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말 그대로 피바람이 몰아치는구나.
보고만 있어도 오싹해지는 광경이었다.
‘이제는 내 적을 염려하는 지경에 이르다니. 내가 정말로 미쳐가기라도 하는 건가.’
하신후를 염려하고 싶지도 않고 염려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연에게 남은 가장 편한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연은 넝마 속에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자고 일어나면 저 악취 나는 혈우도 그쳐 있을지 모른다.
“…그리 울기까지 하더니 이제는 잠을 자는 거냐.”
현한은 황당한 듯 넝마를 들추어 연을 내려다보았다. 연은 안 들리는 척하며 더 열심히 자는 척을 했다. 물론 정말로 깊이 잠든 건 아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얕은 잠을 자던 연은 계획적으로 반짝 눈을 떴다.
깨어나 주위 기척을 살피니 역시 예상대로였다. 시간이 좀 흐르고 나니, 모두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밤이 깊어진 것이다.
혈우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혈우가 내리기 시작한 뒤 하늘은 줄곧 붉은 기운이 그윽했다. 때문에 여전히 검붉기만 한 하늘의 빛깔로는 시간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연은 조심스레 넝마 밖으로 빠져나왔다. 코앞에서 탈출한 것인데도, 잠든 현한은 연의 걸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연은 살그머니 족쇄의 사슬을 끌어당겨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한은 사슬 끝을 손가락에 잘 감고 있는 채였다.
‘뭘 저렇게 철저하게 붙들고 있는 거야? 이제 보니 이 사내, 내게 꽤나 집착하고 있군.’
집착해도 소용없었다. 연은 그가 생각하듯 그저 평범한 새가 아니었다. 그가 붙든다고 얌전히 붙잡혀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연은 그의 손에서 사슬 끝을 빼낼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사슬이 짧지 않아 운신의 폭이 크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가까스로 연이 사슬을 빼내어 정신없이 종종걸음을 칠 때였다. 어느 순간 통로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탑 위쪽에서 걸어 내려오는 사람의 발걸음이었다.
연은 놀라 통로를 바라보았다.
“쯔구구…!”
나타난 것은 역시 하신후였다. 그러나 그의 몰골은 아까와 전혀 달랐다. 온통 검붉어진 하늘 아래 환한 빛이 적었으나,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온통 핏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연은 황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신후는 무표정하게 걸어 들어와, 앉을 만한 곳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피로한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와중에도 기척을 지우고 있었다. 연이 이미 깨어나 있지 않았다면, 그가 온 줄도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들을 그저 잠든 채로 두고자 하는 것 같았다.
‘뭐야. 왜 이렇게 몰래 나타난 거야. 당장 다들 일어나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서 일어나서 새 옷이든, 음식이든, 뭐든지 대령하라고 시켜야지!’
연은 답답한 마음에 하신후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가 앉은 자리 아래로 혈우의 붉은 빗물이 고였다. 그것을 보니 더더욱 하신후가 얼마나 흠씬 젖어있는지 알만했다.
당장 짹! 하고 소리 질러 그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다. 그러나 연은 어째서인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의 표정을 훔쳐볼수록 용기가 사라졌다.
그는 정말로 피로해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인간다운 온기가 없었다. 연은 지금의 그에게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하신후는 지금 용의 원혼 때문에 저 꼴이 난 거야. 여긴 용의 무덤이고, 그가 세운 탑 중에 셋이 무너졌어. 그게 다 부토와 용 때문인 거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에게….’
연은 무심코 시선을 떨구었다. 발밑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적이야.’
그 어느 때보다도 그 사실이 철저하게 실감났다. 지금 연은 그 누구보다도 하신후 곁에 어울리지 않았다.
‘나와 그가 가까워지면, 결국 나는 나를 잃게 될 거야. 모든 게 지금보다도 엉망이 될 거야.’
무엇 하나 혼란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이 상황에서 연이 하신후에게 먼저 다가간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나는… 나는 큰일이 날 거야.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될 거야.’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자, 어둠에 익은 눈에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이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었다.
“…….”
하신후가 연을 돌아보았다. 정확히 그녀를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멀리 있어 그의 눈빛까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자, 그것만으로도 조금 전까지 했던 다짐이 무너졌다.
혈우에 젖은 것뿐임을 알고 있었다. 하나 연의 눈에는 그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듯 보였다. 언젠가는 제 손으로 그를 그리 만들어야 할지도 몰랐다.
연은 무심코 그에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다 움찔하며 펼치려던 날개를 접었다.
