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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64)화 (6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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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연은 정말이지 그 점에 대해 꼭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자신인 것을 알아보고서도 현한에게 내맡겨 두다니.

아무리 연이 달아날까 봐 모른 척한 것이라 해도 너무 무심하지 않은가. 그의 투기심이란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인가?

투기심이 작은 것은 사실 연에게 품고 있는 마음 자체가 별 것 아니라서 그런 것 아닌가?

별 것 아닌 마음을 가진 주제에 왜 자꾸 연의 몸은 이곳저곳 매만져댄단 말인가?

설마 갑자기 연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에 홀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따져 묻고 싶은 것이 가득했다. 지금은 아직 체력이 다 돌아오지 않아, 때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새의 정체를 알면서도 현한 곁에 둔 건 저, 전하십니다. 음, 그런 걸 투기심이라고 할 수는 있는 건지 모, 모르겠는데요.”

연은 부러 말을 높이며 새침하게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건-.”

하신후가 찌푸린 눈으로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좀 전까지 자신을 두고 무슨 말이 오갔는지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현한이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현한은 대뜸 연을 보며 물었다. 연에게 말을 높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연은 생소한 느낌에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와 말을 섞는 것이 새삼 어색했다.

그야 그럴 만했다. 하신후에게 말했듯, 새였을 때 그에게 호된 꼴을 당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가 수상한 약을 억지로 먹이던 순간 역시 똑똑하게 기억났다.

연은 한참이나 현한을 쏘아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것이 끝이었다.

하신후는 연의 그런 모습에 엷게 미소를 지었다. 현한이라면 질색하게 된 연의 반응이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현한은 그런 하신후를 기가 차다는 듯 바라보았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으신가 봅니다. 형님께서 이리 기분 좋아하시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래, 내내 열이 있어 걱정했거든.”

대꾸하는 하신후의 음성이 더없이 산뜻했다.

“내 여인이 계속 앓아야 했다면 화가 나서 저기 떠도는 원혼들을 조각조각 다시 멸하고 싶어졌을 텐데. 오늘은 이리 나아져서 다행이지.”

화사하게 웃는 하신후의 표정에, 현한의 얼굴이 숨길 생각조차 없이 떨떠름해졌다.

“…거 참 다행이로군요.”

“그래, 정녕 다행이라 여긴다면 돌아갈 채비를 서둘러라.”

하신후가 힐끗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곧 이곳에는 다시 혈우가 내릴 듯하군. 전처럼 긴 비는 아니겠지만, 내 여인에게는 편치 않을 것이다. 너희에게도 그렇겠지.”

혈우라는 말에 현한이 움찔했다. 부토의 음기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듯했다.

“서두르겠습니다.”

현한이 등을 돌리기 무섭게 연은 당황해서 하신후를 돌아보았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음?”

하신후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연을 마주해왔다. 연은 조금 붉어진 뺨을 한 채 중얼거렸다.

“…그거, 내 여인이라고 자꾸 부르는 거 말이야.”

하신후의 눈빛에 웃음기가 어렸다. 역시 일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지? 연은 당혹감을 지우지 못하고 그를 가만히 보았다.

“굳이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저 사람들은 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짐작하고 있을 거야.”

진희설의 귀에까지 소문이 잘 들어가도록 부러 그러는 것일까. 한데 그것이라면 그리 철저하게 시늉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연이 대뜸 나타나 하신후를 끌어안았던 순간, 그걸 지켜본 모든 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회운성에 돌아가면 어떤 소문이 퍼질지 짐작이 되었다.

“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날 두고 당신에게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여인이라고 떠들 텐데. 굳이 이상하게 부르지 마.”

연이 떨떠름하게 당부하는 순간이었다. 하신후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그런가?”

“그렇지.”

연은 괜히 마음이 복잡해져 그의 시선을 피했다. 사람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그저 부끄러움 때문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떠드는 말은 고스란히 용의 산의 신관들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연을 여기 보낸 자들은 여전히 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첩자들이 하신후와 연의 관계를 어떻게 전할지, 생각만 해도 착잡했다.

