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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가 내비치는 기색이 있다. 연은 그 모습에 자연스럽게 하을령을 연상하게 되었다.
그때 삼진으로 하신후를 만나러 왔던 하을령은, 죽은 정인 이야기를 하며 슬픈 얼굴을 해보였다. 슬픔이 지나쳐 분노가 된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 하신후의 얼굴은 그녀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달랐다. 그는 연에게 무언가를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다른 종류의 슬픔이 그에게 배어 있었다.
“연아, 너는 나를 보고 눈에 담기 좋다고 말했었지.”
하신후의 눈빛이 어두웠다. 그는 전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도, 과거를 배회 중인 사람처럼 보였다. 연은 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도 당신을… 너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
“…….”
“너는 요리도 잘 하고, 그리고 아주 잘생겼지. 그리고 강해. 네 덕분에 나는 큰 상처 없이 위기를 넘겼어.”
모든 말이 진심이었다. 진심을 말하려다보니 자연히 말투 역시 더없이 본래의 연다워졌다. 그녀는 찬찬히 말을 이었다.
“네가 이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나는 네 곁에 있는 게 조금 더 편했을 거야.”
“지금은 편하지 않아?”
“응, 편하지 않아.”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었다. 그도 더는 묻지 않았다. 더 묻는다면 연은 대답해줄 수 없을 것이다. 아직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옅게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평소처럼 나긋나긋한 음성이었다.
“예전에는 이 부토의 하늘이 더없이 지겨웠지. 툭하면 핏물로 된 비를 뿌리고, 사방에서 요기를 두르고 태어난 요마 떼를 일궈냈으니까. 그리고 내 적은 이곳에서 다른 어떤 곳보다도 강했어.”
“…월이라는 용을 말하는 거야?”
“그래, 월은 그 이전에 죽은 용들의 유골을 찾아 이 땅에 새로 묻었어. 원혼을 깨워 그 힘을 취하려 들었는데….”
그는 잠시 예전 일을 떠올리듯 눈살을 찌푸렸다.
“잘 된 건 아니었는지 모든 게 더 엉망이 되었지. 월은 원래도 포악한 짐승이었지만… 아, 네게는 썩 듣기 좋은 말이 아닌가?”
“으, 응? 아니… 그렇지는 않은데.”
연은 얼른 태연한 내색을 해보였다. 그러나 놀란 가슴이 쿵쿵 뛰는 것까지 막기는 어려웠다. 왜 갑자기 연에게 듣기 나쁜지 물은 것일까? 설마 연이 월과 같은 용이라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했나. 그래서 포악한 짐승이라는 부름에 언짢아진 것인지 물은 걸까.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뒤엉켰다. 다행히 이어지는 하신후의 말은 연의 두려움을 빗나가 있었다.
“이상하군. 부토 밖으로 달아난 너희 용의 일족은 아직까지 월을 섬기고 있는 것 아니었나.”
“그, 그건….”연에게 월은 죽은 용일 뿐이었다.
신룡은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고귀하고, 또한 고고하다. 하여 다른 용과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간 용은 없었다.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연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월의 죽음이 전제되어야 했다. 하나의 용이 죽은 뒤, 비로소 다른 용이 깨어난다. 그것이 용의 탄생과 죽음에 얽힌 조건이었다.
그러니 하신후가 월을 어떻게 여기든, 용이라는 생물 자체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면 연에게 딱히 크게 거슬리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제국에 들어온 후, 연 역시 월의 존재가 서서히 신경에 거슬렸다. 삼진에서 사람들을 제물로 쓰려 했을 때, 그때 도시를 점령하고 있던 것 역시 월의 피 아니던가.
연은 하신후를 빤히 보며 새침하게 말했다.
“말했잖아. 나는 모르는 게 많아. 누굴 믿지도 않고, 섬기지도 않아. 월이든 다른 용들이든 마찬가지야.”
그 말에 하신후가 재밌다는 듯 눈까지 휘어 웃음을 내비쳤다.
“그래서 죽은 용의 원혼들이 그대를 해치려 한 건가. 버릇이 없어서.”