하신후는 잠시 그대로 연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몸을 일으켜,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연은 마음이 무거워 그 자리에 천천히 웅크려 앉았다. 아까까지는 그토록 그를 보러 가고 싶었는데, 보고 나니 허탈해졌다.
하신후는 다시 밖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잠시 한숨을 돌리려 안으로 들어왔던 걸까? 저 혈우는 대체 언제까지 내리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부토의 기운은 왜 이토록 거세게 난동을 부리게 된 걸까.
답을 알 수 없어 가슴이 답답했다. 인기척이 다시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연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신후가 다시 나타나 있었다. 피칠갑을 한 꼴이 악귀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그대로 연 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가 가까워지자 비로소 익숙한 향을 느낄 수 있었다. 혈우의 악취 대신, 늘 연을 사로잡던 그 체향이 풍겼다.
평소에는 그저 좋은 향기라 느껴졌을 뿐인데… 이 순간에는 그 향기에 어쩐지 마음이 울컥해졌다. 그 바람에 연은 미처 하신후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툭.
연의 곁에 놓인 것은, 그의 겉옷이었다. 회운성을 떠나기 전 그가 연을 품에 넣었을 때 입고 있던 바로 그 겉옷이었다.
“…….”
하신후는 아무 말 없이 연을 보고 있었다. 멈칫 연에게 손을 뻗을 듯하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는 그만두었다. 혈우가 스민 탓에 연에게 손대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쯔그그.”
연은 그 바람에 또 울컥하여 부리를 딱딱거렸다. 겉옷이 있으면 스스로나 잘 입을 것이지, 연의 잠자리로 내어주려는 요량인 듯했다. 밖은 저리도 싸늘한 혈우가 쏟아지는데 이 사내는 왜 자기 옷을 새에게 내어주고 있단 말인가. 연이 누군지 알지도 못하면서, 본디 이리 정이 헤픈 천치란 말인가.
북왕이 천치라는 사실을 진즉에 알았더라면 신관들에게 그리 일러주었을 텐데. 하여 새들을 잔뜩 풀어 그의 옷을 한 겹 한 겹 빼앗는 전략을 펼쳤을 텐데.
“쯔즈즈. 쯔즈즈.”
연은 화가 나서 그를 노려보며 낮게 울었다. 하도 괴상한 울음소리 탓에, 하신후가 멈칫 연을 바라보았다.
“…배라도 고픈 건가.”
처음으로 그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낮게 잠겨 피로가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그는 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척이 하도 적은 까닭에, 여전히 깨어나는 자는 없었다. 이제 보니 하신후는 기척을 숨기는 데 무섭도록 능했다.
“나는 가진 것이 없는데.”
“…쯔구구. 쯔즈즈.”
‘너나 뭘 좀 먹지 그래.’
이제는 당신이라 불러주고 싶지도 않았다. 이자는 천치였다. 이리 지쳐서는, 왜 애먼 새를 돌보려 든단 말인가. 연은 애가 타서 그를 노려보았다.
작은 발을 동동 굴러보았으나, 하신후는 무표정하기만 했다. 무표정하달까, 멍한 얼굴이었다.
“…이만 자도록 하는 게 좋겠다.”
“쯔즈즈즈. 쯔즈즈즈!”
‘당신은 대체 언제 잠을 자는 건데?’
하신후는 연의 앞에 슬쩍 자기 겉옷을 밀어주었다. 거기서 얼른 자라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그대로 연을 두고 일어나, 다시 등을 돌렸다.
그러다 몇 발짝 떼지 않았을 때였다. 하신후가 멈칫 연을 돌아보았다.
“너는 볼수록….”
말을 흐린 그가 길고 나른한 숨을 뱉었다.
“…내 지력이 망가져가는 게 분명하구나.”
연은 그의 말에 짜증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이 엉망이 되는 게 당연하지. 그리 안 먹고, 안 자면서 제정신일 리가 있을까? 스스로를 좀 돌아보지 그래.’
한데 볼수록 자신이 어쨌다는 걸까. 하다 만 그의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연은 불안을 억누르며 하신후의 겉옷에 부리를 묻었다. 그의 옷을 부리로 헤집을수록, 그의 체향이 느껴지는 것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연의 후각은 인간과 비할 수 없이 뛰어나다. 하여 이 향기가 이리도 깊이 마음을 파고드는 것이리라.
“쯔즈즈즈. 쯔즈즈즈.”
‘제발 저 비가 빨리 그쳤으면 좋겠다. 진작 이 소원이나 빌어볼걸. 어차피 나와 같은 용의 영이 가세하여 내리는 비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내 청을 잘 들어줄지도 모르는 거잖아.’
연은 진심을 다해 혈우가 그치기를 빌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