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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인이로구나.
연은 본성의 성문 밖에 서있는 여인을 보고 한눈에 알아챘다. 저 여인이 진희설일 것이다. 아직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는데도 느껴졌다.
‘저 여인도 지월에게서 들어 내가 누군지 알고 있겠지.’
누군지 알고 있으니 더욱 저렇게 매서운 눈빛으로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토에서 제국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하신후는 회운성 본성으로 연락을 취했다. 간략하게나마 연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영을 통해 연락을 취하는 통령을 쓴 덕에, 본성의 사정 역시 지월에게서 곧바로 전해들을 수 있었다. 진희설이 수 일째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희설은 본성의 열린 성문 앞에서, 지월을 비롯한 가신들을 줄지어 거느리고 있었다. 흡사 성의 주인이기라도 한 것 같은 자태였다. 멀리서 보아도 대단한 권세가의 여식다웠다.
‘음, 뭐….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해봤자 그건 제국인들에게나 그런 거지. 나는 제국 바깥에서 왔는걸. 게다가 나는 사람이 아니라 용이니 사람의 권세는 나와 상관없어…!’
연은 괜스레 자신을 다잡았다. 사람에게 기가 죽다니, 그건 결코 용답지 않은 짓이다. 아무리 저 여인이 하신후의 소꿉친구이자 제국의 오대 가문의 일원이고, 또 제국 원신을 섬기는 대사제라 해도 말이다.
‘사람에게 용이 기가 죽다니 그건 안 될 말이지. 절대로 안 돼.’
연은 슬그머니 수그러지려던 고개를 다시 태연하게 곧추세웠다.
한데 아무래도 약간 눈치가 보이기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희설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선이 끊임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직은 이렇게나 거리가 있는데도 시선의 열기가 전해져 올 정도였다.
“괜히 같은 말을 타고 왔나 봐.”
연은 살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음?”
“저기 네 벗이 나를 노려보고 있잖아.”
연은 차마 하신후를 돌아보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진희설이 보는 앞에서 그를 돌아보고 말을 건네는 것이 멋쩍었던 탓이었다.
하신후는 잠깐 말이 없다가 부드러운 웃음기를 섞어 말했다.
“그대의 선택을 후회하지 마. 하긴 차라리 지금처럼 겁이라도 난 듯한 편이, 그대가 내린 선택에는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군.”
‘선택’이라는 말이 귀에 남았다. 연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마음이 떨떠름해지자 자연히 입술을 깨물고 싶었으나, 연은 애써 그것을 참았다.
하신후는 회운성 본성이 보이기 전, 그녀에게 물었다.
일전에 말을 꺼냈던 ‘선택’에 관한 물음이었다. 사람들에게 연이 그를 유혹한 것처럼 시늉할 것인지, 아니면 하신후가 변덕에 겨워 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처럼 시늉할 것인지, 연은 둘 중 내키지 않는 선택을 해야 했다.
사실 연은 그가 하는 말이 절반 정도만 이해가 되었다. 왜 굳이 그런 역할을 정해야 하는 건지 알 듯 말 듯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인 모양이었다.
‘그대에게는 감춰야 할 것이 아직 남아 있지. 하니 저들이 달리 웅성거릴 만한 이야깃거리를 던져 주는 편이 좋아. 그대는 스스로 거짓을 꾸미는 데 능하지 않으니, 더욱 그러하지.’
그렇게 말하는 하신후의 음성은 상냥했으나 서늘했다. 그의 말에 연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굳이 그렇게 역할을 골라야 한다면, 그가 변덕스러운 광인이 되는 편이 좋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돌아온 것은 그의 기쁜 듯한 웃음이었다.
그것이 좀 전의 일이었다.
연은 기어이 몸을 조금 틀어 하신후를 살짝 돌아보았다.
“정말로 변덕에 겨워서 얼굴에 저주흔 있는 사인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반미치광이 같은 사내로 보여도 괜찮아?”
“정확히도 짚어주는군.”
“혹시 너… 당신이, 실은 당신 역할을 잘 이해하지 못한 걸까 봐.”
“그대가 그럴 때마다…”
그가 연의 허리에 가볍게 얹혀 있던 두 손에 슬그머니 힘을 실었다.
“나를 매우 염려하는 듯해서 좀 기쁘기도 한데…”
“……”
“그래도 염려할 것 없어. 나는 정말로 기분이 좋아.”
연은 몸에 닿은 그의 손에 살짝 손을 겹쳤다. 그의 손등이 싸늘했다. 주위는 어느새 온통 눈밭이었고, 공기도 몹시 차가웠다. 연은 그의 손등을 습관처럼 주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됐어.”
부토에서 붙어 있었던 며칠간, 마음 편히 그의 손 따위를 만지작거렸다보니 어느새 버릇이 될 지경이었다. 하신후의 매끈하고 싸늘한 손등을 주무르니 약간 기분이 진정되는 듯도 했다.