“그럴 리 있겠어.”
“나는 그대가 원하기 전까진 아무 것도 묻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내 동생은 그대에게 점점 더 관심을 갖겠지.”
돌연하게 날아든 서늘한 말에 연은 움찔, 그를 돌아보았다.
“돌아가면 장서각이 아닌, 조금 더 내 가까이에 있는 곳에서 일하게 될 거야. 그 편이 안전해.”
“나를 지켜주기라도 할 생각인가 보지.”
연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괜히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하신후는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너무 순순하고 빠른 답에 마치 농인 양 들릴 정도였다.
“말했잖느냐. 나는 네게 빠져 있다. 네 마음이나 내 마음이 달라지기 전까지는 너를 지킬 거야.”
그가 자신을 지키다니. 너무나도 괴상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연이 지켜야 할 자들은 많았지만 연을 지켜주겠다는 자는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연은 누구보다도 고귀하고 강한 존재다. 일족을 구원할 숙명을 짊어진 군주다.
하신후는 계속 눈을 휘어 눈웃음을 지었다. 농을 뱉듯 가벼운 말투였다.
“네가 나를 지키고 싶다는 말보다는 내가 너를 지키겠다는 말이 더 믿기 쉬워 보이는 듯한데. 그렇지 않은가.”
연은 대꾸 대신 남은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따스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있어서일까. 사실은 그가 자신을 지키겠다는 헛소리가 썩 듣기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그게 문제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연은 차마 그의 얼굴에서 웃음을 사라지게 만들 수 없었다.
‘그는 전쟁을 증오해. 그리고 나는 전쟁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이곳에 보낸 자야. 그는 그 사실을 알면 나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볼까.’
적어도 지금 같지는 않겠지.
모든 것이 변해버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의 이 순간이, 죄로 물든 이기적인 꿈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기적이구나. 내가 이렇게 이기적이라니. 처음 알았어.’
연은 마음이 아파오는 것을 감추려 일부러 더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하고 나니 하신후가 과일을 주었다.
새가 되었을 때 먹었던 바로 그 과실이었다. 연은 저도 모르게 헤헤 웃으며 그가 껍질을 깎아 주는 과일을 받아먹었다.
새가 되었을 때도 그의 손에서 먹는 것이 마음에 들었는데, 사람으로 지내니 더 좋았다. 그가 직접 과일을 깎아 입에 넣어준 덕분이었다.
연은 순순히 과일을 받아 아삭아삭 깨물어 먹었다. 달콤하고 서늘한 과육이 연의 고민마저 잠시나마 달래주는 듯했다.
“하신후. 당신은 전쟁 중에 본 부토의 하늘이 싫었겠지.”
하신후는 연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딱히 호칭을 정정해주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연은 그가 순순히 그녀의 부름을 받아들인 것이 만족스러워 엷게 미소지었다.
“나는 이 하늘도 싫지 않아. 이 땅도 싫지 않아. 여기 계속 이렇게 당신과 있어도 괜찮을 거 같아.”
“…그러한가.”
“음. 언젠가는 질릴 수도 있겠지만?”
연이 농인 듯 중얼거리며 웃자 하신후도 웃음을 보였다.
“정인을 코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그대는 잔인하군.”
“응?”
그에게 질린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건 아니었다. 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뜻을 정정해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연의 이마에 또 입을 맞춘 까닭이었다. 그는 연의 뒷머리를 가벼이 끌어당겨 그대로 이마에 입술을 댔다. 마치 그리 해서 연의 체온을 재기라도 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잠시 놀라서 굳었던 연은 어정쩡하게 두 손을 허공에 띄운 채 멈춰 있었다. 그는 연의 살갗에서 살짝 입술을 뗀 채 뭉개진 발음으로 말했다.
“나는 보기보다 상처를 잘 받는 편이야. 조심해 줬으면 좋겠군.”
말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이마를 누르듯 스치는 입술도 곤란했다. 연은 놀라서 굳은 채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소리를 흘렸다.
“…어….”
“이렇게 천하의 얼간이처럼 그대에게 빠져 있는데, 내게 질릴 거라는 말은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