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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47)화 (47/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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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통로는 다시 외부로 이어졌다. 어느새 그들은 꽤 높이 올라와 있었다. 현한은 연을 손에 움켜쥔 채로, 붉은 땅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풍경에 눈길을 주었다. 연도 덩달아 풍경을 응시했다.

‘정말 보면 볼수록 스산한 땅이로군, 온통 검고 붉은 핏빛뿐이니. 게다가 이 정체모를 기운은 뭐지? 이제 보니 탑만이 아니라 이 땅 전체의 기운이 기묘한 것 같은데….’

연이 생각에 잠겨드는 순간이었다.

문득 현한의 입에서 예상 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여기 다시 오면, 무언가 기억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틀렸나 봅니다. 저 풍경을 다시 보아도 여기서 보낸 제 어린 시절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는군요.”

연은 멈칫 현한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어린 시절을 부토에서 보냈다고?’

평범한 제국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현한은 하신후와 하을령의 혈육 아니던가. 그 역시 그들처럼 부토의 요기에 맞서는 힘을 지녔을지도 모른다. 한데 대체 무슨 사연으로 이 척박한 땅에서 자라나야 했단 말인가.

연이 미처 추측을 가다듬기도 전에, 현한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제가 그 시절을 기억해내면 그때야말로 제게도 하 씨 성을 주실 겁니까?”

현한이 하신후를 노려보았다. 하신후도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너는 내 어머니의 자손이 아니다.”

“…하, 그렇지요.”

“네가 나와 폐하를 네 혈육이라 칭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네가 부토에서 살아 돌아온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는 내 아비의 친자임을 입증할 방도를 갖고 있지 않아.”

하신후의 음성은 변함없이 온기가 없었다. 현한은 발끈했다.

“제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기억을 없는 것 취급하실 셈이십니까. 제 부모께선 부토에서 저를 기르셨지요. 그리고 제 부친께선 틀림없이 제게 형님과 누님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제국으로 돌아가거든 하 씨 가문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저를 내치신 건 두 분이십니다!”

“…기억이라. 그러한가.”

하신후의 음성은 변함없이 온기가 없었다.

“네겐 늘 똑같은 말을 가르쳐야 하는구나. 네 말엔 아무런 증좌가 없다. 너처럼 하 씨 가문의 사생아라 떠들던 자들은 무수히도 많았지. 그들 모두를 내 아우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저는 그들과 다릅니다! 저는 부토에서-!”

“그래. 너는 부토에서 성장한 제국인이지. 하여 나는 너를 달리 추궁하지 않았다.”

“추궁하지 않으셨지만 제게 하 씨 성을 내려주시지도 않았죠. 덕분에 저는 여전히 성이 없는 반쪽짜리 귀족입니다.”

“그 말을 하려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건가?”

하신후의 입가에 드리워진 것은 부토만큼이나 스산한 미소였다.

“겁이 없구나.”

그는 한 걸음 계단을 내려와 현한을 더욱 가까이 마주했다.

“네가 부토로 따라온 까닭이 나로부터 네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 함이듯… 나 역시 그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느냐.”

“…….”

“내가 부토에서 너를 없애도 돌아가면 나를 추궁할 자는 없다. 이 땅에서 일어난 죽음은 지금껏 무수했으니, 너 역시 그리 된다 하여 이상할 것은 없지.”

“…제가 죽기를 원하십니까?”

하신후의 흉흉한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아직은 아니다. 나는 네가 기억을 되찾기를 원하고 있으니.”

“제 기억이 형님께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기억이 들추어져 네가 내 아비의 자손이 아님이 밝혀진다면… 그때 너는 비로소 내게 쓸모 있어질 거다.”

현한이 경직되는 것이 손에 쥐인 연에게도 생생히 전해져왔다. 그의 살갗이 박동으로 쿵쿵거렸다.

“네가 거짓을 고한 것이라면, 너는 하 씨 친족이 아닌 자가 부토에서 생존한 귀한 사례가 되지 않겠느냐. 너를 연구하면 나의 백성들이 너처럼 부토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지.”

현한을 바라보는 하신후의 눈빛은 소름끼치도록 담담했다. 그는 현한을 연구라는 이름하에 살을 가를 대상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연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언젠가는 연도 한층 분명하게 마주하게 될 표정일지도 몰랐다.

하신후는 물끄러미 현한을 내려다보다가 등을 돌렸다. 그가 다시 앞장서 계단을 올라가려 할 때였다.

“제가 형님의 반쪽짜리 혈육이 맞다면…. 그때는 어쩌실 겁니까.”

현한의 물음이 다시 그를 향했다. 그러나 하신후는 이번에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은 지평선 쪽을 향했다.

해질녘의 핏빛 노을이 땅을 더욱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곧 혈우가 내리겠군. 현한, 너는 먼저 내려가 결계의 완성을 서두르라 명해라.”

갑자기 내려진 명에 현한은 움찔했다.

