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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72)화 (72/122)

72

연은 마음이 철렁한 나머지 무섭게 생긴 바늘의 용도를 고민하는 것조차 한순간 잊고 말았다. 한 뼘 조금 못 되는 길이의 그 바늘들이 지닌 쓰임새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아이는 연의 옷소매를 걷고 팔목에 자기 손가락을 얹었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맥을 재어보는 듯싶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저, 정말로 그걸 나한테 꽂아야 하는 거죠?”

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이와 바늘을 번갈아 보았다.

“이건 아픈 게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연 씨는 부토의 사기에 당한 거예요. 그래서 해독을 하려는 것뿐이지요.”

“해독….”

연은 멍하니 그 말을 따라하며 바늘 끝에서 희미하게 번들거리는 물기를 응시했다. 흉악하게 생긴 바늘의 끝부분이 조금 젖어든 듯도 했다.

연의 눈빛에서 마지막 남은 의심 한 조각이 예민하게 꿈틀거렸다.

“그, 그럼 살짝만 찔러도 되는 것 아, 아닌가요? 왜 그렇게 큰 바늘이 필요한 건지 모르겠는데…. 약을 살갗 속으로 넣으려고 바늘이 필요한 거라면 그냥….”

더 작은 바늘로 살짝만 찔러도 되잖아.

연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아이의 미소가 조금 더 엄해진 것처럼 보이는데, 자신의 착각인 것일까?

“저는 의원입니다. 의원의 말을 믿어주세요.”

고작 아이일 뿐인데 뭐 이리 어른스럽게 느껴진단 말인가. 연은 괜히 멋쩍어져 눈을 내리깔았다.

“아, 알았어요.”

“그럼 호흡을 가라앉히고 잠시 가만히 정좌해주세요.”

한번 기세가 밀린 연은 머뭇거리면서도 아이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정말로 바늘을 들고 다가오니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여긴 적의 소굴인데. 이 의원이라고 하는 아이도 따지고 보면 적이 붙여준 자인데! 내가 이렇게 적의 소굴 한복판에서 적의 수하가 내 몸에 저 흉악한 것을 찌르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게 되다니…!’

연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고 인상을 구겼다. 그러자 곧바로 아이의 엄한 핀잔이 날아들었다.

“호흡을 차분히 가다듬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정말로 통증이 느껴지실지도 몰라요.”

“으, 응. 아니, 네.”

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다. 문득 차라리 아까 하신후에게 나가지 말고 곁에 있으라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곁에 있었다면 차라리 저 흉악한 바늘 대신 그 수려한 얼굴을 눈에 담을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조금 전에 내가 헛소리를 해서 내쫓아 놓고 곧바로 그가 아쉬워지다니. 내가 떠올리고도 부끄러운 생각이로구나.’

연은 착잡하게 눈을 감고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곧, 목 뒤쪽에 무언가가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그렇게 큰 바늘을 내 목에 꽂는 거야? 아니, 꼬, 꽂는 거예요?”

“예. 아프지는 않을 거예요.”

아이의 깔끔한 답변에 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순간 뒷목 가운데 부분쯤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닿았다.

바늘 끝이 살갗을 찌르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생각보다 더 느리고, 생각보다 더 깊숙이!

“으, 으으으-!”

연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더욱 세게 감았다. 참지 못할 만큼 아프지는 않았으나 너무나도 괴상한 감각에 까딱하면 비명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기괴하고 공포스러웠다.

‘내가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이 흉흉한 물건을 목덜미에 꽂고 엉엉 울기 직전이라니. 난 아주 고귀하고! 아주 존귀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고아한 품위를 지닌 신룡인데!’

바늘은 하나에서 끝나지 않았다.

두 개째의 바늘이 첫 번째보다 조금 아랫부분에 꽂히는 것이 느껴진 순간, 연은 머릿속이 절로 새하얘졌다. 생각해보니 상에 놓여 있던 아이의 바늘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대체 몇 개까지 꽂는 거냐고 묻기엔, 차마 입이 떼어지지조차 않았다.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으나 입을 여는 순간 그만하라는 소리가 튀어나갈 것 같아서였다.

“흐으으… 윽.”

두 번째 바늘이 살갗을 파고들기를 그쳤을 때 연의 눈에는 기어이 눈물이 맺혔다. 연은 눈가를 붉힌 채 으득, 이를 악물었다.

천천히 찌푸려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물었다.

