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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54)화 (5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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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은 하나하나 최근 깨달은 것을 헤아려 보았다.

우선 새로 깨달은 점은 하신후가 짜증날 정도로 말수가 적다는 것이었다. 이따금 현한이 시비라도 걸지 않으면 그는 종일 몇 마디 지시 외의 말을 뱉는 적이 없었다. 하니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리도 만무했다.

현한만 웃는 일이 적다 여겼는데, 하신후는 그보다 더했다. 그는 시종일관 무료한 표정일 뿐 한 번도 부드러운 낯빛을 보일 때가 없었다. 이제 보니 오히려 현한의 감정 표현이 다양할 정도였다.

‘나랑 있을 때 하신후는 언제부턴가… 계속 눈을 잔뜩 휘어가며 웃었는데. 눈웃음이 하도 헤퍼서 원래 헤픈 사내인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는데….’

연은 착잡한 심정으로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그랬더라? 언제부터 나와 있을 때 그가 그리 웃음이 헤펐더라…? 눈웃음이 요사스럽다는 생각을 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저런 무표정은 잘 기억나지 않아.’

그야 본 적이 없으니 기억에 없는 게 당연했다.

솔직히 처음부터 그는 추근거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여 그러지 않았을 때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지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까닭일까? 아직 그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일까?

‘나랑 있을 때는 이런저런 얘길 항상 들려줬었는데… 여기서는 밤에 요마를 죽이고 와서도 말 한마디 하질 않네. 내가 다 속상해.’

혈우가 쏟아진 날도, 요마가 나타난 날도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 않았다. 오늘 밤은 또 어찌 될까.

연은 근심과 상념 속에서 맥없이 새장 바닥을 굴렀다. 그녀는 여전히 새장 속 신세였다. 하도 근심이 많아 횃대조차 붙들기 귀찮았다.

결국 세 번째 감시탑에 가까워졌을 때쯤, 현한이 그녀를 새장 밖으로 꺼냈다.

“너무 가둬두어 이리 된 건가. 정신 좀 차리지 그래.”

현한이 연의 머리를 툭, 툭, 손가락으로 쳤다. 그러다 쓰다듬어보기도 했다. 차라리 치는 편이 쓰다듬는 것보다는 덜 불쾌했다. 연은 흠칫 머리를 곧추세우고 그의 손가락을 노려보았다. 한 번만 더 쓰다듬었다간 손가락을 물어뜯어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래, 그래야 너답지.”

현한은 픽 비웃더니 새장을 없앴다. 그러고는 연의 발목에 여전히 걸려 있던 족쇄 끝의 사슬을 붙들었다. 족쇄와 사슬은 모두 실처럼 가느다란 덕분에 무게가 없었다. 하여 여태 잊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현한이 사슬을 손가락에 감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짹… 째재잭.”

‘또 나를 새장 밖에 두려는 건가? 이제는 그게 더 무서운데.’

새장을 견디기보다, 하신후 곁을 알짱대고 싶은 충동을 참기가 더 어려웠다. 그러나 다시 한번만 알짱거렸다간 이번에야말로 큰일이 날 것이다.

연은 착잡하게 현한의 말안장을 붙들고 앉았다. 귀마는 꾸준히 세 번째 탑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

앞서 나아가던 자들이 우뚝 멈춰 섰다. 모두의 시선이 한데 붙박여 있었다.

“타, 탑이 없습니다. 무너진 잔해조차 없습니다!”

선두의 술사 하나가 당황하며 외쳤다. 그의 눈길은 이제 하신후를 향했다. 다른 이들 역시 겁에 질린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을 압도한 것은 사라져버린 탑의 빈자리만이 아니었다. 탑이 서있었을 자리에는 붉은 늪이 생겨나 있었다. 혈우가 고여 만들어진 듯한 늪이었다.

“저, 전하. 저것은 혈우의 흔적이 분명합니다. 폐하께서 천안(天眼)을 통해 감지하셨다던 혈우가 정말로 감시탑을 없앤 모양입니다.”

행렬 중반에 있던 하신후가 귀마를 선두로 몰았다.

“그래, 내 눈에도 그리 보이는군.”

그는 차분히 늪을 응시하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어차피 탑이 사라졌다면 저곳으로 갈 필요는 없겠지.”

자신이 세운 감시탑이 홀연히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담담한 태도였다.

“이곳을 떠나 곧장 다음 탑으로 이동하겠다. 그리 멀지 않으니 해가 지기 전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지시에 일행은 말머리를 돌렸다.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섬뜩한 호수가 점차 멀어졌다. 현한이 하신후 곁으로 귀마를 가까이 한 것은 그때였다.

