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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74)화 (74/122)

74

연의 순진한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가슴속의 열감은 점차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약해져 있던 영력이 출렁이는 물처럼 몸을 덮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력의 파장도 거세졌다. 이대로라면 금세 다시 본래의 힘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신후가 붙여준 이 꼬마 의원의 치료가 정말로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그의 말대로 치료를 받길 잘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네…?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계속 과하게 뜨거운 것 같아.’

아이가 피워준 향의 향기를 맡아도, 다시 몸 곳곳에 바늘을 찔러 넣도록 두어도 열감은 자꾸 거세지기만 할뿐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한 번도 이런 느낌이 들었던 적은 없는데!’

결국 저녁이 될 즈음, 연은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보다 더 거동이 불편해질 지경에 이르렀다. 열감이 과하니 이제는 냉기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몸속에서 얼음과 불이 한데 섞여 몸을 쥐어짜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의 낯빛 역시 어느새 걱정이 짙어진 채였다.

“차라리 수면을 취하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연은 진즉 더는 정좌할 수 없어 자리에 누운 채였다. 머리맡과 발치 군데군데 켜진 향의 향기를 맡으니 그나마 어지럼증이 덜했다.

“대체 내가 왜 이러지…?”

연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물어서 무엇 하겠는가.

“곧 전하께서 돌아오실 겁니다. 전하께선 분명히 이유를 알고 계실 테니 지금은 주무세요.”

아이가 평정을 잃지 않으며 답했다.

“…너는 그를 믿는구나.”

“그분은 저의 주인이시니까요.”

아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한마디를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의 많은 일들에 대해, 그 진상을 알고 계시죠.”

진상을 알고 있다.

어쩐지 섬뜩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리고 섬뜩하게 들린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래, 그는 무엇을 묻든 순순히 답을 주곤 하지.”

연은 그렇게 웅얼거리며 숨을 골랐다.

그녀가 열에 취해 가까스로 옅은 잠에 들었을 즈음이었다. 하신후가 돌아온 기척이 전해져왔다.

눈을 떠서 그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연은 어째서인지 입술을 움찔거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대신 서서히, 방의 어둠이 무겁게 짙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야, 나는 당장 눈을 떠서 하신후를 보고 싶은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내게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냐고…!’

이제 보니 어둠은 외부에서 짙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의 감은 눈꺼풀 아래서 짙어지고 있는 듯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는 눈꺼풀 아래보다 더 깊숙한 곳에서부터였다.

‘이게 대체 뭐지?’

연은 감은 눈 속에서, 어둠을 응시했다.

어느새 현실의 모든 것이 사라진 채였다. 방도, 향들도, 아이도, 심지어는 하신후도 보이지 않았다.

연 자신의 육체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은 돌연한 허망함에 당황해 침음을 흘렸다. 그러다 퍼뜩 자신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급히 입을 열어 말을 해보니 정말로 목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어. 이건 대체….”

당황해 중얼거리던 연은 문득 말끝을 흐렸다. 어둠 속이 서서히 환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밝아지는 빛 가운데서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연은 곧 그것이 자신의 기억 속 장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지금과 똑같은 얼굴들이었으나, 그들 곁에 앉아 있는 연의 모습만은 달랐다.

‘저건… 어린 나잖아.’

치렁치렁 기른 진줏빛 머리칼을 늘어뜨린 소녀가 어른들 곁에 앉아 있었다. 소녀인 연의 자리는 분명 사람들이 마련한 상석이었다. 그러나 어린 연의 표정은 그저 당혹감에 젖어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연에게서 등을 돌린 채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는 중이었다. 신전의 중앙 궁에 온통 그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은 서서히 이것이 어느 시기의 기억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 사람의 말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할 만큼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연은 그때를 생생히 기억했다.

사람을 말을 익히기는커녕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것도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어린 연은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그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말을 들어도 뜻을 이해할 수 없으니,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저 기괴한 짐승 울음들이나 다름없었다.

기억 속의 장면은 마치 현실인 듯 또렷했다.

창백하게 질려 있는 어린 연을 앞두고서 누군가가 말한다.

“이번 의식으로 분명해지지 않았소? 이번에야말로 틀림없이 성공한 게 틀림없소.”