그는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급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붙잡힌 연도 덩달아 정신없이 아래로 향했다.

‘혈우라고? 혈우라면 피로 된 비 같은 건가. 들은 적 있어, 부토 중엔 그런 비가 내리는 땅도 있다고. 그런데 하신후는 왜 오지 않지? 위험할 거 같은데 혼자서 뭘 하려는 거야?!’

무언가가 불길했다. 너무 불길해서 짜증이 치밀었다.

연이 누구보다 긴밀하게 염탐해야 하는 상대는 하신후다. 현한도, 밑에 있는 다른 누구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런 때 그를 보지 못하게 되다니! 암만 그의 흉흉한 표정에 기가 질린 참이라 해도 그를 혼자 두고 가고 싶진 않았다.

‘혈우’라는 말이 연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현한 따위에게 붙잡혀서 하신후를 떠나는 건 질색이었다.

“짹!”

연은 있는 힘껏 자신을 움켜쥔 현한의 손을 물어뜯었다. 급히 아래로 향하던 현한은 놀라 손의 힘을 풀었다. 역시 무방비해진 때를 노린 것이 정답이었다.

연은 당황한 현한의 얼굴을 덮칠 듯 날아들었다가, 그가 자신을 붙잡으려 두 손을 펼친 순간 쇠사슬을 입에 물고 세게 당겼다.

“쯔즈즈그! 쯔그그!”

힘줘 당기자, 현한의 손가락에 어설피 감겨 있던 쇠사슬의 끝이 허공으로 미끄러졌다. 연은 그때를 노려 정신없이 날갯짓하며 위로 날아갔다.

“-!”

현한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연의 모습을 기가 차 노려보았다. 어찌나 세게 물렸는지 연에게 물어뜯긴 손에서 핏줄기가 흘렀다.

“부토에서 혈우를 맞으려 달아나다니, 죽기를 자초하는 새로군!”

그가 저주 같은 소릴 지껄이거나 말거나, 연은 정신없이 사슬을 부리에 물고 족쇄를 딸그락거리며 날갯짓했다. 현한은 연을 붙잡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하신후의 명대로 아래의 사정을 먼저 살피기 위함인 듯했다.

‘늘 하신후에게 시비만 거는 것 같더니 이럴 때는 그래도 명을 잘 듣는군.’

연은 그가 떠나는 기척에 귀 기울였다가, 더욱 열심히 날갯짓했다.

현한은 꽤나 빠르게 아래로 내려왔던 모양이었다. 한참 날아올라온 것 같은데 하신후는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연은 끝내 자신이 탑의 꼭대기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오를 계단이 없었다. 사방이 탁 트인 탑의 정상에는 하신후가 서있었다. 탑의 정상은 기묘하다 못해 보기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거센 폭풍이 탑의 외부를 모조리 훼손하며 지나가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신후는 불탄 듯 섬찟한 흔적 앞에 홀로 서있었다. 연의 날갯짓을 알아챈 것인지, 그가 연을 돌아보았다.

그는 멈칫 미소를 지었다.

“…현한이 너를 놓쳤구나.”

연은 저도 모르게 사람의 말로 그에게 답할 뻔했다. 현한을 물어뜯고 오느라 입에서 그의 피 맛이 감돌았다. 그게 얼마나 불쾌한지 아느냐고, 따져 물으려다 제 처지를 기억해냈다.

“짹! 째재재잭!”

‘당신은 대체 여기서 혼자 뭘 하려고? 다들 피하게 해놓고 왜 같이 피하질 않아?’

연은 신경질적으로 지저귀며 하신후 곁으로 파닥파닥 날아갔다. 그의 시선이 연에게 머물렀다.

“곧 혈우가 내릴 텐데. 너는 저 아래 숨어 있는 편이 좋아. 혈우에 닿으면 너는 쉬이 혼이 상하고 몸이 문드러질 테니.”

하신후는 연에게 말을 건넸다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내가 요즘 정말로 미쳐가는 건가. 이제는 하다하다 새와 대화하려 드는군.”

그는 혼자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위로 거짓말처럼 검붉은 구름이 고여 들고 있었다. 마치 이 탑이 살아 숨 쉬며 구름을 부르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구름을 보는 것만으로 견딜 수 없이 구역질이 났다. 왜일까? 난생 처음 느껴지는 메스꺼움이었다. 연은 저도 모르게 날개를 접고 하신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저 구름은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연의 혼란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인지, 하신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곳은 용의 무덤이지. 용은 죽고 나서도 말썽이 많거든. 하여 내가 세운 제 묘비가 견디기 어려운 모양이다.”

…용의 무덤?

하신후가 정말로 새와 말을 주고받으려 하고 있다는 점이 약간 우스웠으나, 연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선대 용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상상해본 적 없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용의 죽음에 관해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건 불경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해왔었는데, 정말 그 때문이었을까?

용의 무덤. 그 말은 지금 이 순간 더없이 불길하게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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