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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56)화 (56/122)

56

검은 검신에서 밤의 어둠보다 짙은 흑 빛이 너울거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하신후였다. 그는 원령을 하나하나 차례로 베어나갔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온 행동처럼 무심했다.

‘설마 여기 곳곳에 저런 사념 부스러기가 널려 있는 건가? 그래, 그는 밤새 저런 걸 없애고 있었던 거야.’

연은 숨을 죽인 채 하신후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는 그 괴이한 것들을 멸한 뒤, 다시 등을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별다른 기색의 변화가 없었다. 누가 보면 밤새 과일을 따거나 청소를 하는 등의 평범한 노동을 하고 있다 여길 만했다. 물론 그런 노동도 밤을 새워가며 한다면 결코 평범하다고는 부를 수 없겠지만 말이다.

연은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랐다. 다행히 하신후는 원령의 표시를 찾느라 그런 것인지 연을 눈치채지 못했다. 날개를 파닥거리면 행여 소리가 들릴까, 연은 바삐 발을 놀릴 수밖에 없었다.

‘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하신후는 저렇게 태연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뭘 보고 싶은 거야? 뭘 확인하고 싶은 거지?’

그는 딱히 위험해보이지 않았다. 그저 따분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렇다면 연에게도 그를 염려해줄 이유가 없지 않을까.

그렇다고 그의 손에 멸해지는 사념들을 지켜보기가 즐거운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들은 한때 용의 혼의 일부였지 않은가. 지금은 온전한 망령조차 아닌 채, 그저 혼이 부스러진 흔적이 되어 있을 따름이지만….

그런데도 연은 섣불리 등을 돌릴 수 없었다. 하신후가 다칠까 봐 염려되어서만은 아니었다. 몸을 다치지는 않는다 해도… 이곳의 어둠은 너무 컴컴했다. 이런 컴컴한 곳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면 누구든 외롭기 마련이다. 연은 외로움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알았다. 그것이 얼마나 마음을 부서뜨리는지도.

‘아직은 당신이 덜 부서졌으면 좋겠어…. 내 손으로 죽일 땐 죽여야 하더라도, 일단은 멀쩡한 편이 얼굴도 더 보기 좋을 테고….’

연은 괜스레 변명을 곱씹었다. 그의 얼굴은 하여간에 이런 순간에도 빛을 발할 만큼 수려하다. 그러니 저 외모를 조금 더 보존하려면 연은 그의 곁을 지켜줘야 했다.

물론 하신후는 연이 여기 있는 줄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면 역시 연이 여기 있는 건 아무 의미 없는 짓인 걸까.

하신후는 다시금 다른 구석에서 흐느적거리는 원령을 발견했다. 원령은 검은 검신에 닿자 귀곡성을 뱉으며 사멸했다. 그때 돌연 사멸하던 원령이 하신후에게로 길쭉한 손 같은 것을 뻗었다. 인간의 손도, 짐승의 손도 아닌 덩어리였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를 노리듯 달려들었다.

[너는 미물이다. 미물은 우리의 먹이다-!]

“살아서 인간이라도 먹었던 것처럼 말하는군. 월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하신후가 불쾌한 듯 웅얼거리며 그 발톱을 베어내려던 순간이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또 다른 발톱이 갈고리처럼 날아들었다.

“째잭!”

다급한 외침 같은 새 지저귐이 울려 퍼졌다. 하신후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린 방향은 원령 쪽이 아니었다.

그의 눈길이 날카롭게 연에게 닿았다. 연은 황급히 날아올라 그의 위쪽을 보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조심해! 당신 머리 위를 보라고!’

그러나 하신후는 아예 검을 아래로 내리기까지 했다. 연이 놀라 흠칫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검이 닿은 것도 아닌데 원령의 발톱이 허망히 바스러졌다. 하신후가 한 짓이었다.

서서히 사라지는 원령 아래, 그는 몸을 온전히 연에게로 돌렸다. 흉흉한 검은 빛줄기가 발톱이 있던 자리를 다시 한번 파고들며 사그라졌다.

“…….”

“…….”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새의 침묵이 짧게 맴돌았다. 연은 비로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그가 너무 무방비해보여 충동적으로 튀어나갔다.

아니, 진작에 이리 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매일 밤 지독히도 혼자였다. 연은 그것이 기쁘지 않았다.

“짹.”

연은 작게 지저귀어 침묵을 깼다. 그가 뭐라고 입을 열면 좋을 텐데. 원령들하고는 잘만 혼잣말을 하며 대화를 시도하더니, 지금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는 그저 멈춰 서서 물끄러미 연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손을 내밀지도 않았고, 왜 또 여기에 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에 연은 점차 두려워졌다. 어쩌자고 튀어나온 걸까. 차라리 이제라도 그냥 새인 척 하는 게 좋을까.

