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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87)화 (87/122)

87

‘내가 원하지 않을 때에도 모든 사람이 내 말을 홀린 듯이 따르게 된다면…. 그건, 아주 끔찍한 일인 거 같은데.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깊은 밤, 연은 침상에 오도카니 앉아 밤을 지새웠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두려움이 밀려들 정도였다.

평소였다면 신룡에게 두려움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얼른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체면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큰일이야. 나 정말 큰일이 난 거 같아.”

혼잣말을 중얼거려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고요뿐이었다.

연은 도저히 그냥 잠들 수가 없어 창가로 걸어갔다. 창을 열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순식간에 밀려 들어왔다.

먼 하늘에 휘영청 뜬 초승달이 보였다. 초승달 곁에는 그림자 같은 붉은 달이 함께였다. 하을령의 명령을 따른다는 붉은 달은 늘 보름달인 채였다.

‘하을령은 저 달의 정령을 부려 세상 모든 일을 감시하고 있다지. 그럼 설마 지금 내 모습도 볼 수 있나. 요 며칠 내 곁의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지냈는지도 다 봤을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오싹해졌다. 연은 황급히 창을 밀어 닫았다. 창호지 너머에서 희붐하게 밀려드는 달빛마저 섬뜩하게 느껴졌다.

‘만약 내가 무슨 능력을 가진 건지 하을령이 알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될까. 내가 용인 걸 알아차릴지도 몰라. 그럼 그땐….’

연은 차마 계속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땐 그녀가 연을 죽이러 올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최악이 전쟁이라면, 최선의 경우는 무엇일까.

‘하신후가 보고 싶어.’

연은 무거운 마음으로 비틀거리듯 걸어 침상에 다가갔다. 풀썩 쓰러지니 피로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그나마 이 상황에서도 딱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게 있다면, 리경이 살인자가 아니었다는 것 하나 정도였다. 하신후가 곁에 있었다면 한껏 의기양양하게 그 사실을 전해줬을 텐데. 그는 리경이 원래 주인을 죽이고 그 책을 빼앗은 거라 의심하지 않았던가.

‘역시 리경은 그렇게까지 나쁜 녀석은 아니었어. 물론 아주 착한 녀석도 아니었지만…. 그래, 모든 사인이 착할 수는 없겠지. 제국인이든 사인이든 다들 사실은 그냥 사람일 뿐인걸.’

사람 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연은 이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현한 같이 재수 없는 자가 있는가 하면 다홍처럼 정겨운 자가 있고 리경처럼 얍삽한 자도 있다. 진희설도 지월도, 서고지기 노인도 모두들 저마다 성격이 달랐다. 제국에 온 뒤 만난 모든 자가 다 그랬다.

‘그러고 보니 왜 현한에게만 내 능력이 통하지 않았을까? 대체 뭐가 달랐던 거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라서 아무것도 모르겠어.’

연은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한숨을 내쉬는데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울어서 어쩌겠는가. 울어봤자 눈만 퉁퉁 붓고, 골치만 더 아파질 뿐이다.

“쳇, 내가 이렇게 곤경에 처했는데… 하신후는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연은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그를 찾게 되는 마음에 곤혹스럽게 인상을 찡그렸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그리 말하던 연심인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무심해진 상대에게 이리도 끈적끈적하고 추적추적하게 집착하게 되는 것이 연심이라니.

“내게 이런 꼴을 하게 만들다니, 나중에 내게 다시 돌아와 후회한다고 말해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연은 결국 눈시울을 약간 붉히고 말았다. 그러나 끝내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것만은 참아냈다. 꼴랑 인간 사내 하나 때문에 고귀한 용의 눈물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신후가 제아무리 지고의 귀족이라 해봤자, 고작 인간 아니던가.

연은 그렇게 번민 속에서 밤을 보냈다.

* * *

날이 밝았을 때 그녀를 찾아온 것은, 그녀가 애써 머릿속에서 쫓아내려 했던 하신후가 아니라 전혀 다른 상대였다.

