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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75)화 (75/122)

75

여인의 공포심 어린 물음에, 늙은 사내가 그녀를 단죄하듯 답했다.

“그래, 그분께서는 이미 오늘 이 자리에서 오간 모든 말을 들으셨소. 그리고 조금 전 누가 그분의 진짜 신하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보시기를 마치셨지.”

사내가 한 발짝, 여인으로부터 뒤로 물러났다. 모두가 마찬가지로 그렇게 했다. 어느새 여인은 외톨이처럼 홀로 서 있었다.

냉소를 머금은 사내 외의 모두가 시선을 피하거나,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외면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됩니다. 내게 이러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늙은 여인이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죽은 용을 되살리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게다가 그분은-! 그분은 이미-!”

[이미 짐이 어찌 되었단 거지?]

전음처럼 기묘한 목소리가 허공에서 홀연히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어린 연의 눈이 크게 뜨인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 말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에 갇혀 있는 음성이 아닌 까닭이었다. 그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단 한 번 연이 귀에 담아 본 동족의 목소리였다.

[너는 이미 짐을 져버렸구나. 나 대신 저 어린 계집이 너를 돌보지는 않을 텐데.]

늙은 여인이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쇠약한 육체가 기묘하게 뒤틀리더니 눈과 코, 입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저 악몽처럼, 너무나도 홀연하고 고요하게 벌어진 일이었다.

[너는 이미 쓸모를 다했으니 이제 짐의 부활을 위한 양식이 되어라.]

허공의 음성이 그렇게 말한 순간, 검붉은 안개가 어딘가에서 홀연히 번졌다. 늙은 여인이 한순간 안개에 감싸였다.

어린 연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사그라지는 안개 속에는 이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린 연은 새파랗게 질려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입을 벙긋거렸으나 나온 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누구도 뜻을 알아주지 않을 어린 동물 같은 신음 소리뿐이었다.

“허억, 흐어억!”

그녀의 경악어린 흐느낌에 늙은 사내 신관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연에게 다시 한번 입꼬리만 비틀어 올리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두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우리의 어린 군주시여. 당신께서는 그저 꾸준히, 훌륭하게 성장해주시기만 하면 되니까요.”

“…….”

“당신의 권능은 언젠가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는 데 힘을 보탤 수 있을 겁니다.”

사내는 연에게 그렇게 알아듣지 못할 말을 너그러이 베풀었다. 그는 연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그는 만용을 부리듯, 끝내 잔혹한 몇 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의 권능이 쓸모없었던 다른 용들처럼 미진하게 발현되는 데 그친다 해도, 어여쁜 얼굴로 아양을 부리며 하 씨 놈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쯤은 하실 수 있겠지요. 그리만 하신다면 월 님께서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사내의 마지막 말은 연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광인 같은 눈으로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그 허공의 어딘가를 향해 머리를 조아려 보이고 있었다.

그곳의 모두가 우물쭈물 그의 행동을 따라했다.

그들 모두가 확신하고 있었다. 연은 그들의 말을 모른다. 아직은 그저 어리고 어리숙한 용일 따름이다. 자신들에게 쓸모를 저울질당하는 어린 계집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놓친 것이 있었다. 그날 연은 분명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음성들이라 하여, 그저 쉬이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래. 그날 오고 간 말들이 이제 기억나. 나는 단 한 마디도 쉽게 잊지 않았어. 이제 인간의 말을 배운 나는 그 말들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어.’

연은 멍하니 과거의 어린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날 어렸던 연은 그저 단 한 가지를 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겁에 질렸으나 두려움을 감추는 것만큼, 자신을 두렵게 만든 것들을 기억하려 애썼다.

그들이 한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그저 음성의 울림을 외우며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하여 지금 연은 그날의 대화를 고스란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지금까지는 이렇게 엄청난 일이 떠오르지 않았던 거지? 저들은 내가 사람의 말을 배운 뒤로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월의 이름을 꺼낸 적이 없어. 내게 저런 불경한 언사를 쓴 적도 없지. 그렇다는 건….’

연의 머릿속에서 섬뜩하도록 순식간에 모든 것이 정돈되었다.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더는 그저 무력하게 어리지도 않았다.

‘누군가 내게서 저 날의 기억을 지워왔던 건가? 그리고 지금… 비로소 그 지워졌던 기억이 내게 돌아온 거야.’

