 새겨 넣은 고어의 주문을 말없이 확인했다.

상처에서 흐른 피는 주문을 위한 제물이나 다름없었다.

“…연아, 너는 정말이지…. 위험을 피하는 길을 모르는구나.”

하신후는 옅게 냉소하며 팔의 상처 위로 반대쪽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이 스치자 글자 모양의 상처들과 거기 고여 있던 검붉은 피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손을 거두자 나타난 것은 상처 하나 없는 팔이었다. 그는 반대쪽 팔에 똑같이 새겨져 있던 상처 역시 그처럼 감추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 땅에서….”

그가 천천히 눈을 감자, 옷깃 밖으로 드러난 목덜미에 검붉은 피로 새겨진 주문이 순간 살갗 위로 드러났다.

상처로 주문을 새긴 것은 팔뿐만이 아니었다. 목에서부터 가슴, 손끝에 이르기까지 하신후의 몸은 온통 스스로 만든 상처로 가득했다.

“…달아나면 네가 어디에 숨을 수 있다고.”

눈을 뜬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스쳤다. 다음 순간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희미한 빛조차 지워진 어둠이었다.

* * *

뱀이 된 연이 한 것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저 하염없이 사람들의 기척을 피해 땅을 기는 일이었다.

‘으아 너무 힘들다. 생각보다 뱀으로 기는 게 꽤나 어렵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뱀보다 서툴긴 해도 쥐나 고양이 같은 걸로 변할걸.’

연은 투덜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움직이기를 계속했다. 하여 끝내는 본성의 외진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이목을 피해 성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어디에 정신이 팔린 것인지, 뱀 따위에게 시선을 줄 여유가 없어 보였다.

‘설마 나를 찾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지금쯤이면 내가 사라졌단 사실도 알려졌을 거 같은데.’

지월이 병사들에게 성을 오가는 사람들을 샅샅이 조사하라 시킨 것 같기도 했다. 하여 다들 이렇게나 긴장하여 사람들을 살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덕분에 연은 성문 벽에 바짝 붙어 보다 쉽게 문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성을 빠져나간 뒤에는 그나마 한숨 돌릴 만했다. 연은 저자 쪽으로 향하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저자는 안 돼. 지금 나는 뱀인걸. 우선은 내가 사람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들키지 않을 외진 구석을 찾자. 그리고는 본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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