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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49)화 (4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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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 하신후의 처지도 연에 비해 썩 나을 게 없었다.

아니, 연은 그동안 그저 신전에 갇혀 피 흐르는 고깃점만 먹고 있으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보면 볼수록 갖가지 궂은일은 도맡아 책임지고 있었다.

지난번, 제 영지도 아닌 삼진에 가서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한 것도 그였다. 그러더니 지금은 이처럼 위험한 땅에 와서도 혈혈단신으로 노동 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나 하신후 말고는 모두가 여기 들어와 비를 피하는 중이었다.

“짹…! 쯔그그그그. 쯔그그그.”

연은 짜증이 치밀어 부리를 딱딱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작디작은 부리라 그리 위협적이지는 못했다.

“보면 볼수록 정신 나간 새로군.”

현한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연의 머리를 툭 쳤다.

“그만 밥이나 먹거라. 내가 여기까지 널 데려와 네 끼니를 챙기게 될 줄이야.”

과실을 눈앞에 두었으나 식욕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현한이 주는 음식은 어째 먹고 싶지 않았다.

‘저 녀석 겉옷에 누워있을 때 그 체향이 내 몸까지 밴 것 같단 말이야. 그러니 저 손으로 주는 건 전혀 먹고 싶지 않아!’

과실 냄새로도 현한의 체향이 다 가려지는 건 아니었다. 지난번에도 느낀 것이지만, 현한에게서는 시린 날붙이 냄새가 풍겼다. 품에 검날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찌 사람 몸에서 이런 향이 풍기는 걸까. 딱히 늘 곁에 검을 두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설마 마음에 품은 살의가 깊어 몸에서도 날붙이 내음이 나게 된 건 아닐 텐데 말이지.’

연이 가만히 쏘아보기만 하자, 현한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더니 손에 든 과실을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무뚝뚝하게 과실을 으적거리는 꼴이 영 보기 싫었다. 이자는 하신후가 없어지면 늘 급격하게 말수가 줄었다. 이 세상에서 제 혈육 아니면 별로 관심 가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 관심이 썩 좋은 방향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 듯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전에 현한이 하신후의 옛 정인들과 일부러 놀아났다는 말을 들은 적 있는 거 같은데. 설마 그 말이 전부 사실일까?’

그 물음의 답을 알려거든 하신후의 옛 정인들이란 대체 누구인지부터 따져 물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연이 무엇 하러 그리 한단 말인가.

‘누가 누구와 어떻게 놀아났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걸. 하신후가 지난 정인을 백 명 두었든, 이백 명 두었든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아무튼 아직까지 내 적일 뿐인데.’

연이 근심에 겨워 부리를 딱딱거리고 있을 때였다.

과실 몇 개를 혼자서 다 먹어치운 현한이 돌연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갑자기 연을 덥석 움켜쥐었다.

“짹!”

놀란 연이 눈을 크게 뜨며 비명을 뱉었다. 그러나 현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먹이를 마다하는 건 네 자유지만, 이건 아니다.”

그는 품에서 정체모를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꺼냈다.

‘대체 저게 뭐야!’

연의 눈에 경악이 번졌다.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현한은 연을 쥔 채, 쥔 손의 손가락만을 사용하여 가볍게 연의 부리를 벌렸다. 그 투박한 손길에 무력하게 놀아나는 제 주둥이가 더없이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쯔그그! 쯔그그그!”

연이 비명을 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도와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연의 지저귐에 그들을 돌아보기는 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기야 공식적으로 지금 연은 현한이 기르는 사나운 새일 뿐이었다. 이 정도 소란으로 황제의 이복동생이자 하 씨 가문의 서자에게 굳이 행위를 의문해올 자가 누가 있겠는가.

현한은 태연하게 연의 입안으로 액체를 흘려 넣었다. 부리를 버둥거려 봐도 약을 붓는 그의 조준은 전혀 빗나가지 않았다.

연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이자가 지금껏 먹인 약 때문에 자신의 영력이 시원찮은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계속 받아먹는 이상, 본모습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영력을 회복하지 못할 터였다. 새의 몸뚱이가 완전히 이 약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현한은 연이 약을 다 삼킨 뒤에야 움켜쥔 손을 풀어주었다.

‘욱! 우우욱!’

연은 비틀거리며 날개를 경련했다. 분노와 울화가 치밀어 당장이라도 본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오늘이 바로 하신후에게 정체를 밝혀야 하는 날인 거 아닐까. 정체를 밝히면 이 자리의 모두와 싸우게 되려나?!

“그리 죽는 시늉을 해봤자 죽지는 않는다.”

