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그래, 분명 서운하지는 않았다. 한데 그럼 이 기분은 대체 뭘까.
“쯔그그그….”
연은 슬그머니 밀려드는 허탈함에 부리를 딱딱거렸다. 한데 그 순간이었다.
통-!
다짜고짜 연의 옆머리로 현한의 손가락이 날아들었다.
“또 시작이로군. 네가 내 손가락을 물어뜯기 전에 네 부리를 그리한다는 걸 이젠 잘 알겠다. 앞으로는 그리할 때마다 내가 먼저 널 혼내주지.”
‘멍청한 주제에 폭력적인 녀석! 아무것도 모르면서 감히 내게 손찌검을 해?’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에 씩씩거렸으나 현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연이 사납게 부리를 휘두르자 그는 픽 코웃음 쳤다.
“다시 한번 날 물면 그때마다 굶겨주지. 어디 그것도 버틸 수 있나 보자.”
굶기다니. 하신후도 관심을 거둔 이때에, 현한의 말은 치명적이었다. 그가 아니면 지금의 연에겐 정말 먹이 줄 사람이 없을지도 몰랐다. 연은 결국 잠자코 현한의 손에 쥐여 끌려 다녀야 했다.
함께 온 술사들이 요기가 깊이 스민 곳들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몸에 깃든 영력이 부토에서 봉해졌어도 가져온 부적 등으로 어느 정도의 일은 처리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무장들은 그들 곁에서 무너져 내리는 잔해의 조각들을 방비했다.
현한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멀뚱히 서있었다.
“쯔그그. 쯔그그그….”
‘한심한 녀석 같으니…. 그럴 거면 뭐 하러 따라 들어온 거야?’
잔해가 뒤틀리며 훼손된 까닭에 작업은 어수선하게 진행되었다. 술사들은 외부에 난 계단과 탑 안쪽을 오가며 부지런히 원혼의 흔적을 찾았다. 어느새 그들은 잔해의 맨 위층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때였다. 연은 멈칫 섬뜩한 기운에 주위를 돌아보았다. 볕이 미처 들지 않는 무너진 기둥 아래편, 무언가가 보인 듯도 했다. 마치 어제 하신후를 찾으러 다니던 중 처음으로 보았던 인영과 같은 무언가가.
‘뭐지? 저건 원령이 아닌 거 같은데?’
어제 하신후가 멸하던 원령과는 달랐다. 연이 긴장하며 그 기둥 아래 어둠을 노려보는 순간이었다.
두근-.
연의 가슴이 한 순간 세게 뛰었다. 호흡이 뒤엉키며 숨이 막혔다.
‘뭐, 뭐야! 수, 숨 막혀!’
연이 괴롭게 인상을 찡그렸다. 돌연한 통증에 눈을 꽉 감고 만 찰나였다.
두근-.
다시 한번 세차게 가슴이 뛰었다. 메스꺼움과 어지럼증이 연을 덮치는 동시에, 주위의 소리가 모두 사라졌다.
눈을 뜬 순간 연은 암흑 속에 있었다.
환청이 연을 덮쳤다.
[너, 너는, 너는 미물이 아니로구나. 너는 우리와, 우리와, 같은-.]
또다시 그것이었다. 하나라고도, 여럿이라고도 할 수 없는 괴이한 목소리.
“미물 이야기는 지난번에도 했었잖아. 너 죽은 용 맞지? 날 좀 내버려 둬. 죽었으면 곱게 저승으로 가면 안 되는 거야?”
연은 짜증스럽게 메스꺼움을 견디며 외쳤다. 한데 이번에는 환청의 주인의 상태가 저번보다 더 좋지 못했다.
[저승? 저, 승? 네가 나를, 우, 리, 를 깨웠던 것을 잊었느냐? 너는 나, 를, 먹었다. 우, 리를, 먹으려 혼을 이승으로 불, 렀다. 너는, 우리를, 먹었다.]
“나 너 안 먹었어! 무슨 소리야? 용이 왜 용을 먹는다는 거야? 넌 분명 용이라고 들었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연은 암흑 속으로 사나운 외침을 뱉었다. 그러나 암흑 속에서는 점점 더 불길한 흐느낌이 거세져왔다. 여인 같기도, 사내 같기도 한 음성이었다.
[너, 는, 너는, 우리를, 먹, 었다. 잊었느냐? 네가 나를 어찌 했는지 잊, 었느냐?]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분명히 원령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찌 된 걸까. 마치 부토를 떠돌던 원혼이 연의 존재를 알아채고 돌연 달려든 것 같기라도 하지 않은가.
설마 정말로 연이 용이란 걸 알고 난동을 부리는 것이란 말인가?
