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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71)화 (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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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 하신후는 진희설도, 지월도, 하다못해 쉬고 싶다는 생각조차도 떠올리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렴 쉬러 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사내는 대체 자신을 끌고 어디로 가던 중이었단 말인가?

연이 아연해지는 순간, 하신후가 말을 꺼냈다.

“미리 말하지 않은 건 사과하지. 그대는 이제부터 의원을 만날 거야.”

연은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어, 뭐라고?”

그는 대꾸 대신 연을 붙든 손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이제 보니 내내 이 손을 놓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족쇄인 양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자, 잠깐만. 저기 잠깐만! 내가 왜 의원을 만나?”

“벌써 잊었어?”

하신후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답했다.

“그대는 위험에 처했었지.”

“하지만 멀쩡하게-.”

“아니야, 그렇지 않았어.”

그는 연을 잠시 들여다보며 눈을 마주해왔다. 어쩐지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그는 진심이었고, 진지해 보였다.

“그저 진맥을 하려는 것이지, 그대의 정체를 파헤치려는 게 아니야.”

“…그건….”

그걸 걱정하고 있단 걸 어떻게 알아챈 걸까. 연은 정곡을 찔려 더욱 말문이 막혔다.

하신후의 말대로 그녀는 아직까지도 ‘멀쩡’하지만은 않았다.

신력이 완벽히 돌아온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의식이 조금 흐리멍덩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죽은 용들의 괴상한 짓거리에 당한 뒤부터였다.

마치 연의 영혼 일부를 그들에게 농락당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연은 주저하며 말을 흐렸다.

그렇다고 의원에게 진맥을 받다니. 그것도 하신후가 보는 앞에서 그리 해야 하다니. 그랬다간 무엇을 들키게 될지 몰랐다.

연은 사람으로 변신해 있었지만 정말로 사람과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가벼이 진맥하는 것이라면 별다른 차이를 들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신후가 진심으로 어떤 계략을 써서 의원에게 다른 지시를 내려뒀다면….

연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려 그의 손을 밀어냈다.

“싫어. 적어도 너하고 같이는 안 갈 거야. 나중에 나 혼자-.”

“그건 위험해.”

그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나직했다. 그는 연에게 난처한 듯한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조금 더 그녀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로 귓속말이라도 하는 듯한 자세였다.

“이곳은 부토가 아니야. 그대 혼자 두었다가 누군가 그대를 염탐할 수도 있어.”

“하지만….”

“지금 그대는 약해졌어. 그렇지?”

연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약해진 걸… 알고 있었어?”

그는 연의 진정한 힘을 모른다. 몰라야 한다. 그런데 연이 원혼에게 당한 뒤 아직 본래 힘을 모두 회복하지 못한 채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하신후는 다시금 대답이 없었다.

그의 눈빛이 어둡고도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연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을 불안하게 마주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가 다시 손을 내밀어 연의 어깨를 감싸듯 쥐었다.

“나를 믿어.”

그렇게 속삭인 하신후는 연을 부축하듯 이끌어, 다시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연은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믿으라니? 그 말은 듣기에 좋았으나, 한편으로 아리송했다.

이렇게 자기 혼자, 몰래 의원을 붙일 계획을 세우는 자를 어떻게 순순히 믿으라는 건가.

“…내가 거부할 걸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일부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거야.”

연은 언짢은 심기를 숨기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하신후는 찔리는 것이 있는 탓인지, 이번에도 답을 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어느 한적한 별채였다.

검은 기암석으로 꾸며진 뜰에 둘러싸인 별채는, 다른 곳보다도 한층 더 고요했다. 회운성 본성 어디나 대체로 적막했으나 이곳은 더욱 그러했다.

하신후는 잠깐 뜰 가운데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로 그들을 감시하는 자가 숨어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내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쳇, 대체 언제까지 능력이 다 돌아오지 않으려는 거지?’

