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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69)화 (69/122)

69

연과 하신후 일행이 부토에 머물던 무렵, 회운성에는 예고되었던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하신후의 당당한 구혼자인 대사제 진희설이었다.

회운성 본성의 화려한 집무실. 희설의 날선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번 정찰은 왜 이리 오래 걸리시는 거지? 설마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건 아닐 텐데.”

사방이 반짝반짝하고 귀한 기물들로 꾸며진 지월의 집무실 가운데서, 희설은 조급한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짜증을 냈다.

“연락조차 취할 수 없다니 참으로 답답해. 정말이지 답답하단 말야!”

제 주인도 아닌 자의 짜증에 지월 역시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그는 안간힘을 써 미소를 유지하며 공손히 답했다.

“대사제께서 무엇을 근심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겠사오나, 전하께서는 지금까지 부토 정찰에서 부상을 당하신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부토와 이곳은 본디 서로 연락을 취하기 어렵고요.”

“네가 뭘 안다는 거지? 흥, 나는 신후 오라버니가 처음 전쟁에 나가셨을 때 그 곁을 지켰던 사람이다. 네가 그분 곁에 있었던 세월이 전부가 아니야!”

“그야 물론입니다. 두 분의 지난 세월을 모르는 이가 이 제국에 있을 리 없지요.”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희설의 말에 지월의 미소 어린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도 성질 더럽기로는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다. 상대가 암만 귀족이라 해도, 아무나 다 그에게 이리 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누구인가. 그는 북왕 하신후의 충신이다. 귀족은 아니었으나 하 씨 가문의 심복으로서 불사의 권능을 함께 누리게 된 자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심복 가운데서도 하 가의 본산인 이 회운성을 총괄하고 있는 가신이다. 하니 웬만한 귀족이라면 오히려 그에게 잘 보일 궁리를 할 정도다.

그러나 대사제 진희설은 예외였다. 그녀는 하신후와 하을령의 소꿉친구다. 항간에는 대사제가 무슨 짓을 하든 황제는 결코 벌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 떠돌 정도다. 하여 자신의 오라비인 하신후에게 이리 긴 세월 끈덕진 구애를 하는 것조차 단 한 번도 말리지 않는 것이다.

지월이 공손한 태도로 일관할수록 희설의 힐난은 끝 모르고 계속되었다.

“신후 오라버니가 안 계시는 것만으로도 성안의 기강이 이 모양이 되다니. 신입 술사가 달아나질 않나, 성안에 오라버니께서 사인 여인들을 탐한다는 헛소문이 돌질 않나. 다들 오라버니 뒤에서 어찌 그리 추잡한 말들을 일삼는 건지, 흥!”

“…그것은….”

지월은 말을 보태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듣고 온 것인지 모르나, 진희설이 떠드는 말은 그가 나서서 고쳐주기에 참으로 애매했다.

우선은 사인 여인 하나가 아니라 사인 여인들을 탐한다는 소문부터 그러하다. 이것을 그의 입장에서 나서서 굳이 따지면 단 한 여인에게 빠진 것이라 정정하란 말인가? 그것은 스스로 진희설의 분노에 자신을 내던지는 꼴이 될 터였다.

그런 고약한 꼴을 자청하긴 싫었다.

어차피 하신후가 돌아오면 어떻게든 될 소동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돌아오면 비로소 진짜 소동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진희설은 아직 모르는 눈치이나 그녀가 좀 전 언급한 사라진 술사, 그녀가 바로 하신후가 빠진 바로 그 사인 여인인 까닭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지월의 표정은 처음으로 암담해졌다. 그녀를 생각하니 도저히 거짓 미소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서였다.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군. 모르겠어. 알고 싶지 않구나.’

지월의 얼굴이 말없이 구겨졌다.

그 연이라는 여인 역시 처음 보았을 때부터 무언가 느낌이 싸했다. 지월을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해준 그의 ‘촉’이 그리 말해줬었다.

아무래도 수상쩍은 구석이 있는 여인이었다. 한데 하신후가 부토로 자리를 비운 바로 이 시점에 이리 자취를 감출 줄이야.

게다가 자취를 감춘 솜씨가 어찌나 신묘한지 지월이 백방으로 애를 써도 찾을 실마리 하나 잡을 수 없었다.

찾을 수 있었다면 진작에 찾아놨을 것이다. 그의 주인인 북왕이 그 여인에게 어찌 구는지, 그가 직접 옆에서 생생히 목격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여인이 사라졌단 말인가…. 그것도 하필 전하께서 자릴 비워 나 혼자 이 회운성을 살펴야 할 때! 아아…. 내가 망조가 든 거지. 내 운수가 다 한 거야.’

지월이 푹, 푹,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서 낭랑히 힐난을 뱉던 진희설이 주춤 그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자신이 너무 과하게 나무란 것일까 비로소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지월의 한숨은 진희설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생각은 어느새 빠르게 지난날을 복기 중이었다.