장서각에서 서오의 곁에 붙어 있던 첩자가 홀연히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일전에 함께 있는 모습을 하신후에게 들켜 곤란해진 적 있던, 바로 그 사내였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연은 기척 없이 나타나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첩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용의 산의 신관들이 보낸 첩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연을 감시할 수 있는 건 하을령만이 아니었다. 그들도 끊임없이 연을 감시 중이지 않던가. 그러니 연이 이능(異能)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챘을지도 몰랐다.

첩자는 아무 말 없이 복도 가운데 서 있을 뿐이었다. 여기 계속 그를 세워두었다간 언제 몸종들이 나타날지 몰랐다.

“들어 와.”

연은 작은 빈방의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들였다. 첩자는 발걸음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하게 그녀를 따랐다.

“다른 이들이 너를 볼지도 모르는데 겁 없이 여기까지 찾아왔구나.”

“송구합니다.”

첩자는 별로 송구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연은 무표정하게 물었다.

“내게 무슨 용무냐.”

“신룡이시여, 저를 이곳에 보낸 것은 신관들이십니다.”

“신관이라. 엊그제는 제국의 대신관 진희설이 나를 찾더니, 오늘은 용의 산의 신관이 나를 찾는군. 나는 신관에게 대인기인 모양이야.”

연은 가볍게 빈정거리며 냉소했다. 신관이 보냈다고 말하는 걸 보니 역시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진 듯했다.

“그래서 무엇이냐. 신관들이 나를 왜 찾았다는 거지?”

“신룡께서 진정한 권능에 눈을 뜨신 것일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하여 신전에서는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하십니다.”

연은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았다. 보이는 것은 작은 방의 벽뿐이었다.

“정보가 있었다니, 누가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걸까. 재주가 좋구나. 전혀 모르겠어.”

“그것은….”

“말해다오. 누가 어디서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건지.”

첩자는 아주 잠깐 머뭇거렸으나 자연스럽게 답을 내놓았다.

“진희설의 곁에 사람을 붙여 두었습니다. 그 여인의 몸종 중에 저희 사람이 있지요. 이곳에 다녀간 후 연 님에 대한 진희설의 태도가 매우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에 의심을 품고 신전에 그 사실을 고했습니다.”

“의심이라니, 그건 꼭 적에게 쓰는 말 같이 들리는걸. 그동안 나는 너희의 적이 아니었을 텐데.”

연은 혼잣말처럼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첩자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 너희 생각대로 내게는 새로운 권능이 생겼다. 이상하게 모두가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아. 내 힘이라는 건 대체 뭐지? 남들이 나를 좋아하게 되는 힘이라도 되는 걸까.”

그 말에 첩자가 퍼뜩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표정에 연은 멈칫하고 말았다. 마치 정말로 연의 말을 긍정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아서였다.

첩자의 입에서 이어진 말은 연의 예감대로였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연 님을 흠모하고 존경하게 되는 힘입니다.”

“…….”

“경하드리옵니다. 존귀하신 신룡이시여, 이제 용의 일족의 만백성이 당신으로 인해 구원받을 것입니다.”

“구원…?”

연은 할 말을 잃고 경직되었다.

‘정말로 그런 힘이라고? 말도 안 돼. 절대로 싫어. 내가 어찌할 수도 없이, 무조건 다른 이들이 나를 좋아하게 된다니. 그게 무슨-.’

온몸에 오한이 느껴졌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죄다 몸이 떨려왔다. 구역질 비슷한 것이 치밀어올랐으나 차마 내색할 수 없었다.

며칠간 겪어보지 않았던가. 지월도, 진희설도, 다른 이들도 이상했다. 현한을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괴상했다.

그건 정상이 아니었다. 아니, 정상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연은 인간이 아니니 인간의 정상 따위는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예전의 세계가 아니었다.

연은 이제 막 그 ‘예전의 세계’에 애정을 갖게 된 참이었다. 사람들을 겪으며 처음으로 직접 세상을 알아나가는 중이었다.

“싫어. 말도 안 돼. 어떻게 하면 이 힘을 없앨 수 있지?”

연은 무심코 겁먹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묻고 말았다. 그 동요한 모습에 첩자가 놀란 기색을 보였다. 연은 입을 다문 그의 팔을 무심코 붙들며 다시 물었다.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어? 내가 이런 힘을 각성하게 될 걸 미리 알고 있었다면, 이 힘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지도 알고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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