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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68)화 (68/122)

68

이 자가 지금 자신을 놀리는 걸까? 그렇다면 몹시 못된 버릇이다.살갗에 고스란히 닿는 숨결이 간지러워 연은 결국 그를 홱 밀어냈다. 온몸에 이상한 느낌이 내달려 어쩔 수 없었다. 연의 얼굴은 온통 붉어진 채였다. 그녀는 당황해 살짝 불안정해진 호흡을 뱉으며 그를 흘겨보았다.

“자, 자꾸 스스로를 얼간이라고 부르지 마. 그건 아, 안 좋은 버릇이야.”

존칭을 쓰는 것도 아닌데 왜 말을 더듬게 된 거지? 연은 낯선 부끄러움에 말을 더듬는 것으로도 모자라 목소리까지 이상하게 쓰고 말았다. 호흡이 불안정해서 약간 새된 소리가 섞이고 만 것이다. 그 바람에 연의 뺨에는 한 번 더 열이 올랐다.

“이, 이제 그만 잘 준비나 하자. 밤이 깊었으니까 우리도 자, 자야지.”

그런데 오늘따라 자자는 말이 왜 이리 이상하게 들린단 말인가. 연은 스스로의 입을 찰싹 때려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의 웃는 얼굴은 오늘 따라 더욱 야릇할 정도로 근사했다. 이제 보니 저 눈웃음이 더없이 색스럽다. 역시나 산더미 같은 야사를 쌓을 만한 얼굴이다. 언젠가는 그 야사의 진상에 대해서도 물어야 할 텐데.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야사는커녕 야- 로 말을 시작하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내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아…. 이게 다 하신후가 너무 요사한 사내인 탓이 분명해. 잔망스러운 자 같으니.’

연은 괜한 원망을 곱씹으며 열심히 그의 눈빛을 외면했다. 그녀를 더 놀리고 싶기라도 한 건지 그는 끈덕지게도 연과 시선을 맞춰오려 하고 있었다.

얼굴이 수려하다며 연이 그를 끈질기게 훔쳐보았을 때,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제 보니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꽤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 그의 시선을 받고 있는 것이 저주흔에 얼룩진 얼굴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가 하도 내색하지 않아, 그와 있을 때면 때로 저주흔을 잊게 되곤 했다.

‘회운성으로 돌아가면… 그래서 내게 혼자 있을 시간이 주어지면… 그때 저주흔을 없애볼까? 어차피 저주흔이 있든 없든 그것만으로 이 인연이 어찌되진 않을 것 같은걸.’

이미 이 얼룩진 얼굴로도 맺게 된 인연이다.

그에게 진짜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을 정도였다.

‘부토 한 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났는데도 나를 내치지 않았어. 진짜 얼굴을 보여주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뭐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신관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연은 자신의 판단을 따를 생각이었다. 누구를 믿어야할지 알 수 없을 때는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하신후라면 자기도 믿어달라고 할지도 모르지.

갑자기 그 생각이 들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연은 새침하게 일어나 걸음을 뗐다. 그와 한참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서야 잠을 잘 자리를 정돈했다. 군용 모포를 겹쳐 놓고 털옷 뭉치로 베개까지 야무지게 만들었다.

그녀는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진줏빛 머리칼을 느슨하게 한데 모았다. 저주흔에서 벗어난 머리칼이 희게 물결쳤다.

“잘 자.”

연은 머리칼과 똑같이 진줏빛이 어린 길고 짙은 속눈썹을 졸린 듯 깜빡이며 하신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잠자리를 마련한 곳은 그에게서 꽤나 떨어져 있었다. 곁에서 자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뚜렷했다.

비록 부하들을 물리고 단둘이서 밤을 보내고 있지만… 아무튼 잠은 따로 자야 하지 않겠는가.

솔직히 연은 그의 곁에 딱 붙어 잠들 자신이 없기도 했다.

그가 자신을 덮칠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이 그를 덮칠까 봐 염려가 되긴 했던 것이다.

‘내내 보아오니 하신후는 잠을 잘 때도 굉장히 곱단 말이지. 너무 착한 얼굴로 잠들어 있어서 나도 모르게 무슨 짓이든 해보고 싶어진다니까.’

연은 휴, 작게 착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주흔 없는 얼굴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의 입술을 빼앗아보는 선에서 우선은 이 마음을 잘 다스려야 했다.

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두 눈을 꾹 감고 잠자리에 누웠다. 부토의 암흑이 순식간에 연을 둘러쌌다. 이상하게 별이 없어서인지, 오늘따라 암흑이 무게를 지닌 양 무겁게 느껴졌다.

