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83)화 (83/122)

83

이렇게 다정한 말이라니.

이런 건 지월답지 않았다. 그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저게 그답지 않은 말이라는 것은 짐작할 만했다.

“내게 마음이 쓰인다니. 하지만 원래는-, 원래는 안 그랬잖아요. 안 그래요? 대체 언제부터 내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에 그렇게 마음을 썼다고…. 스스로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동안 연에게 정말로 마음을 써준 사람이라면 다홍이나 리경, 그리고 하신후가 전부다. 그런데 지금은 온 세상이 연에게 마음을 써주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이게 정말로 그저 저주흔이 사라져서 외모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연은 다시금 스산한 한기가 온몸에 번지는 것을 느꼈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이,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연은 간절한 마음으로 지월에게 물었다. 연이 판단하기에, 하신후가 없는 지금 이 회운성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지월이었다. 신력 자체만을 두고 본다면 상등 귀족인 진희설이 강하겠지만, 지략이나 술법을 수련한 정도는 지월 쪽이 훨씬 뛰어나다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성에서, 연과 이 상황을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은 지월뿐이었다. 적어도 그라면 연이 무언가 기이한 상황에 휘말려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를 찾아왔던 연은 곧 암담해졌다.

지월의 눈에 예의, 다른 이들이 내비쳤던 것과 같은 몽롱한 눈빛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아주 잠깐 내비쳤지만 연은 그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데다 기별마저 전혀 없으시니 마음이 혼란스러우실 만도 하겠죠. 그래서 모든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전하께선 늘 그러셨습니다. 이런 말을 듣기는 싫으실지도 모르지만.”

지월은 약간 머뭇거리다가 안타깝다는 듯 미소지었다.

“전하께서는 연 씨가 아닌 다른 정인들에게도 그랬어요. 제가 오래 전하 곁을 지켰으니 누구보다 잘 압니다. 기별이 없는 건 그냥 오래된 버릇 같은 거죠. 그러니 굳이 마음 아파하실 것도 없습니다.”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연은 힘없이 말을 흐리고 말았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괜히 상황을 이해시키려고 해봤자 하신후의 옛 이야기나 듣게 될 것 같았다.

‘이 상황에서도 하신후 이야기가 신경에 거슬리다니. 나도 참 큰일이네.’

적어도 지금은 하신후의 옛 정인 이야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도 연은 거의 반사적으로 묻고 말았다.

“그런데 정말로 저, 전하는 원래 그랬나요? 원래도 항상 멀리 떠나 아무 기별 없을 때가 많았던 건지….”

“예, 늘 정무로 바쁘신 분이니까요. 그러니 정말로 마음 쓰시지 말고 그저 몸을 회복하는 일에 집중하세요.”

지월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건 정말, 그저 염려가 되는 마음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

“혹시 전하께서 오랫동안 여기 돌아오지 않으시거나, 앞으로도 기별이 없으시다면, 그때는 제가 연 씨가 이곳에 다시 적응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귀찮은 소문 같은 것을 잠재우는 것쯤은 저도 도울 수 있으니까요.”

연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지월이 암시하는 바는 뚜렷했다.

“왜죠? 다, 당신이 보기엔 전하께서 내게 벌써 흥미를 잃기라도 하, 한 것 같은 건가? 하, 하긴 수일이나 깨어나지 못했는데도 걱정하는 기별 하나 없었으니까.”

“무슨 일이 생기든 연 씨의 잘못은 아닙니다. 그건 분명히 말씀드리지요. 전하께서-.”

지월은 떨떠름하게 쓴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신하된 도리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전하께서 괜히 광증에 가깝도록 변덕이 심한 사내라고 불려 오신 건 아니니까요. 그럴 만한 사내라서 그렇게 불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기든 그건 정말로 연 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마 이 성의 모두가 그러려니, 하고 쉽게 모든 걸 잊어버릴 거예요. 연 씨의 평판도 딱히 대단히 나빠지지 않을 테고요. 무엇보다도 제가 그렇게 되도록 도울 것입니다.”

