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두 번째 탑에 다다른 것은 다음 날이었다. 이번에도 이곳에서 밤을 지새울 거라 생각했거늘, 하신후는 그리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일행을 예상 밖의 장소로 이끌었다.
“여긴… 숲이로군요.”
현한이 의외라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토에 숲이 있었을 줄이야. 형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언제 사라질지 모를 곳이다. 다만 숲이 생긴 곳에는 혈우가 내리지 않으니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편이 낫겠지.”
하신후는 숲을 바라보다가 먼저 말을 몰아 그곳으로 들어섰다. 연도 새장 속에서 놀란 마음으로 숲을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검붉은 땅만을 보아온 터였다. 검붉은 토지가 끝나자 홀연히 나타난 숲은, 마치 용의 산의 숲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용의 산도 이런 부토 가운데 있는 곳이지. 여기 숲처럼 돌연하게 생겨난 울창한 산림…. 물론 나는 신전에서만 지내느라 제대로 돌아본 적도 없지만….’
단 한 번 신전에서 달아났던 기억이 전부였다.
숲에서 까만 여우 무리를 만났던, 그 자유로웠던 하루. 번번이 곱씹게 되는 기억이었다. 그것이 연이 지닌 가장 좋은 기억인 까닭이었다.
일행은 곧 숲 가운데 진을 펼쳤다. 혹시 모를 요기의 범람을 막기 위한 결계였다.
이번 결계 역시 하신후가 만든 것이었다. 탑을 지키던 무서운 결계와 달리 이번에는 그다지 난폭하거나 징그럽지 않았다.
연은 새장 속에서 가만히 하신후를 바라보았다. 그가 결계 세우기를 마치자 그의 손에 들린 검은 검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오늘 밤은 혈우가 내리지 않을 테니, 그도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으리라.
연이 그리 생각하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때였다. 그가 연을 향해 시선을 던져왔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래, 이젠 내가 연이라고 의심하지 않나보다. 다행이야. 이대로 제발 아무것도 알아채지 말아야 할 텐데….’
현한과 붙어 있어야 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그에게 정말로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정말 싫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쯤은 괜찮았다.
연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신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숲의 풍경에 관심이 가는 척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짹. 째재잭. 째잭.”
숲이 신기하다는 듯 지저귀어보기까지 했다. 실상 온 신경은 아직까지 하신후에게 쏠린 채였지만 말이다.
하신후는 정말로 모든 의심을 거둔 것 같았다. 연에게 다시는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새에게 말을 건네고 관심을 베풀던 스스로가 얼마나 괴상했는지, 비로소 자각한 걸지도 몰랐다.
이후 아무 일 없이, 연은 또다시 새장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 밤이 깊었을 즈음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새장 속까지 파고들었다. 창살 너머에서 꺼림칙한 괴성이 들려왔다.
‘…요마인가?’
연은 흠칫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귀를 기울일수록 요마의 괴성 같았다. 아직 가까이에 온 것은 아닌 듯했다. 숲 너머 먼 부토에서 요마 떼가 울부짖고 있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희미한 땅울림이 전해져왔다.
저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들기란 어려웠다. 연은 주위 사람들이 깨어나길 바라며 작게 지저귀어 보았다.
“짹. 짹!”
위험해질지도 모르니 다들 일어나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이 한심한 자들은 밤만 되면 피로가 몰려오는 건지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짹! 짹짹!”
어쩌면 인간의 미력한 청력으로는 연이 듣는 것을 듣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보면 볼수록 한심한 자들이었다.
연이 다시 한번 힘껏 지저귀어보려는 순간이었다.
“…시끄럽군. 대체 왜 그러는 거지?”
가까이 다가온 현한이 싸늘한 눈으로 연을 노려보았다. 잠에서 깨어나 기분이 나쁘기 그지없어 보였다.
“입 다물지 않으면 이번에야말로 꼬치구이로 만들겠다. 미친 새를 돌볼 만큼 한가하진 않아.”
그는 사납게 중얼거리더니 연이 든 새장을 툭, 치고 돌아섰다. 경고가 담긴 손짓이었다. 돌아선 현한은 문득 무언가 이상했는지 걸음을 멈췄다.
“…한데, 북왕은 어디 갔지.”