연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비죽였다. 슬슬 정말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존귀하고 대단한 존재인지 하신후에게 아직 제대로 보여준 적도 없는데. 나더러 약해졌다는 말이나 하게 만들다니…!’

자신의 진짜 힘에 대해 얼마나, 무엇을 알고 있는지 추측해봐야 할 텐데. 그 추측에 앞서 분한 마음부터 치밀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약하다니! 약해졌다니!

연은 너무 화가 나서 더는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하신후의 뒤를 따라 별채의 방으로 들었다.

방안에 들자마자 그녀는 움찔하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냄새는….”

연은 말을 맺지 못하고 방안의 어린아이를 바라보았다. 소년은 그들에게 공손하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 놓인 기다랗고 섬뜩하게 생긴 쇠바늘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이 맡은 냄새는 바로 그 바늘로부터 나고 있었다.

마치 부토의 흙을 불로 오래 그을리고 태운 것만 같은 냄새였다. 악취라고만은 할 수 없었지만, 악취가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악취보다 더 섬뜩한 것은 악취를 담은 그 바늘들이었다. 저것은 무엇인가. 생전 처음 보는 것이나, 보는 순간 다리가 후들거리며 힘이 풀렸다. 이 섬뜩함으로 미루어 단 한 가지만이 떠오를 따름이었다.

저것은 고문 도구가 틀림없었다.

저런 것을 여기 이리 많이 늘어놓은 이유가 뭘까. 설마… 협박?

‘아까 나더러 약해졌음을 알고 있다 말한 까닭도 저것인가? 실은 모든 걸 알고 있고, 나를 우롱이라도 하려는 건가?’

연은 하신후를 홱 노려보았다.

“나를… 어쩌려고?”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가녀린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그동안 내게 친절하게 군다 싶더니…. 말했지만, 내게 설마 고문 같은 걸 가한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아무 말 안 할 거야.”

어찌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연은 일부러 더욱 세게 손에 힘을 실었다. 그나마 손톱의 통증 덕에 정신이 흐려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가 이런 짓을 할 줄이야.

배신감에 그대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노기 짙은 눈을 한 채, 하신후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는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순간이 잠시 흐른 뒤였다.

돌연 하신후가 먼저 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무표정하게 방안의 아이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조금 전 내 여인이 한 말은 잊어라. 이미 명한 바가 있으니 네가 잊어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은 분별할 수 있겠지.”

“예, 전하.”

아이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하신후는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대로 눈을 내리깐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자는 나의 심복인 환이다. 환은 의원이고, 저것들은 그가 병자를 돌볼 때 쓰는 도구지.”

연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는 나가 있도록 하지.”

그는 그 말 한마디를 더하더니, 그대로 등을 돌렸다.

연은 허망하게 등 돌린 그를 바라보았다.

‘병자를 돌볼 때 쓰는 도구…?’

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창백해졌다. 이번에는 노기나 분함 때문이 아니었다. 말실수를 했다는 자각이 밀려왔다. 저 바늘의 섬뜩함에 당황해 일단 화부터 내고 말았다.

‘내가 대체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했지…?’

연은 얼이 빠진 채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너무 힘을 빼고 앉은 탓인지, 다친 다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읏.”

“괜찮으십니까?”

환이라는 의원이 연의 용태를 살피듯 물어왔다. 연은 떨떠름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괘,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 저를 살피시는 건 되도록 빠, 빨리 끝내주세요. 저, 전하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것은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께서 제게 되도록 신중하게, 무엇 하나도 염려되는 점은 빼놓지 말고 잘 살피라 이르셨으니까요. 너무 이르게 진맥이 끝나면 오히려 제가 혼이 날걸요.”

“…그, 그렇군요.”

연은 어쩔 줄 모르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아… 큰일이었다. 이렇게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대체 그에게 고문이란 말은 뭐하러 떠들어댔단 말인가!

‘내가 미쳤었나 봐…! 나는 끔찍하게 멍청한 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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