연은 약간 불쾌했으나 꿋꿋하게 잠을 청했다. 사실 하신후의 곁에 가까이 있을 때는 이 암흑이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곁에만 붙어 있는 것은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

‘아마 이 암흑에는 희미하게나마 죽은 용들의 원념이 섞여 있는 것이겠지. 지금 나는 그들에게 당해서 조금 약해져 있으니까, 그래서 이만한 것도 견디기 불쾌해진 거야.’

자신이 무엇에 얼마나 약한지, 경험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연은 그 경험을 버텨 나가는 법을 처음으로 배워 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애써 잠을 청하던 중이었다. 어느 순간, 한결 맑고 청량한 바람 한 줄기가 그녀를 감쌌다.

하신후의 신력이 느껴졌다.

연은 졸린 가운데서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상냥하기는. 그도 밤공기 가운데 원념이 섞인 걸 느꼈나 봐.’

기운이 청량한 바람에 엷게 좋은 향기가 묻어났다. 서늘한 바람결이 이마를 스치자 절로 잠이 쏟아졌다. 연은 웃는 얼굴로 잠이 들었다.

* * *

날이 밝고 다시 일행은 귀마에 올랐다. 오늘 중으로는 성문에 다다를 예정이었다.

일행은 예정대로 순조롭게 전진했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이었다.

“아, 저기 성벽이 보여.”

연이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며 멀리 보이는 성을 가리켰다. 그녀는 변함없이 하신후와 함께 귀마에 올라 있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성벽을 응시하던 연의 표정이 멈칫 변했다.

“흐음…. 그런데 이상하네.”

“뭐가 이상하지?”

하신후가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저 멀리 사내가 보인 것 같은데. 멀어서 조그맣긴 했지만.”

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초조하게 멀리를 응시했다.

저런 곳에 사람이 있을 리 없을 텐데, 어째서 분명 누군가를 본 것만 같을까. 긴 머리를 무섭도록 헝클어 풀어헤친 사내가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한순간 스치듯 눈에 담긴 것이었으나 섬뜩한 모습이었다.

연은 그 사내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멍하니 먼 성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낯빛이 순식간에 조금 창백했다.

“…연아.”

“…….”

“부토는 전쟁이 벌어졌던 땅이다. 떠도는 병사의 원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거기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하신후의 음성이 나직이 연을 향했다. 귓가에서 들리는 그 차분한 음성에 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정말 전쟁이 일어났던 땅이라서 이상한 걸 봤나 봐. 우와, 무섭네.”

연은 중얼거리고도 내심 조금 당황했다.

자신의 입에서 무섭다는 말이 이리 순순히 나오다니. 그리 말하고도 별로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무섭다는 마음이 들어 무섭다고 말했을 뿐이다. 고귀한 신룡인 자신이 어찌 무언가를 무서워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그리 생각하는 게 평소의 연다웠을 텐데.

‘내가 언제 이렇게 변했지…?’

연은 낯선 기분에 괜스레 멋쩍게 중얼거렸다.

“꼭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것만 같은 자였어. 내가 어디서 그렇게 흉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는 장발 사내를 보았던 적 있었나. 그럴 리 없는데.”

이리 먼 거리에서 상대가 흉측한 꼴을 했는지 어쨌는지 그걸 분별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저 헛것을 본 것이 틀림없다.

연은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하신후의 시선이 연이 보던 자리를 향했다. 그의 눈빛이 서서히 서늘하게 어두워졌다.

흉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는 장발 사내.

그 말에 문득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룡 월.

그의 마지막 모습이 그러했다. 그는 긴 회색빛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두 무릎의 뼈가 다 부서져 비틀거렸다.

그 뼈를 부서뜨린 것은 하신후 자신이었다.

월은 부토에서 죽었다.

“가자. 이 흉한 땅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돼.”

하신후는 뒤에서 부드럽게 연을 감싸 안으며 귀마의 걸음을 재촉했다. 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아래쪽에서 잠시 올려다보았다.

그는 또 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쟁을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내가 보았다는 사내의 모습을 듣고 무언가가 떠올랐구나. 그게 뭘까.’

정말로 성벽 근처에 누군가가 있었던 걸까.

그 물음에 대한 답 이상으로, 지금 하신후가 떠올리고 있는 과거의 기억들에 마음이 쓰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연은 그의 품에 슬그머니 몸을 기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신후. 이곳을 흉한 땅이라 부르는 걸 보니 당신도 이곳이 무섭구나.”

그에게서 이제는 익숙해진 근사한 향취가 느껴졌다.

“괜찮아. 당신 말대로, 내 마음이나 당신 마음이 변하기 전까지는 나도 당신을 지켜줄 테니까.”

국경의 성문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회운성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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