그 말에 연도 어둠 속을 애써 돌아보았다. 그러나 새장이 놓인 위치가 열악하여 주위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긴, 하신후라면 분명 연이 들은 요마 떼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라면 그랬을 것이 분명했다. 연의 적수가 그 정도 기척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우릴 여기 두고 어디로 내빼기라도 한 건가?”
현한이 낮게 으르렁거리듯 비소를 뱉었다. 그러나 연은 짐작 가는 것이 따로 있었다.
현한은 잠시 투덜거리다가 다시 잠을 청하려 돌아갔다. 그러더니 금세 꿈지럭거리며 자리에 누웠다. 그 커다란 덩치가 아까울 정도로 모자란 자였다.
‘…하신후는 요마 떼를 처리하러 간 거야. 틀림없어.’
연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자릴 비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더 기다리자 들려오던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다른 자들은 깨울 필요조차 없다는 건가? 하신후는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혼자서 이런 일을 도맡아 처리해온 걸까.’
또다시 익숙한 감정이 치밀었다. 짜증이나 노기라고도, 그렇다고 염려라고도 부르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연은 도저히 다시 잠들 수 없었다. 대신 새장 속에서 하염없이 하신후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잠을 자지 않고 귀를 기울이다 보면, 돌아온 기척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부토에서 영력을 운용할 수 있는 건 하신후와 하을령 둘뿐이라고 했었지. 하여 전쟁 중 국경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병력이었다는 말은 들은 적 있어. 하신후는 그때도… 이리 혼자서 싸웠던 걸까.’
하을령의 일기에서는, 그가 먼저 전쟁터로 떠났다 했었다. 이후로 하을령 역시 전쟁터로 갈 것이라 적혀있기는 했었지만… 두 사람이 언제 다시 만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을령이 없는 동안 그는 무수한 밤을 혼자 전투 속에서 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대체 어떤 기분일까.
“……!”
상념에 잠겼던 연은 문득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하신후의 기척이었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는 귀환하자마자 연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연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잽싸게 배를 보이고 누웠다. 할 수 있다면 코고는 시늉이라도 해보였을 것이다.
색색거리며 잠든 숨소리를 뱉고 있을 때였다. 훅, 하고 요기가 끼쳐왔다. 하신후의 몸에 묻은 죽은 요마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그 지독한 요기 속에서도 변함없이 기묘할 정도로 좋은 향기가 느껴졌다.
‘…하신후의 체취다.’
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잠든 시늉을 했다. 어쩌면 이것은 그저 체취인 것이 아니라 그의 영력에서… 혼에서 비롯된 향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리 독한 요기 속에서도 홀연히 연의 혼을 홀리는 것이다.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다니. 그동안 연은 얼마나 바보였던가.
하신후는 그저 가만히 서서 연이 든 새장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기척으로 그가 어찌 하고 있는지가 전해져왔다. 눈을 떠서 하신후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울컥 치밀었다. 그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야 무사하겠지. 연의 적수인 자가 고작 요마 떼에게 당할 리 없다. 그걸 알면서도 그의 얼굴을 눈에 담고 싶었다.
“…쯔….”
연은 견디다 못해 작게 신음까지 뱉었다. 눈을 뜨고 싶은 걸 참느라 마음이 터질 듯했다. 그는 왜 이리 조용하기만 한 걸까.
한참을 애써 자는 척을 한 뒤에야 하신후는 비로소 걸음을 떼어 연에게서 멀어졌다. 연은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아, 하아…. 정말, 자는 척하느라 힘들었다. 그는 무사한 거겠지? 딱히 피 냄새가 나지는 않았으니 상처가 없는 게 분명해.’
연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향해 다시 부리를 킁킁거려 보았다. 역시 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들려오는 요마 떼의 괴성도 더는 없었다. 그는 무사히 요마 떼를 도륙한 것이다.
연은 아침이 밝아서야 비로소 하신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혈우가 내렸던 밤과 마찬가지로, 그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태연했다. 혈우가 내렸던 밤에는 그나마 모두가 그가 뭘 했는지 알고 있기라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누구도 눈치조차 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래, 스스로 밤에 뭘 했는지 말하기 부끄러울 수도 있겠지. 그렇다 해도 너무 아무 말 없이 넘어가네. 남들과 말을 섞는 게 아예 귀찮은 것도 아닐 텐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고서 넘어가도 괜찮은 건가.’
슬슬 하신후가 어떤 자인지 알 거 같기도 했다. 연의 곁에 있을 때의 그와, 이렇게 훔쳐보는 그는 전혀 다른 사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