연은 흠칫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연은 암흑 속에서 이 원혼과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원혼의 범람은 필시 그들이 있는 곳 전부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두근-.
다시 세차게 가슴이 뛰었다. 메스꺼움으로 속이 뒤집혔다.
연은 정신없이 암흑을 향해 외쳤다.
“감시탑, 감시탑은 내버려둬! 이 잔해를 내버려두라고! 나하고만 이야기해!”
매서운 외침과 함께 연의 몸에서 강렬한 영력이 돌출했다. 목덜미를 타고 눈부신 진줏빛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연은 제 몸에 끓어오르는 듯한 영력이 되돌아온 것을 느꼈다. 다급한 마음에 신룡 본래의 영력을 봉하고 있던 자제심이 흔들린 까닭이었다.
“으읏, 일단 이 암흑부터 없애버려야겠어! 대체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연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암흑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희고 환한 기운이 단숨에 암흑을 찢었다. 그야 원혼 정도의 술수에 갇혀 있을 연이 아니었다. 연은 짜증스럽게 찢어발겨지는 암흑 사이를 노려보았다.
두근-.
몸이 어지러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시야가 인간의 것에서 새의 것으로 변화했다. 그와 동시에 연을 덮친 것은 강렬한 진동이었다.
“째재잭!”
연은 기겁하여 날아올랐다. 천지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원혼의 짓이 틀림없었다.
“크윽-!”
연을 쥐고 있던 현한에게서도 신음이 뱉어져 나왔다. 연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탑이 안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현한이 일하던 자들에게 거칠게 외쳤다.
“너희 모두 밖으로, 밖으로 나가!
외부와 닿은 계단 쪽으로 나간다 한들, 이곳은 잔해의 맨 위층이었다. 게다가 현한은 하필 통로 입구에서 가장 먼 자리에 있기까지 했다. 그는 연을 우악스레 움켜쥔 채 입구 쪽으로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천장에서 돌덩이들이 낙하했다. 현한은 검을 들고 길을 막는 낙석을 베어나갔다. 그때였다.
[너는, 너, 는, 우리를 능, 능멸했다. 너, 는, 빠져나갈, 수 없다.]
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환청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무언가가 원혼들을 계속 사라지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다. 불현듯 아까 기둥 아래 어둠 속에 있었던 인영이 떠올랐다.
그건 대체 뭐였지-?
“헉, 헉, 젠장. 계단 한번 더럽게 많군!”
가까스로 입구에 다다른 현한이 욕설을 씹어뱉었다. 그는 다른 이들에 비해 이미 뒤쳐져 있었다. 현한 곁에는 그처럼 뒤쳐진 술사 하나가 붙어 있었다.
“정신 차리고 뛰어!”
현한이 겁에 질린 술사의 등을 떠밀며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순간 계단은 마치 살아있는 짐승의 등처럼 꿈틀거리며 위로 솟구쳐 올랐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술사의 목덜미를 현한이 낚아챘다. 그들은 조금 전보다 더 높이 솟구친 채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젠장할!”
현한이 거칠게 욕을 뱉으며 중간이 무너진 계단을 돌아보았다. 탑과 계단은 눈 깜짝할 새에 꿈틀거리며 뒤틀리고 있었다. 현한이 손을 펼쳐 연을 내동댕이치듯 풀어주었다.
“넌 새니까 날아가는 편이 안전해! 나와 있다가 개죽음 당하지 말고 정신 차려!”
그 말을 끝으로 현한은 새파랗게 질린 술사를 부축하여 단숨에 도약했다. 그들은 끊긴 계단 저편으로 구르듯 착지했다. 그러자마자 술사가 허겁지겁 일어나 그를 제치고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현한은 연을 확인하려는 듯 멈칫 뒤를 돌았으나, 계단의 요동에 그는 가만히 서있을 수조차 없었다. 결국 그는 무너져 내리는 계단 끝에서 낙석을 베며 간신히 아래를 향했다. 끊긴 계단의 위쪽에 홀로 남은 것은 연 하나였다.
[너는, 너, 는, 용서를, 용, 서를 받지 못하리라. 우리에게 영원토록 저, 주 받을 것이다.]
목소리는, 아니, 목소리들은 점점 더 굵고 또렷해져갔다.
연은 날갯죽지에 안간힘을 써 힘을 실었다. 목소리들을 뿌리치듯 전속력으로 아래를 향해 날았다.
그러나 마치 목소리들이 늪이 되어 그녀를 붙드는 것만 같았다.
“쯔그그, 쯔그그그!”
가까스로 잔해를 반쯤 내려왔을 때였다.
“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