“저기 혈우의 흔이 저리 짙은데 그냥 내버려두시는 겁니까. 형님께서는 호전적인 분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죽은 용의 망령 따위를 당해내지 못할까봐 염려하시는군요.”

현한의 말안장에 앉아 있던 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래봤자 작은 새의 표정 따위, 구겨지든 펴지든 크게 눈에 띄지 않았지만 말이다.

누가 들어도 일부러 도발하는 말이 분명했다. 한데 돌아오는 반응은 영 밋밋했다. 하신후는 그저 무료하게 헛웃음을 뱉었다.

“너는 지치지 않고 내게 시비로군.”

“왜 지금 저 혈우 웅덩이를 없애지 않으십니까. 설마 정말로 능력이 부족하신 거라면, 앞으로 제국의 앞날은 더없이 어둡겠군요. 부토의 요기가 이리 돌연하게 날뛰기 시작했는데 형님께선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듣던 연은 점점 짜증이 치밀었다.

‘하신후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밤새 네놈이 쿨쿨 잘 때 요마 떼를 없애러 다닌 건 누구지? 감시탑이란 것도 애초에 하신후가 세운 거라면서! 그게 어딜 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

연은 화가 나서 조그만 발을 쿵쿵 굴렀다. 부리를 딱딱거리며 현한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쯔그그그. 쯔그그그그!”

무심코 화를 내던 연은, 뒤늦게 하신후의 시선을 의식하고 발 구르기를 그쳤다. 분명 그의 눈길이 연에게 스쳤던 것 같았다.

그러나 하신후의 음성은 현한에게로 향했다.

“저 혈우는 그저 고여 있는 것일 뿐 이젠 아무 힘도 없다. 너는 네 눈으로 본 것 하나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는구나.”

“하, 제가 말입니까?”

하신후가 현한을 돌아보았다. 그는 모자란 부하에게 가르침을 주듯 차분히 말했다.

“국경 밖의 땅에서 염려해야 하는 것은 혈우가 아니라 혈우를 내리는 용의 원혼이다. 나는 일곱 용의 무덤에 일곱 개의 감시탑을 세웠지. 이곳에는 이미 원혼의 기척이 남아 있지 않으니, 네 말대로 내가 그와 다투고자 한들 없는 것과 겨룰 수는 없지 않겠느냐.”

“…….”

“이리 너와 수일을 가까이 지내는 것은 내게도 처음인데, 너를 곁에 두고 볼수록 부디 네가 내 혈육이 아니기를 바라게 되는군.”

이미 구겨져있던 현한의 얼굴이 한층 구겨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십니까, 형님.”

“하 씨 가문에 너처럼 모자란 자가 드물어 하는 말이다. 폐하께서도 한 번도 너만큼 아둔했던 적이 없거늘….”

하신후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현한을 마주하고 있기조차 귀찮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현한만 하신후에게 시비를 거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저 자도 꽤나 현한에게는 반응이 분명하네….’

이 역시 연에게는 낯선 모습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나마 현한과 있을 때 그나마 표정이 생기고, 말수가 늘어난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그 덕에 현한은 더없이 분이 치민 얼굴이었지만 말이다.

하신후에게 잔뜩 모자람을 지적당한 뒤, 현한의 복수는 매우 유치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그 방법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연이었다.

현한은 연신 하신후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연을 손에 쥐고, 날개를 건드리거나 몸을 툭툭 치며 괴롭혀댔다.

“미물이기는 하나 그래도 돌볼 것을 데려와 차라리 다행입니다. 부토의 불유쾌한 풍경만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면 더 따분했겠지요. 그나마 이 새를 데리고 놀면 제법 즐겁습니다.”

연이 암만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어도 소용없었다. 현한은 제 상처가 늘어갈수록 더욱 즐거워 보일 정도였다. 변태 중의 상변태였다. 게다가 부리를 제때 피하는 요령마저 늘어, 도리어 연이 놀림당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무엇보다도 연은 하신후의 눈앞에서 제대로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조금만 새답지 않게 굴어도 그의 의심이 커질까 봐 두려웠다. 하여 필사적으로 평범한 새 흉내를 낼 수밖에 없었다.

하신후는 현한의 만행을 무시하듯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현한을 피하듯 말머리를 돌려 떠나버렸다.

“한심한 놈.”

떠나며 그가 뇌까린 욕설에 현한이 움찔했다.

“…그래요. 저는 한심합니다. 잘나신 형님에 비하면 누군들 한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차갑게 으르렁거리며 하신후가 떠난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러니 제가 연모한 여인마다 형님께서 다 빼앗아 가신 거겠지요. 하니 저도 이 새 한 마리 정도는 제가 가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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