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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48)화 (48/122)

48

‘용의 무덤.’

그 말은 연에게 더없이 혼란스러운 이름이었다. 그러나 하신후에게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그는 짜증스럽게 신세한탄을 뱉기 시작했다.

“용이 묻힌 곳마다 공들여 세운 탑들인데. 단숨에 셋이 무너지다니, 죽은 용을 살려내 다시 죽이고 싶어지는군. 그럼 조금은 얌전해지려나.”

“…….”

“이 망령들이 얌전해져야 내가 한가로워질 텐데.”

짤막히 짜증을 낸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 손을 나른하게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 검은 검이 나타났다. 광택 없이 투박한 검이었다.

하신후가 검신을 아래로 하자, 검신 끝에서 검은 핏줄 같은 금들이 땅을 가로지르며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결계로구나!’

연은 긴장하여 그의 어깨를 발톱으로 힘껏 붙들었다.

“-아야.”

하신후가 어깨의 연을 슬쩍 돌아보았다. 인상을 찡그린 것을 보니 발톱에 살갗을 찔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러게 겉옷을 잘 챙겨 입었어야지. 아까는 분명 털이 폭신한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차림새가 한결 가벼웠다.

연은 슬그머니 발톱의 힘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연의 몸뚱이가 덥석 손에 붙들렸다. 하신후가 돌연 연을 붙잡아 다시 제 품에 넣은 것이다. 제법 거친 손길에 연이 당황해 머리를 내미는 순간이었다.

후드득-!

검붉은 탑의 표면에 붉디붉은 핏빛의 혈우가 떨어져 내렸다. 비릿한 악취가 진동했다. 요기 가득한 비였다.

혈우에 닿은 탑의 외피가 한 차례 꿈틀거렸다. 그러나 꿈틀거림은 곧바로 하신후의 검에서 비롯된 결계에 짓눌렸다.

‘이 탑은 꼭 살아있는 짐승 같아…! 아니,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이건 요기에 가까운 기운인데…!’

가슴이 세게 뛰었다. 연은 악취에 가까스로 숨을 쉬었다. 혈향이 실린 무거운 바람이 그들을 덮쳤다. 비는 하신후를 피해 탑을 간헐적으로 적셨다.

검의 결계가 탑에 흩뿌려지는 피를 집어삼키듯 멸해나갔고, 하신후의 결계는 어느새 바닥부터 외벽을 타고 뻗어 내려가고 있었다. 피에 물들지 않는 것은 탑뿐이었다.

탑 아래 먼 땅이 온통 혈우에 젖어드는 광경이 눈에 보였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혈우와 동반한 핏빛 안개는, 얼핏 어디선가 본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저 모습은 꼭….’

연 자신이 힘을 쓸 때와 조금 비슷하지 않은가.

연이 멀리 자욱해진 핏빛 안개 가운데서 ‘그것’을 본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것은 짐승의 아가리였다. 아가리는 섬뜩하게 그르렁대고 있었다. 으르렁거림 가운데 뒤섞인 기이한 목소리가 존재했다.

[너는 미물이 아니로구나.]

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꿈틀거리는 검붉은 안개의 목소리가 연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강렬한 현기증이 돌연하게 엄습해왔다. 연은 무심코 눈을 꽉 감았다.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환청이 틀림없었다. 이 목소리는 오로지 연만을 향하고 있었다.

[너는 미물이 아닌 존귀한 것이로구나. 나와 같은 것이로구나.]

‘나와 같다니 이건 대체-!’

답을 구할 틈 따위는 없었다. 다음 순간 홀연한 환영이 연을 덮쳤다.

부연 피 안개 가운데 펼쳐진 것은 산이었다.

신관의 옷을 입은 자들이 높은 산을 오른다.

그중 붉은 물을 머금은 능선.

그곳 가까이에는 둥그런 돌들이 가득하다.

누군가 둥그런 돌 가운데 흰 것을 들어올린다. 흰 돌은 다른 것에 비해 크기가 작다.

강한 것을 깨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너무 위험하니까요.

이것이 적당합니다.

그래요. 우리의 새로운 신룡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신관의 옷을 입은 자들이 흰 돌을 가져와, 제단에 바친다.

제단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다.

월이시여…! 군주시여…!

제물을 마련했습니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와 함께, 흰 돌에 금이 갔다. 그것은 이제 돌이 아니라 알처럼 보였다.

불꽃이 넘실거리며 연까지 집어삼킬 듯 거대해져갔다.

돌이 알이 되다니.

연은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것은 분명 신관의 옷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연이 아니라 월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월.

그것은 죽은 선대 용의 이름 아니던가.

다시금 강렬한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것이 네가 가진 의문에 대한 답이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네가 지닌-.]

연은 사납게 환청의 말을 잘랐다.

“웃기지 마! 내가 언제 이런 광경을 보고 싶다고 했다는 거야? 이게 대체 뭔지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았잖아. 아니 그보다 너는 대체 누군데? 누가 감히 내게 이따위 환영을 보여주느냔 말이야!”

연은 화가 나서 말을 뱉었다가 뒤늦게 놀랐다. 자신은 아직 새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언제 사람의 말을 되찾게 되었지?

