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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51)화 (51/122)

51

날이 밝자, 사람들은 하나둘 잠에서 깨어났다.

혈우의 빗줄기는 홀연히 그친 채였다. 잠에서 깬 사람들은 기쁨에 겨워 탑 밖으로 나갔다.

“황제 폐하께서 살피신 바로는, 무너졌던 탑들에도 혈우가 내렸다 들었는데, 이곳이 이리 무사하다니! 우리들의 북왕 전하께서는 역시 전능하시다!”

“전지전능하시다!”

“전하께서는 무한한 광영을 누리시는 분이시다! 북왕 전하께서 함께 하시니 우리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 게 틀림없어!”

사람들은 저마다 소리 높여 하신후에게 감사를 올렸다. 붉은 땅은 혈우를 머금어 더욱 검붉어진 채였으나, 감시탑은 온전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어디로 간 것일까.

연은 멍하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를 만난 뒤, 연도 더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온 힘을 다해 혈우가 그치기를 소망하느라 잘 수가 없었다.

‘이리 거짓말처럼 혈우가 그치다니. 내 소망이 그 죽은 용에게도 전해진 걸지도 모르지. 내 이리 애를 썼으니 하신후에게도 감사를 받아야 마땅한데, 공을 밝힐 수 없어 아쉽네.’

그나마 기쁜 것은 혈우가 그치기 무섭게 현한이 연을 내팽개쳤다는 점이었다. 그는 연이 사슬을 끌고 날아다니도록 내버려둔 채 혼자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하신후가 나타난 것은 사람들이 아침 식사를 마쳐갈 즈음이었다.

탑 꼭대기에서 무슨 수를 쓰고 온 건지, 그는 피투성이이긴커녕 말끔한 꼴이었다. 옷에는 핏물 한 점 묻어있지 않았다. 어젯밤의 그 가엾은 악귀 같던 몰골은 모조리 꿈이었던 것만 같았다.

“전하, 무탈하신 것입니까!”

그의 가장 가까이에서 말을 몰던 무사가 그의 앞에 조아렸다.

“저희의 미력한 결계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장 이 목을 내놓으라 하셔도 그리 하겠습니다.”

어젯밤 그리 쿨쿨 자던 자의 입에서 나온 것치고 참으로 격렬한 사죄였다.

엎드린 그를 보며 하신후는 권태롭게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언제 네게 목을 달라 하였느냐. 그보다는 시장하구나.”

그 말에 사람들이 황급히 그의 앞에 음식을 가져왔다. 소박한 군량이었으나 바치는 태도만큼은 더없는 존경심을 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연은 그제야 좀 흡족해졌다. 어젯밤에는 미련하게 잠만 자던 자들이 모두들 저희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하신후가 드디어 식사라는 걸 하는 꼴을 보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져갔다. 그때, 문득 그의 눈길이 연에게 닿았다.

“너도 아직 잘 살아 있구나.”

어젯밤에 연에게 손수 겉옷까지 내어주지 않았던가. 하니 잘 살아 있는 게 당연했다.

연이 뾰로통하게 인상을 찡그리자, 그가 슬쩍 눈웃음을 비쳤다. 여인도 아닌 새에게까지 저런 눈웃음을 보일 줄이야. 역시 수작이 보통이 아닌 자였다. 잊고 있던 ‘산더미 같은 야사(夜事)’라는 말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쯔그그그.”

“현한이 또 먹이를 챙기지 않은 건가.”

하신후는 현한을 찾는 듯 슬쩍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현한은 아직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이참에 아예 연을 버려준다면 좋을 듯했다.

하신후는 연을 물끄러미 보더니, 날아오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연은 멈칫 그 손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젯밤 그가 혈우에 젖은 손을 뒤로 거두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짹! 짹짹!”

연은 낭랑하게 지저귀며 그의 손으로 날아가 앉았다.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한층 더 수려한 것 같았다.

연은 무심코 하신후의 손바닥에 뺨을 문지르고, 날개를 접고 웅크려 앉았다.

“현한 님의 새인 줄 알았는데… 어째 전하를 더 잘 따르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하도 소란을 피워 현한 님께서 꽤 곤란해 보이셨는데 말입니다.”

신기해하는 무사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연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하신후가 슬그머니 연을 감싸 쥐었다.

“내가 너희를 새 구경이나 시키려 여기 데려온 것은 아닐 텐데.”

손안에 감싸인 연은 하도 작아 한 손으로도 충분히 감추어졌다. 굳이 새를 감추기까지 하다니. 새 구경하지 말고 각자 할 일들 하러 가라는 뜻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잽싸게 물러나 저마다 맡은 바를 하려 사라졌다. 주위가 단숨에 텅 비자, 그는 그제야 연을 다시 놓아주었다. 그리곤 제 음식 중 작은 과실을 들어 연의 앞에 놓아주었다.