그때였다. 초조하게 저만치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던 연의 시야가, 한순간 방향을 달리했다. 하신후가 연의 뺨을 그의 쪽으로 가벼이 당긴 까닭이었다.

“어-?”

연이 멈칫하며 그를 올려다보자, 이미 겪어본 적 있는 감촉이 이마에 닿았다. 또 이마에 입을 맞춘 것이다. 쪽, 하고 장난스레 입술이 닿는 소리가 어느새 귀에 익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뭐… 하는….”

연은 놀라서 그를 올려보았다가, 퍼뜩 무언가를 깨닫고 멀리 있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그들은 안 보는 척하면서도 이쪽을 열심히 곁눈질 중이었다. 연은 당황해서 하신후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보라고 일부러 그런 거야?”

하신후는 대답 대신 미소를 내비쳤다. 그 미소의 뜻을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 틀림없었다. 사람들에게 일부러 그가 추근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대의 선택을 따르도록 하지.”

그가 뜻 모를 말을 꺼냈다.

“그대는 앞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내 관심을 끌려 한 요부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어쩌다 미치광이 같은 내 눈에 들어 변덕스러운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가련한 여인이 될 수도 있어.”

연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까닭이었다.

“나 또한 그대에게 이 두 가지 말고 다른 선택지를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리 하려면 우리에겐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신후는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연도 몇 번쯤 본 적 있는 담담한 눈빛이었다.

“생각해 봐. 시간을 주지. 회운성에 돌아가기 전까지는 답을 줘.”

연은 흐음, 하고 작게 한숨을 삼켰다.

“당신은 늘 내게 선택을 하라고 하네.”

하신후의 말이 옳았다. 사람들은 연을 두고 어느 쪽으로든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그도 그럴 법했다.

북왕 하신후는 제국 제일의 권세가였다. 지금은 이리 쉽게 손을 뻗어 만질 수 있는 사내이지만, 실은 대단한 자인 것이다.

제국에서 연의 지위는 일개 사인 술사일 따름이다. 안 그래도 사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세상이 아니던가.

그의 말대로 연이든 하신후든 둘 중 하나는 요사스럽거나 미친 자가 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둘이서 이리 가까워진 까닭을 흥미진진하게 풀이할 거리가 없으니 말이다. 소문에는 늘 그처럼 자극적인 거리가 필요한 법이었다.

나직한 음성이 연의 귓가에 찾아 들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나에 대한 소문은 이미 그리 좋지가 않아. 그러니 부담 가질 것 없이 내 광증에 관한 소문에 기대기를 권하지.”

그가 그리 말할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신후의 손이 또다시 버릇처럼 연의 머리칼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건 광증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야?”

“아닌가?”

그야 그렇다. 연은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이니까.

그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장난기어린 미소에 연은 무심코 따라 웃고 말았다.

둘의 머리 위에서 하늘은 천천히 검붉은 기운을 더해나가고 있었다.

혈우가 쏟아진 것은 일행이 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다행히 혈우가 내리는 것은 그들 뒤편의 땅뿐이었다. 감시탑의 잔해 위로, 하신후의 힘에 의해 소환된 숲을 원망하듯 붉은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뒤편에서 내리는 비였으나, 냄새는 그들이 있는 자리까지 번져왔다. 그악한 악취에 연은 절로 코를 감싸 쥐었다. 악취에 취약한 것은 용이 지닌 가장 큰 약점일 것이다.

“으으…. 정말 싫은 냄새야.”

연이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가, 얼른 등 뒤의 하신후의 눈치를 살폈다. 이리 몸이 바짝 붙어 있게 될 줄이야.

귀마의 등에 오른 것은 처음이었다. 연은 말을 타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 말을 들은 하신후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를 자신의 말에 태웠다.

살아 있는 말이 아니라 귀이니 하나가 타든 둘이 타든 무게를 느끼지는 않으리라. 그 사실 하나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말에게 고생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것 말고는 모든 것이 문제였다. 우선은 무엇보다도 자세가 그러했다.

하신후는 연을 거의 뒤에서 껴안다시피 하며 귀마의 고삐를 느슨히 쥐고 있었다. 혈우의 비릿한 악취 가운데서도 이따금 그의 향취가 섞여들었다. 그 정도로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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