그래, 여기서 정체를 들켜서 대체 뭘 어쩌겠는가. 연은 서서히 주눅이 들어 괜스레 날갯짓을 그쳤다. 그러고는 먹이를 찾는 시늉을 하며 바닥을 두리번거리기까지 했다.

“짹짹. 째잭.”

연은 필사적으로 평범한 새인 척 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생각해보니 이들에게 연은 훈련을 받은 영리한 새였다. 그러니 연이 위험을 경고하려 한 것쯤은 그냥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영리한 새라면 마땅히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연이 바닥의 무언가를 괜히 쪼아 먹는 척하며 톡톡, 부리를 쪼아댈 때였다.

하신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 내게로 오는 건가? 지금 내 쪽으로 오는 거 맞지?!’

연은 잔뜩 긴장해 위축되었다. 언제라도 그가 자신을 붙잡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그는 그대로 걸음을 떼어 연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연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야. 지금 뭐였지?’

그가 가까워질 때는 붙잡힐까 봐 벌벌 떨렸었는데, 그저 지나쳐가니 그건 그것대로 가슴이 철렁했다.

‘하신후가 날… 그냥 지나쳐 가버렸어.’

연의 조그만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분명히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을 뱉을 줄 알았는데. 그는 끝까지 한 마디 말이 없었다.

연은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털썩 주저앉으니 허탈감이 밀려왔다.

‘날… 날 보고도 그냥 가버렸어. 날 무시한 건가? 왜 그런 거지?’

이 밤중에 새가 자신을 졸졸 따라다녔는데, 이상하지도 않았나. 이게 그리 아무렇지 않은 일인가?

조금 전까지 스스로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 우기던 것을 깡그리 지워버리며, 연은 황망함을 곱씹었다.

정체모를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언제는 그리 마음을 써주는 것처럼 굴더니, 이젠 제 편할 대로 관심을 거둔 셈이지 않은가.

정체를 들킨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하여 그 뒤로 줄곧 가슴을 졸이며 애써왔는데. 막상 부딪혀보니 돌아오는 것이 이런 무관심일 줄이야!

연은 침울하게 부리를 딱딱거렸다. 한숨을 내쉬어 봐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차라리 그를 찾아가 실컷 노려보기라도 하는 편이 속편할 듯했다. 한데 그 일조차 맘대로 풀리질 않았다.

이젠 원령을 다 멸하기라도 한 건지, 하신후는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탑을 떠나려는 것 같았다. 탑을 떠나는 그의 기척이 또렷하게도 전해져왔다.

아까까지는 그리도 감쪽같이 기척을 숨기고 있어 찾는 데 애를 먹이더니. 잠을 자러 갈 때는 온 천지에 자신이 떠난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꼭 연에게 보란 듯이 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하나 맘에 드는 것이 없는 자였다.

연은 그를 따라 슬그머니 탑의 입구를 빠져나왔다. 그는 역시나 보란 듯이 잠자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 그대로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잠자리에 누웠다. 연은 멀찍이서 그의 등 돌린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아무튼 오늘 밤은 잠을 자긴 하는구나. 피곤하면 나 같은 새 한 마리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을 수도 있겠지.’

연은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잠을 청했다. 어차피 여기서 연은 새일 뿐이었다. 하니 어디서 자든 그건 연의 마음 아니겠는가.

날이 밝았을 때는 또다시 이전과 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하신후는 밤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에게도 딱히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누구 하나 하신후가 밤중에 혼자 뭘 했는지 모르잖아? 아무리 그래도 다들 선발되어 온 인재일 텐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비로소 연의 뇌리에, 모든 것이 부토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기야 부토는 본래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다. 그러니 이 땅의 독기와 요기가 사람들을 더 쉽게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 당연했다.

다행히 태양 아래서는 모두가 멀쩡했다. 사람들은 어제 하신후가 미리 원령을 없앤 탑의 잔해 안으로 하나둘씩 들어섰다.

연도 현한에게 붙들려 그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하신후를 가장 곁에서 보필하던 무장이 선두에 섰다. 현한은 어슬렁거리며 그들을 따랐으나, 썩 적극적인 기색은 없었다. 그는 그저 한가롭게 잔해 내부를 구경했다.

어제와 반대로 하신후는 술사 둘과 함께 탑 바깥에 남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을 정화하는 거대한 결계를 세울 것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하신후는 여전히 내 쪽을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지. 꼭 완전히 무시하려고 결심이라도 한 거처럼. 흥, 누가 그러면 서운해 하기라도 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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