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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59)화 (59/122)

59

“넌 내 눈앞에서, 죽을 수도 있었어.”

그 말에 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신후가 연과 느릿하게 눈을 마주쳐왔다. 이 표정을 무엇이라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연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듯했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하신후였다.

“조금 전 그 소란에 의술사가 죽기라도 한 건가. 왜 다친 이가 있는데 와보는 자가 없지.”

낮게 뱉어진 그 말에 누군가가 황급히 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의술사라 해도 부토에서 영력을 운용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약과 붕대만을 가지고 연의 발목을 살피기 시작했다. 상처에 약이 닿으니 통증이 느껴졌다. 연은 긴장한 가운데서도 인상을 찡그렸다.

“읏-.”

그러나 마음 놓고 아프다 투덜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어디 연이 그럴만한 처지였던가. 연은 짜증스럽게 인상을 쓰다가, 멈칫 하신후의 눈치를 살폈다.

‘화가 난 게 분명해. 화가 난 건 처음 보는데, 대체 어쩌면 좋지…?’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진 후유증인지, 계속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팔다리가 늘어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희미하게 손끝이 떨리는 듯도 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연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원혼을 무시하다가 도리어 그들 손에 당할 뻔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었다.

‘아냐, 그래도 설마 정말로 죽기야 했겠어? 그 고얀 원혼들이 나를 감히 이 꼴로 만들다니, 다음에는 결코 가만두지 않겠어.’

연은 애써 분노를 삭이며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러자 그 행동을 어찌 받아들인 건지, 하신후의 얼굴이 덩달아 굳었다.

“…좀 참아.”

연이 상처의 통증에 그러는 것이라 여기기라도 한 듯했다. 참으라 말하는 그의 음성이 조금 전보다는 덜 살벌했다. 아니, 여전히 살벌한 태도였으나 무언가가 달랐다.

연은 그 음성에 퍼뜩 눈빛을 달리했다.

‘맞아, 그러고 보니 하신후는 겉보기와 다르게 꽤 동정심이 많았지? 새가 된 내가 나란 걸 몰랐을 때부터 챙겨줬었잖아. 차라리 동정심에 호소해보는 게 좋을지도 몰라!’

“아이고, 주, 죽을 거 같다. 주, 죽, 죽을 뻔했네…. 정말로.”

“…….”

“으으, 아파라. 너무 아프다. 깜짝 놀라서 혼이 다 달아난 거 같기도 하고….”

“그만 해.”

하신후의 짧은 한숨에 연이 뚝 말을 그쳤다. 그녀가 말을 그치자 그들을 둘러싼 침묵이 한층 무거워졌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었다.

이윽고 의술사가 진땀을 흘리며 치료를 마쳤음을 고했다.

“거, 걷는 것만 조금 조심하면, 아니 조심하시면 괜찮을 것입니다.”

그래, 의술사가 하대와 경어를 섞어 쓰는 것부터가 상황의 석연치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연은 서서히 자기 처지를 실감했다.

그녀는 지금 이 부토 한복판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그것도 모자라 나타나자마자 하신후의 품에 안겨 그를 부서져라 끌어안았다. 그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거머리처럼 엉겨 붙었다. 그 모습이 만천하에, 아니, 여기 모인 모두 앞에 여실히 드러나 버린 것이다.

하신후가 다시 연의 앞에 몸을 굽혀 앉았다. 의술사가 감은 붕대를 살피는 듯했다. 그러다 그가 연의 상처 위로 손을 가까이 했다. 뭘 어쩌려는 거지?

“-!”

연이 움찔하는 순간이었다. 상처로 냉기어린 기운이 전해져왔다. 하신후의 영력이었다. 통증이 조금 줄어드는 것도 같았다.

‘나, 남들 눈엔 대체 이게 어떻게 보일까.’

연의 뺨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설마 날 치료해주고 난 뒤에 다시 고문이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정체가 뭔지 알아내려고 날 어찌 하려는 건 아니겠지?’

솔직히 그럴 거 같지는 않았다. 고문할 상대에게 이리 구는 자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이 사내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뒤 다시금 상처에까지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잘 해주는 거지?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연에게 무턱대고 잘 해주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조금 전 안겨 있던 그의 품이 얼마나 좋았는지 떠올랐다. 갑자기 가슴이 욱신거릴 정도로 저렸다.

연의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머리를 거치기도 전에 손이 튀어나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

이번에는 하신후가 크게 움찔했다. 연이 돌연 그를 제게로 끌어당긴 탓이었다. 연은 하신후의 옷깃을 쥐고 끌어당겨, 그와 얼굴을 가까이 했다.