그가 북왕을 섬긴지도 벌써 백여 년이다. 북왕 하신후에게는 늘 어째서인지 괴이한 소문이 많이 따라붙었다. 그중 꽤나 근거가 타당한 소문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괴소문이자 헛소문인 것들이 더 수두룩했다.

하신후는 그런 소문들을 잠재우려 애쓰지 않았다. 언젠가 그 이유를 넌지시 묻자 그는 태연하게 답했었다.

‘소문이 나쁘면 편리해지거든. 무엇보다도 혼례 이야기가 줄지.’

사백 년 넘게 살면서 혼인을 마다한 사내다운 답이었다. 확실히 하신후에게는 구혼처가 별로 없었다. 백여 년 전까지는 그나마 조금 더 사정이 나았다. 그때가 지월이 하신후의 눈에 들어 심복이 되었을 즈음이니, 더욱이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백 년 전 마지막 정인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뒤로는….

‘그 어떤 여인도 전하 곁에 가까이 오길 꺼리게 되었지. 원래도 속을 알 수 없는 구석이 있는 사내인데, 어떤 연애도 제대로 끝난 적이 없으니.’

더욱 꺼림칙한 것은 정인이 사라진 뒤 하신후가 보인 반응이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죽여 없앤 것이라는 소문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긍정하지도 않았지만.

세간에는 그가 여인 죽이기를 즐기는 광증을 가진 자라는 설이 그 어느 때보다도 기승을 부렸다.

혹자는 그가 정녕 자신의 정인을 해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더 무섭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정인이 사라졌는데 근심하는 기색 한 번 내비치지 않으니 말이다. 사람을 그저 가벼이 곁에 둔 것이 아니라면 왜 그러겠느냐는 말들이 떠돌았다.

진실이 무엇이든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지월에게는 하신후가 가벼운 마음으로 애정사에 임하는 자인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 연이라는 사인 여인이 사라진 것에도 크게 분노하지 않을 가능성이나마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예감이 나쁘단 말이지.’

백여 년 전의 그 연인 놀음과는 무언가 조금 달랐다. 지월은 지금도 그때의 하신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정인을 장기 말 대하듯 바라보고는 했었다.

그것은 분명 계략이 어린 관계였다.

그때 그의 진짜 목적이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이따금 북왕의 얼굴에 비치던 섬찟한 표정까지는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연인을 보는 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그 연이라는 여인과 있을 때는… 어찌 된 영문인지 전하께서 그때 같지 않으셨어.’

다른 이의 눈이라면 속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월 자신만은 눈치챌 수 있었다. 하신후는 진심으로 연에게 관심이 있었다. 그것이 지월의 불안의 원인이었다. 물론 그의 주인이라면 그런 마음쯤 얼마든지 필요에 따라 통제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희미한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한데 하필이면 하신후가 그리 군 여인이, 지금 지월의 관리 하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추측건대 사라진 이유는 하나뿐일 것이다. 처음부터 수상쩍은 구석이 있는 여인이지 않았던가. 틀림없이 월의 잔당이 보낸 첩자였을 것이다.

‘차라리 더 깊이 빠져드시기 전에 지금 자취를 감춘 게 전하께는 더 나을지도 몰라. 하지만 전하의 분노는 오롯이 나를 향할 텐데.’

지월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암만 충신이라 해도 그것까지는 공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봐, 내가 힐난 좀 퍼부었다고 그렇게까지 못 들을 말 들었다는 내색을 해야 하나? 흥, 그렇다고 내가 눈치라도 볼 줄 안다면 오산이야.”

진희설은 끝까지 사정을 짐작하지 못하는 시늉을 하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기실 지월의 반응을 조용히 눈에 담고 있었다. 앞에서 적당히 만만하고 속내 뻔한 자인 시늉을 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보다 능숙한 그녀였다. 그런 시늉을 하며 조용히 상대의 반응을 읽어내는 것 역시 꽤나 자신 있었다.

회운성에서 홀연히 사라진 사인 여인이 누구인지 정도는 이미 다 알아본 뒤였다. 연이라는 이름의 그 여인이 하신후와 어떤 소문에 휩싸여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저 헛된 소문이 아님 역시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 지월의 저 불안 가득한 낯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당연히 추측할 수 있었다. 지월은 하신후의 가장 가까이서 그를 지켜보는 심복이다.

하니 그가 저런 얼굴을 한다는 것은, 그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진희설이 보기에도 하신후의 이번 연인 놀음은 어쩐지 낯설었다.

무엇을 계산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추측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그랬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진희설이 고요히 주먹을 움켜쥐게 되는 까닭이었다.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그녀도, 지월도, 연이 어디 있는지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다.

그저 하찮은 첩자 정도였다면 이러할 리가 없을 텐데…. 대체 그 계집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진희설이 그 답을 구하게 된 것은 드디어 하신후 일행이 부토에서 돌아오던 날이었다.

마침 그날은 아침부터 회색 하늘에서는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내리는 눈송이 속에, 웬 기묘한 여인이 있었다. 하신후와 함께 귀마의 등에 앉은 진줏빛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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