귀마는 착실하게 눈 속을 나아가 성문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제 정말로 진희설을 비롯한 사람들이 코앞에 보였다. 진희설의 표정이 드디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표정 역시 이글이글 불타는 것 같던 시선 못지않았다. 연을 당장이라도 말 등에서 끌어내려 꿇어앉히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러나 막상 연과 하신후 일행이 그 앞에 다다르자, 진희설은 미소를 띠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라버니. 하필 이번 정찰만 이리 길어지다니. 기다리느라 지쳐버렸어요.”
진희설의 곁에 선 지월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하신후는 귀마의 등에서 먼저 내린 뒤, 곧바로 연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내밀었다.
부토에서 이미 몇 번 겪어본 일이라 연도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웠다. 연은 몸을 돌려 어색하게 귀마의 등에서 내리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는 하신후가 내민 손에 의지해 어설프게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 즉시 그가 연을 반쯤 안아들어 땅을 딛도록 도왔다. 그녀의 다친 다리가 아프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연이 균형을 바로 잡고 선 뒤에도, 그는 그녀의 팔을 부축했던 손을 거두지 않았다.
‘벌써부터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나 봐. 어휴, 부끄럽네.’
연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삼켰다.
귀족인 진희설과 똑바로 눈을 마주하는 것은, 예법상 조금 잘못된 일일지도 모른다. 하여 진희설의 눈치를 살피고 싶었음에도 일부러 눈을 내리깔았다.
발에 눈이 밟히는 느낌이 기묘했다. 땅에 쌓인 흰 눈에 시선을 두고 있는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희설이 말을 건 것이었다.
“이 여인이 연 맞죠? 정말로 신기한 빛깔의 머리칼이 되었네요. 부토의 저주로 이리 되다니, 부토가 유용해 보이기는 처음이에요.”
하신후가 간단히 소식을 전한 까닭에, 머리칼 색이 변한 이유를 해명할 필요가 없어진 듯했다. 연은 비로소 슬쩍 눈을 들어 진희설을 보았다.
그녀는 하신후를 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얼굴이 피곤해 보이세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궁금한 게 많지만 나중에 여쭤볼게요.”
희설은 딱히 연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따로 말을 붙여오지 않았다. 그저 하신후와 함께 본성에 들고 싶은 마음뿐인 듯 앞장서 걸음을 뗄 따름이었다.
‘나를 눈앞에 두고도 굳이 이 여인이라 불렀어. 뭔가 이상한 호칭인걸…. 꼭 내게 직접 인사를 건네기 싫은 거 같잖아.’
설마 무시하고 있단 사실을 그렇게 표현하려는 걸까?
연의 눈이 가늘게 찡그려지는 순간이었다. 하신후가 연의 팔을 부드럽게 쥐어 끌며 입을 열었다.
“난 피곤하지 않은데, 잘못 보고 있구나. 오히려 기운이 넘치고 기분도 좋은걸.”
정말로 기분이 좋다는 듯한 목소리에 진희설이 걸음을 멈췄다.
“다만 네가 궁금한 것은 네 말대로 나중에 묻는 게 좋겠다. 나는 조금 바쁜 일이 있으니.”
“네? 방금 돌아오셨으면서 또 무슨 일로-.”
“네가 보기엔 무슨 일일 것 같지?”
자신을 돌아보는 진희설을 향해 그가 싱긋 웃으며, 연의 팔목을 쥔 손을 들어보였다. 덩달아 연의 팔도 조금 앞을 향했다. 그 모양새가 꼭 붙잡힌 것을 과시라도 하는 듯했다.
진희설이 굳어 입을 다물자 하신후는 지월을 돌아보았다.
“다른 일들은 내일부터 듣겠다. 지금은 나와 내 여인을 쉬도록 가만히 뒀으면 좋겠는데.”
지월의 눈이 약간 크게 둥그레졌다. 진희설만 내치는 것이 아니라 지월 자신까지 내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지월은 당황한 얼굴이었으나 곧바로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성문을 지나자, 하신후는 정말로 연만 데리고 가신들을 등졌다. 별말도 없이 쌩하니 걸음을 옮기는 태도는 흡사 연을 데리고 달아나기라도 하는 듯했다.
물론 그것은 연에게만 그렇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사람이 일하는 걸 꽤 귀찮아하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정말로 이러고 가는 건가? 돌아온 걸 좀 더 환영받는다든가…. 그런 거창한 무언가가 전혀 없네?’
연은 속으로만 그 생각을 떠올리며 하신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누구도 귀찮게 굴지 말라고 말한 게 잘 전해졌는지 뒤를 따르는 자는 없었다.
“저기, 정말로 이렇게 그냥 가도 되는 거야?”
연은 슬쩍 하신후의 손에 제 손을 겹치며 말했다.
“어쩐지 달아나는 거 같잖아.”
“그럴 리가.”
그는 짧게 답하며 걸음을 조금 더 늦추었다. 연은 그를 물끄러미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려고?”
하신후가 그제야 연을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번져 있는 표정에 연은 움찔했다.
‘뭐,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