“과실 말고 네게 뭘 줘야하는지 모르겠군.”

그가 조금 난감한 기색을 비쳤다. 군량은 말린 고기와, 알 수 없는 반죽 덩어리가 전부였다. 반죽에서도 고기 냄새가 풍기는 것을 보아, 곡물과 계란, 고기가 뒤섞인 음식인 듯했다.

“한가하게 밥을 지어먹을 수 없어서… 부토에 정찰을 나올 때는 늘 이런 것들뿐인데….”

마치 연에게 변명이라도 늘어놓는 것 같았다. 주인도 아닌 자가 굳이 새에게 변명까지 하다니.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다.

그는 결국 고심하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주인인 현한에게 가 보거라. 그가 너를 데려온 것이니, 그에게 가면 네가 먹을 만한 것을 주겠지.”

주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연은 못 들은 척하며 그가 내민 과실을 얌전히 쪼아 먹기 시작했다. 새의 몸으로 지내니 식량도 이 덩치에 걸맞게 취하면 족했다. 지금은 이 과실 반쪽이면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고도 넘쳤다.

연이 과실을 쪼아 먹기 시작하자 하신후는 그제야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연은 과실을 먹는 내내 틈틈이 그를 훔쳐보았다.

‘다행히 정말로 상처 하나 없네. 이 얼굴에 흠집이라도 났다면 짜증났을 텐데.’

그는 다행히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였다. 비가 그치기 전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멀쩡한 걸 알고 나니 갑자기 마음이 울컥했다.

‘이 바보 같은 사내야, 난 다시 현한 곁으로 안 돌아갈 거야! 그냥 당신 곁에 있겠다구!’

그 뜻을 더 똑똑히 알릴 필요가 있는 듯했다. 울컥한 연은 돌연 그의 품으로 날아갔다.

“-!”

그가 움찔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은 얼른 그의 옷깃 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물론 그것은 한 순간일 뿐이었다.

“째재잭!”

무턱대고 파고들던 연은 깜짝 놀라 옷깃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가 걸친 것은 달랑 홑옷 하나였다. 속에 아무것도 입은 게 없었다. 그러니까, 연은 지금 이 사내의 매끈한 맨살에 머리를 부비고 만 것이다.

연은 부들부들 떨며 튕겨 나오듯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니 왜, 왜, 왜 이렇게 뜨거운 거야?! 아니, 아니지, 맨살이니 온기가 있는 게 당연한가? 이 사내는 대체 왜 이 추운 날씨에 홑옷 하나만 입고 앉아 있는 거야!’

새의 얼굴은 깃털로 덮여 있기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얼굴이 시뻘게진 꼴을 보이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시뻘게진 꼴을 들킨 것은 연이 아니라 하신후였다. 그의 온 뺨이 순식간에 붉어져 있었다. 눈까지 흠칫 커진 것이, 누가 보면 연이 그를 덮치기라도 한 줄 알 정도였다.

아니, 그런데 연이야 자신이 누군지 잘 알고 있다지만… 그는 지금 연을 새로 여기고 있지 않던가! 한데 고작 새 한 마리가 맨 가슴에 닿았다고 저 표정은 뭐란 말인가? 설마 새에게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가?

“쯔즈즈즈즈즈즈!”

연은 당황하여 작게 지저귀며 그를 쏘아보았다. 하신후 역시 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한참만에야 잠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걸까.”

어제와 똑같은 소리였다.

“이래서야… 곤란한데.”

그가 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로 몹시 곤란해 보이는 꼴이었다. 어제 피칠갑을 하고 멍하니 어슬렁거리던 때보다 더욱 곤란해 보일 정도였다.

한참 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하신후는, 잠시 후에야 천천히 눈을 들었다. 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은 좀 전과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손 뒤에 숨어 뭔가 생각이라도 다잡은 모양이었다. 하신후는 짧게 숨을 들이쉬더니, 연을 무섭도록 부드럽게 응시했다.

‘…뭐야? 왜 저러는 거야?’

그 뜻 모를 표정에 연은 무심코 뒷걸음질 쳤다. 대체 저 자가 왜 저러는 건가. 설마 맨 가슴에 새 깃털 조금 닿았다고 광증이라도 도진 것인가.

뭔지 모르지만 그의 눈빛이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

하신후의 두뇌가 느닷없이 비상한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이미 증좌 하나 없이 연이 첩자라는 것을 대번에 꿰뚫어본 전적이 있지 않던가. 순식간에 오한이 들었다.

뒷걸음질 치던 연은, 이윽고 벼락 맞은 듯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하신후의 입에서 튀어나온 부름 때문이었다.

“연아.”

그는 연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연아.”

“…….”

“역시 새가 답할 리는 없나…. 내가 미친 것인지, 왜 자꾸 네가 내 정인과 겹쳐 보이는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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