하신후의 놀란 빛이 어린 눈동자와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저런…!”

“헉…!”

곁에서 지켜보던 자들의 경악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신후의 눈이 일그러지며 커졌다. 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신후의 입술을 탐했다.

맞닿은 입술은 따스했다. 그리고 살짝 피 맛이 느껴졌다. 충동이 격해 저도 모르게 그를 잡아먹을 듯 군 모양이었다. 연의 앞니가 그의 아랫입술에 작은 생채기를 남긴 것이다.

연은 혀끝으로 그의 생채기를 가벼이 핥았다. 그를 붙잡은 손에서, 그가 움찔하는 것이 생생히 전해졌다.

“하아….”

연은 잔뜩 불안정해진 호흡을 뱉으며, 떨리는 손길로 그를 놓아주었다.

두근-.

연의 가슴이 묵직하게 뛰었다. 귓가에서 박동이 울렸다. 연은 두서없이 숨결 섞인 속삭임을 뱉었다.

“이렇게 나를 구해준 뒤에, 이제부터 나를 추궁할 거야? 추궁당하는 건, 음, 나쁜 일이지. 미안해. 하지만 나쁜 일이 벌어지기 전에 한 번은 이렇게 하고 싶었어.”

연의 혼란 가득한 변명에도 하신후는 대꾸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살피니, 하신후의 입술에 남은 생채기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연은 멍하니 그의 핏방울 맺힌 입술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이제 당신이 한 말이 이해가 가네.”

연은 하신후의 핏방울 맺힌 입술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일전에 연이 입술을 깨물어 상처가 남자, 그가 말했었다. 사람들이 그걸 두고 그의 탓이라 할 거라고 말이다.

그때는 그 뜻이 이해 가지 않았건만 비로소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가만히 굳어 있기만 하던 하신후의 입에서 말이 뱉어진 것은 그때였다.

“물러가라.”

연은 멈칫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자신더러 물러가라는 건가? 연이 당황하는 순간, 그가 연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그의 시선이 주위를 향했다.

“…다들 물러가!”

부하들에게 그가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연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하신후의 귓가가 붉디붉었다. 목도, 뺨도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오늘 밤 이 여인 곁에 다시 나타나는 자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밤? 아직 아슬아슬하지만 해도 저물기 전인데, 밤이라니?

연이 당혹하며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사람들은 정말로 슬금슬금 물러나는 중이었다.

하신후가 부토 위로 쏟아 붓듯 옮겨온 숲의 토막들은, 제법 진짜 숲처럼 넓고 울창했다. 사람들은 금세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뭐, 뭐야, 정말로 다들 보내버리는 거야? 대체 어디로? 아무리 야영지가 다 쑥대밭이 되었다 해도 여긴 그냥 숲속인데?!’

연과 눈이 마주친 하신후가 슬쩍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훈련 받은 자들이다. 부토도 아닌 숲이니, 하룻밤 정도는 아무 데서나 곯아떨어질 수 있어.”

연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저들이 다 나를 보, 보았는데…. 이대로 아무 설명도 안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연이 더듬거리자 그가 다시 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화가 난 눈빛이었다.

“네가 변명을 늘어놓을 상대는 나이지, 저들이 아니지 않나?”

“그거야… 그런 거 같기도 하지만….”

어설피 웃으며 연은 그의 손에 붙잡힌 손목을 슬쩍 뒤로 거두었다. 그러나 하신후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아프게 움켜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손은 마치 그가 새인 자신에게 채웠던 족쇄 같았다.

“그럼 설명해 보거라. 이게 무슨 상황인지.”

그가 물끄러미 연을 들여다보았다. 어디 무엇이든 변명해보라는 투였다. 귓가도 뺨도 아직 붉기만 한 사내가 뱉기에 썩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연은 생채기가 난 그의 입술을 슬그머니 쏘아보았다.

‘변명을 늘어놓아야 한다니, 그래. 당신 말이 맞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도 묻고 싶은 게 없진 않아. 이리 단번에 나를 알아본 걸 보면, 내가 새일 때 어느 정도 눈치를 챘던 거잖아. 그런데 요 며칠 왜 날 무시한 거지? 왜 현한 곁에 내버려 둔 거야?’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부하들이 없어지니 이 틈에 내 목숨이라도 빼앗고 싶어진 건가.”

조금 전까지 연에게 순순히 농락당했던 입술이 헛소리를 뱉었다. 연이 침묵하자 하신후가 사납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또 날 덮쳐서-.”

“아니야.”

연이 손목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을 홱 뿌리쳤다.

“그럴 리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자신이 화낼 입장이 전혀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황당한 소리에 돌연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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