“몇 개… 몇 개까지 나한테 그걸 꽂을-.”

연은 멈칫 말을 그쳤다. 눈앞에 보인 것이 아까 눈감기 전까지 보았던 벽이 아니어서였다.

어느 틈에 다시 들어온 건지 하신후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연은 눈물 고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

하신후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 모습에 연은 다시 마음이 약간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아까 그런 말실수를 한 것을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적어도 나가 있겠다더니 왜 다시 들어왔느냐고 묻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어떤 쪽 말도 입에 담을 틈이 없었다. 연은 아이가 세 번째 바늘을 집어드는 듯한 기척을 느꼈다.

흠칫하며 소름이 끼쳤다. 정말로 통증은 없었지만, 목에 그렇게나 흉악한 바늘 두 개가 꽂혀 있는 이물감이란 통증 못지않게 끔찍했다.

연이 잠깐만 기다려 보라고 아이에게 급히 말하려던 차였다.

“…정말로 통증이 없는 게 맞느냐.”

하신후의 시선이 아이를 향해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어 하지?”

그의 말에 연의 등 뒤에서 멈칫하는 기색이 전해져왔다.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조아려 보이는 것 같았다.

연은 하신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픈 게 아니라….”

“…….”

“나는 괜찮아.”

그가 조금 더 인상을 찡그렸다. 연의 말이 영 헛소리로 들리는 듯했다. 물론 헛소리였다. 연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입이 멋대로 거짓을 꾸며냈다.

“느, 느낌이 이상해서 그래. 정말로 아프지 않아. 그러니까….”

말을 뱉을 때마다 뒷목에 꽂힌 바늘 두 개의 이물감이 한층 생생히 전해져 와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연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꾸며냈다.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니, 저절로 그런 낯선 행동이 튀어나왔다.

“거… 걱정하지 마.”

경어를 쓰는 것도 아닌데 왜 괜히 말이 더듬어진단 말인가.

연은 그를 잠시 어색하게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날 걱정해줄 것 없이 아까 내가 한 말에 화를 내도 괜찮아. 다, 당신에게 했던 말 사과할게.”

“…….”

“…윽-.”

아니, 하신후에게 사과를 한댔지, 언제 아이더러 바늘을 꽂으라고 했던가. 연은 목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부분 즈음에 닿는 차가운 바늘 끝에 흠칫 어깨를 굳혔다. 덩달아 하신후의 얼굴도 조금 창백해졌다. 마치 그가 바늘에 찔리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는 결국 연이 목덜미에 세 개, 양 손등에 두 개씩 바늘을 꽂게 될 때까지 그녀 곁을 떠나지 못했다. 떠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바늘 개수가 늘어날 때마다 얼굴이 굳어 마지막에는 끝내 화난 사람 같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보다 못한 아이가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낼 정도였다.

“전하, 독의 기운이 승했다면 벌써 반점이 생기거나 열이 올랐을 것입니다. 지금껏 부토의 사기에 중독된 자들은 모두 그러했으니까요. 하지만 연 씨는 이리 아무렇지 않으니, 심려하실 것이 없습니다.”

하신후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보기 무섭도록 얼굴을 굳힌 채였다. 정황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움찔하고 뒤돌아 달아났을 정도로 흉흉한 살기마저 느껴졌다.

결국 아이도 그의 눈치를 보다 못해, 슬슬 자리를 피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이제 잠시 이대로 계시면 빠르게 회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원기의 회복을 돕는 탕약을 달여 오겠습니다.”

아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슬그머니 방을 나갔다.

하신후는 가만히 앉아 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좋지 않아 노려보고 있지 않음에도 마치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연은 정좌한 채 바늘꽂이가 되어 있는 자신의 꼴이 꽤나 수치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긴 여태 수치스러웠던 것이 어디 이 꼴 하나였는가. 일일이 헤아리기 시작하면 수치심으로 가슴이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왜… 왜 그렇게 화가 났어?”

연은 혹시나 자기가 아까 한 말실수 때문에 그가 아직도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일지 염려가 되었다.

“아까 한 말이라면 내가 사과했잖아.”

“…….”

“그게 아니면….”

연은 말을 흐렸다. 하신후가 그녀의 말을 기다리듯 물끄러미 눈을 마주해왔다. 연은 미묘한 부끄러움에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 모습에 그의 싸늘했던 표정이 천천히 온도를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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