자꾸 도와주겠다고 말해봤자 그다지 고맙지는 않았다. 연의 자그마한 머리는 점점 더 열이라도 오를 듯 혼란스러워졌다. 지금 그녀가 처한 상황에 이어 하신후에 대한 터무니없는 소리까지 듣게 되니, 그야말로 기절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지월은 연을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하기야, 전하께서는 아직 지금의 연 씨를 보지 못하시기도 했죠. 물론 전하께서 다시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이후의 일을 생각할 때 정말로 좋은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

“저로서도 씁쓸하네요. 전하께서 연 씨에게만큼은 조금 더 특별하게 구신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거든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역시나, 전하이신가 봅니다.”

그야말로 황망한 말이었다.

연은 혼란스럽고 당혹스러워 차마 무엇을 더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그렇다고 이처럼 선의 가득한 지월에게 괜히 화를 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정말로 하신후가 그저 변덕 때문에 이렇게 구는 걸까? 지월이 나보다 훨씬 더 그를 오래 알아왔으니까. 어쩌면 지월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아니, 오히려 그쪽이 다행일지도 모르지. 내게 이상한 일이 벌어진 걸 알고 나를 떠나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냥 변덕인 편이 더 낫잖아.’

연은 결국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지월의 말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게 이렇게 이상한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나를 피한 거라면, 그쪽이 더 상처가 되었을 거야. 차라리 원래부터 그냥 변덕스러운 사내였던 편이 낫지.’

물론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본다 한들, 마음이 멀쩡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연은 마음 한구석에서 그럴 리 없다고,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굳건히 믿고 싶어 하는 바람이 아우성치는 것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지월의 집무실을 나서는 순간부터, 머릿속이 터질 듯이 복잡해졌다.

도저히 하신후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가 내게 질리다니, 그래서 이렇게 떠나 기별 한번 없어진 것이라니…. 솔직히 믿어지지는 않아. 혹 아주 많이 바쁘기라도 한 건 아닐까?’

하지만 그는 일전에 연이 술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며 깨어나지 못했을 때, 회운성으로 빨리 돌아오려 이레 동안 잠조차 자지 않았다고 했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연이 걱정되었지만, 지금은 걱정하는 것조차 귀찮아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원래 빨리 변한다는 말을 들었던 거 같기도 해. 심지어 연인이 된 뒤로는 더 쉽게 연심을 잃게 되는 사내들도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아니,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하신후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든, 대체 연에게 왜 갑자기 이렇게 무소식으로 일관하게 된 것이든, 지금은 그걸 고민할 때가 아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부터 알아내야 해. 아니, 무슨 일이 생긴 건지는 조금 알 것 같아. 사람들이 내게 반해서-. 아니, 아니, 그건 아닌데. 사람들이 나를 예쁘다고 느끼고 내게 친절해져서-. 아니지, 정말 이게 맞는 건가? 그건 정말이지 너무 이상하잖아.’

연은 멍하니 걸음을 옮기다가, 스스로 어디로 걷는지조차 잊고 말았다. 멈칫 걸음을 멈췄을 때는 이미 가려던 길이 아닌 곳에 들어선 뒤였다.

낯선 길이라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지월의 기운을 따라서 집무실 쪽으로 돌아간 뒤, 다시 길을 찾는 것이 나을 듯했다. 피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러나 그때였다. 뒤쪽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거기 너, 연인가?”

연이 뒤를 돌자, 현한이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역시 너로군. 그 얼굴은 대체-.”

“저, 저주흔이 사라졌어요. 부토의 요기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하, 함께 사라졌나 봐요.”

현한이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뜻 모를 냉소를 지었다.

“너는 저주흔이 사라져 기쁠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형님께선 오히려 너를 보면 흥미가 가실지도 모르겠군. 그동안엔 저주흔이 있는 얼굴에 관심을 보여 온 것이니 말이야.”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연은 오히려 귀가 쫑긋해졌다.

‘뭐야, 이 사람은 내게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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