기겁하며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다시금 눈앞이 명멸했다.

한순간 강렬한 메스꺼움이 찾아들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으나, 눈을 꽉 감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짹!”

눈이 뜨이자, 비로소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다행히 새의 소리로 된 비명이었다.

주위에 악취 섞인 혈 향이 자욱했다. 아직도 붉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누군가의 곁이었다. 그러나 들려온 목소리는 하신후가 아니었다.

“사나운 새 같으니. 나를 또 할퀸 것이냐.”

청천벽력처럼 들려온 음성의 주인은, 틀림없이 현한이었다.

‘…으아악- 말도 안 돼!’

연은 내적 비명을 참으며 현한의 겉옷 소매에서 황급하게 빠져나왔다. 소매 귀퉁이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뿐이나, 그것 또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겉옷 밖으로 나와 옷소매의 주인을 확인하니, 정말로 현한이었다. 기절초풍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감시탑 내부에서 함께 혈우를 피하는 중이었다.

‘하신후 이 바보 같은 자가 감히 나를 또 현한에게 돌려준 것인가!’

아까는 분명히 하신후의 품속에 있었는데, 눈 한 번 감았다 뜨니 어느새 이 처지였다. 연이 파닥거리며 급히 달아나자, 현한이 사슬을 당겼다.

“짹!”

현한의 손짓과 동시에 연의 족쇄가 제 기능을 했다.

엎어진 연은 원망스럽게 발목의 족쇄를 내려다보았다.

늘 하신후가 변태라는 소문을 들어오긴 했으나 한 번도 깊이 귀 기울인 적 없었거늘. 이리 발목에 족쇄 따위를 쉽게 걸어두는 걸 보니, 그의 취향이 비로소 의심스러워졌다.

족쇄라니! 하필 족쇄라니!

연은 분노를 담아 현한의 코앞에서 날개를 파닥였다.

‘이 자 곁에서 자느니 그냥 새장에서 자는 편이 낫겠다. 아니, 차라리 내 본모습으로 돌아가 버릴까? 그럼 적어도 이 자 품에 있을 필요는 없을 텐데!’

“짹! 째재잭! 짹!”

연이 사납게 지저귀어보았으나 현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새의 눈빛 따윈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내가 너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느껴지지 않는 것이냐!’

연은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의미는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차라리 손이라도 또 깨물어주면 이자가 넌더리를 내지 않을까?

연의 눈길이 절로 아까 깨물었던 현한의 손에 가닿았다. 그의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입안에 피 맛이 잔뜩 감돌았었다.

“또 나를 물어뜯기라도 하려는 거냐.”

현한이 연을 노려보며 인상을 썼다.

“그랬다가는 오늘 밤 너를 꼬치구이로 만들어주지.”

꼬치구이? 감히 나를 꼬치구이로 만들겠다고?

기가 차고 황당한 말에 연은 더 이상 날갯짓조차 하고 싶지 않아졌다. 이 방종한 자에게 언젠가 기필코 이 순간의 수모를 갚아 주리라.

아무리 그리 다짐해봤자 지금 연은 그의 눈에 하찮은 새 한 마리일 뿐이었다.

“겨우 얌전해진 건가.”

현한이 연의 날개를 쿡 찔렀다. 제 처지에 기가 막혀 얼빠져 있던 연은, 그 손길에 놀라 몸을 움츠렸다.

“아까는 대체 왜 하신후에게로 날아간 거지?”

현한은 물어뜯긴 복수라도 하려는 듯 연을 다시 쿡쿡 찔렀다.

“네 주인의 명을 아직도 따르려는 거냐. 미물 주제에 너도 대단한 충정이로군. 훈련 받은 새는 다 네 녀석 같은 건가.”

“짹!”

참는 것도 한도가 있었다. 연은 사납게 부리를 치켜들며 자신을 찌르는 손가락에 달려들었다.

“윽!”

역시나 이번에도 물어뜯는 것은 대성공이었다. 비록 입에 남는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으나 구겨지는 현한의 표정을 보니 흡족했다.

연은 의기양양하게 현한을 쏘아보았다. 현한도 화가 치민 듯 연을 노려보았다. 그래봤자 그다지 무섭지는 않았다.

‘이 지렁이만도 못한 현한 녀석. 왜 날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야? 나한테 이러지 말고 평소처럼 네 형에게나 가서 시비 걸란 말이야.’

하신후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설마 아직도 저 위에서 혼자 결계를 지키고 있는 건가. 그 생각을 하니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혈우는 범람하는 요기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듯했다. 요기를 넘어, 지독한 부패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 붉은 부토를 이루는 사특함과 근원을 같이 했다.

지금 이 감시탑은 혈우를 그저 견디기에 더없이 불안정한 상태인 듯했다. 탑들 가운데 셋이 속절없이 무너진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본래는 견딜 수 있었던 것을, 지금은 견딜 수 없어진 것이다. 탑이 약해진 것이거나 부토의 기운이 강성해진 것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부토가 강성해졌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깊어졌다는 의미였다.

‘그런데도 이 자들은 모든 걸 하신후한테만 맡기고 자기들은 숨어서 비를 피하다니! 이러면서 북왕이라 치켜세워주기만 하면 다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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