그러나 정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연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생물이다. 아무리 하신후나 하을령처럼 강한 인간이라고 해도 연의 기억을 이처럼 흔적 없이 봉인해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기억을, 그리고 마음을 조종하는 것은 사람보다는 용에게 어울리는 힘 아니던가.

‘…설마.’

퍼뜩 연의 뇌리를 스쳐가는 답이 있었다.

‘월이 내 기억에 손을 댄 건가?’

소름이 끼쳤다. 조금 전 허공에서 홀연히 나타났던 검붉은 안개가 떠올랐다. 그 안개는 연이 피의 힘을 쓸 때 나타나는 안개와 비슷했다. 그러나 연의 것보다 조금 더 빛깔이 어둡고 기세가 흉흉했다.

게다가 안개 속의 음성은 스스로를 ‘짐’이라 칭했다. 사인들 앞에서 그리 말할 수 있는 자가 또 누가 있을까.

‘…월은 나보다 강할지도 몰라. 아니, 틀림없이 강할 거야.’

하신후가 했던 말이 문득 기억났다. 부토에서 그는 월이 다른 용들의 힘을 탐했다고 말했었다.

그것이 혹시 저 늙은 신관이 했던… 연이 월에게 쓸모 있으리라는 말과도 맞닿아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건 너무 섣부른 생각인가?

연은 그저 한없이 혼란스러웠다. 혼란 가운데서 들끓는 것은 선연한 노기였다. 연은 신관들이 자신에게 저따위로 말하는 꼴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모조리 도륙하여 살가죽을 벗겨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이빨로 목을 물어뜯고 뼈를 부수고 싶었다.

‘…쓸모라. 내게 감히 저런 얼굴로 쓸모를 운운했단 말인가.’

그러고는 연의 기억을 지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형처럼, 연을 그저 먹이고 기르며 사육했다. ‘그 권능’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으나… 아마도 그들은 연이 그것을 더욱 강력하게 발현하게 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딱히 아무 것도 발현한 기억이 없는데?’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상했다.

저들의 태도로 보아 저들은 연이 권능을 발현하게 하기 위해 무슨 수단이든 가리지 않았을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한 번, 이상한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지.’

연이 멈칫 한 가지 기억에 다다랐을 때였다.

마치 그녀의 마음속을 들추듯 눈앞의 장면이 다시 바뀌었다.

인형처럼 얼어붙어 있던 상석의 어린 연이 사라지고, 그 대신 조금 더 자라난 연이 나타났다.

그녀는 탕약을 마시고 있었다.

아니, 저런 것을 탕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연의 앞에 놓인 것은 피가 담긴 그릇이었다. 연은 차가운 피를 불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과 달리, 그녀는 곧 망설임 없이 그릇을 들어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번 마시기 시작한 그녀는 도중에 그릇을 내려놓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고 창백한 낯빛으로 차가운 피를 모두 마셨다.

“잘 하셨습니다. 존귀하신 신룡이시여, 당신의 권능으로 우리의 일족이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 말 좀 그만할 수는 없느냐?”

연은 찡그린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몸종이나 된 것처럼 피 그릇을 가져왔으나, 화려한 신관 복색을 한 채였다.

신관 여인은 뜻 모를 눈길을 하고서 연을 가만히 마주했다.

“그렇게 하시기를 원하신다면 한 번 더 강하게 바라보시지요.”

“응? 조금 전에 이미 말했잖느냐. 그만할 수는 없냐고….”

“…당신이 정말로 진심을 담아 바랐다면 저는 이미 당신이 싫어하는 그 어떤 말도 입에 담지 못했을 텐데요.”

여인의 눈빛에 알 수 없는 냉기가 스몄다. 연은 그것을 느끼고 여인을 쏘아보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걸. 나더러 용언이라도 써서 네게 명령을 내리라는 건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럼 뭐지?”

“정말로 용언 말고는 아무것도 더는 하실 수 없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피에 기댄 용언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입니다. 강력한 바람, 창생의 마음을 자유로이 조종하는 마음입니다.”

연의 얼굴에 서서히 당혹감이 번졌다.

“그게 용언 아닌가? 누굴 조종하는 용의 힘은 용언이라고 하는 거라고 했잖느냐.”

“…이제는 알아듣지조차 못하는 시늉을 하는군요.”

여인은 싸늘해진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서려는 듯 뒤돌아선 그녀에게서 작게 차가운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아니면 정말로 모자란 건가. 쓸모없는 짐승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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