“속단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늙은 사내가 상대의 말을 자른다.

“용이 어떤 권능을 타고 나든, 제대로 발현하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겁니다. 옛 용들 중에서도 바로 ‘그 권능’을 타고난 용은 대부분 쓸모가 없었어요.”

‘그 권능’

이 기억의 정 가운데 자리한 것은 바로 그 말이었다.

사람들은 웅성이기를 그치지 않았다.

“말조심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의 군주입니다. 쓸모가 없다니 말이 너무 심하지 않소.”

“허, 참. 어차피 죽은 용을 두고 하는 말 아닙니까?”

“하나 어찌 되었든-.”

유독 희고 긴 수염을 기른 늙은 신관이 연의 눈치를 살피듯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린 연은 여전히 무엇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내는 다시 등을 돌리고 저희들 무리에게 말했다.

“어찌 되었든 ‘그 권능’을 발현하게만 된다면 그건 우리에게 대단한 이득이오. 잘만 된다면 제국의 그 끔찍스러운 하 씨 년놈들을 분열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오.”

“하 씨라면-.”

“황제 하을령과 그 오라비 하신후 말이오. 그 둘 말고 다른 하 씨가 이 천하 어디에 남았단 말이오?”

희고 긴 수염의 사내가 다시 연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연을 향해 입꼬리를 들어 올려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권능’은 위험하지만 참으로 쓸모가 많지. 게다가 우리의 어린 용은 여아가 아니오. 아직은 어리지만 앞으로 조금만 더 자라도….”

흐려진 뒷말에 담긴 내용은, 굳이 말로 읊어지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졌다. 상등의 상품을 평가하는 듯한 사내의 표정 덕분이었다.

그는 연을 찬찬히 뜯어보며 흡족하게 말했다.

“만일 우리의 군주께서 제대로 성장해 저만한 용모로 ‘그 권능’을 모두 발현할 수 있게 된다면 하신후 그자가 제아무리 총명하다고 해도 사내인 이상 그저 평정심만 지킬 수는 없어지겠지.”

그때 구석에서 침묵하고 있던 늙은 여인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여성체로 태어나신 용이라고 해도, 신하된 도리로 우리가 굳이 그런 일까지 권해야 하겠습니까. 저분은 우리의 군주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권한다는 거요?”

여인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일갈했다.

“하 씨 남매는 이미 용의 피도, 용언의 능력도 눈치챌 수 있게 되었지요. 하나 저분이 정녕 ‘그 권능’을 타고 나신 용이라면 저분은 굳이 피의 힘으로 용언을 쓰지 않으셔도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이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까?”

“그건…. 그건 아직 확신할 수 없소. 피의 힘이 아니면 대체 무엇으로 뜻을 펼친다는 것인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지요. 오래 전 분명 피가 아닌 다른 것으로 창생을 바르게 인도한 용이 계셨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그 권능’의 바른 쓰임새입니다.”

“하지만 우린 전설 따위를 믿고 ‘그 권능’이 온전히 전부 발현되기를 믿고 있을 여유가 없소! 아니 그렇습니까!”

늙은 사내가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조용히 그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늙은 여인이 그것은 느끼고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사내는 반대로 의기양양하여 외쳤다.

“용의 피에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오. 하니 피가 아니라 그보다 강력하고, 그보다 은밀하고, 그보다 자연스러운 힘이 있다면 그야말로 쓸모가 있겠지. 저 애는 바로 그 쓸모를 지니고 있는 거요!”

“쓸모라고요? 대체 우리의 군주를 뭐라고 여기고-!”

늙은 여인이 눈을 부릅뜨며 목소리를 높였을 때였다. 문득 궁의 공기가 바뀌었다. 여인이 흠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마 이 기운은….”

여인의 표정에 빠르게 두려움이 번졌다. 반대로 늙은 사내의 입가에는 돌연 잔혹한 냉소가 번졌다.

“오늘 이 자리에 모두를 모이게 한 이유가 무엇일 것 같소?”

상석에 인형처럼 앉아 있던 어린 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의 표정에 역시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그러나 연의 입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어린 짐승 같은 희미한 울음소리 하나 없었다.

소름 끼치는 침묵을 깬 것은 늙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경악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그분께서… 우리 곁으로 돌아오려고 하신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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