현한은 무뚝뚝하게 그 한마디를 뱉더니, 남은 약을 다시 품에 넣었다. 약이 효능 탓인지 눈앞이 핑 돌았다. 연은 힘없이 늘어진 채, 얕은 숨을 할딱이며 날개를 경련했다. 온몸의 힘이 빠지니 분노와 서러움이 오락가락 교차했다.

화가 치밀다가 자존심이 상했다, 끝내는 서러워졌다. 연은 기어코 눈물이 나는 걸 참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신룡의 위엄은커녕, 이런 하찮은 자의 손에 모욕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대체 뭘 위해 이 모욕을 견디고 있는 거지?

답은 하나였다. 하신후에게 정체를 들키기 두려웠다. 아직은 그러기 싫었다.

“…새가 우는 꼴은 처음이군.”

현한은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지는 새의 눈을 물끄러미 마주했다. 흰 새의 눈가가 온통 눈물로 젖어 들었다. 서럽게도 우는 모습이었다.

연은 울면서도 설움과 분노를 한껏 담아 현한을 노려보았다. 태어나서 이리 남 때문에 울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이 비루한 자가 연에게서 귀하디귀한 첫 눈물을 빼앗아간 기분이었다.

그때 문득 현한이 연에게로 손을 뻗었다. 연은 한 손에 쏙 들어갈 만큼 조그마해진 채였다. 하여 연의 머리에 닿은 손끝은 그리 거칠지 않았음에도 묵직하게 느껴졌다.

“쯔그그그.”

연은 당황해 신음을 흘렸다. 이 음흉한 자가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겐가.

긴장해 온몸을 곧추세웠으나, 현한은 그저 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문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뭉개는 것 같기도 했다.

“쯔그그. 쯔그그그.”

연은 짜증스럽게 그의 손길을 피해보았다. 그러나 역시나 이 조그만 몸뚱이는 뭘 하든 시원찮았다. 현한은 연의 하찮은 저항을 무시하며 계속 보드라운 새대가리를 쓰다듬었다.

“하신후가 네게 관심을 보여서 그런가. 그가 지닌 건 무엇이든 탐이 나던데. 그래서 너도 처음 봤을 때보다는 쓸 만한 새로 보여.”

참으로 현한다운 말이었다. 거리를 두고 앉았다 한들 곁에 일행이 없는 것은 아니거늘. 빗소리에 제 말소리가 묻힐 걸 알고서 하고픈 말을 뻔뻔히 지껄이고 있었다. 이 자가 하신후 곁의 여인들에게 죄다 추근거렸다는 건 헛소문이 아닌 게 분명했다.

현한은 연의 머리를 어설프게 쓰다듬다가, 다시 몸을 덥석 쥐었다. 약 기운 탓에 이번엔 제대로 저항할 수조차 없었다.

현한은 그대로 연을 집어 들어, 웬 넝마로 둘둘 말았다. 추위를 염려해주는 것 같기는 했으나 전혀 고맙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연을 포박해 제 무릎에 올렸다. 그리곤 손 장난감이라도 되는 듯 연의 새대가리를 슬슬 쓸었다.

‘비록 새 신세이긴 하지만 감히 내 머리를 이딴 녀석에게 내맡기게 되다니! 내 처지가 참으로 고약하구나. 기왕 이리 된 거 이 상황을 나도 즐기기라도 해야 하나?’

문득 하신후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아니, 어차피 지금 그는 연이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으니 누구 무릎에 있든 별말 안 할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그것도 야속했다.

‘새로 모습이 좀 변한 것뿐인데 그렇다고 사람을 그리 못 알아보다니. 내게 정말로 관심이 있었다면, 모습 좀 변했다 해도 곧 정체를 알아봐야 마땅한 것 아닌가?’

한데 그는 또다시 연을 현한에게 내맡겼다. 알아보긴커녕 연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기야, 어차피 지금 자신의 머리는 평범한 새대가리일 뿐이다. 누가 만지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젠장, 하늘 아래 두려워할 것 없는 신룡인 내가 이 무슨 꼴인가! 하신후가 제 입으로 요즘 미쳐가는 것 같다 하던데, 나도 그 못지않게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가 없구나!’

혈우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그러니 하신후도 계속 저 밖에 있을 터였다. 탑의 희미한 진동이 느껴질 때마다, 그것을 억누르는 그의 결계의 기운이 전해져왔다. 그는 밤을 지새워 탑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을 떠도는 죽은 용의 영을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이 자와 함께 있어야 하는 건가?’

연은 원망스레 통로 너머의 혈우를 응시했다. 붉은 비는 어느새 광풍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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